대체 나는 예전엔 이 이야기를 왜 그리 건성으로 읽은 것일까? 올해 안동의 권정생 선생 생가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권정생님 작품을 몇 개 다시, 제대로 읽으려고 방학 때 사둔 책이 <몽실언니>다. 이렇게 몰입할 줄은 몰랐다. 저녁 나절에 잠깐 훑어보려고 펴들었다가 끝까지 다 읽었다. 228쪽에 접어들 땐 나도 모르게 엉엉~ 눈물을 훔치면서.
그리고 알았다. 권정생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가를. <몽실언니>는 아동문학의 테두리에 가둘 수 없는 작품이다. 내가 읽은, 문학사적 평가를 높게 받는 그 어떤 한국소설보다도(많이 읽은 편이 아니라서 쫌 그렇지만) 못하지 않으며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다.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시기의 삶을 너무 잘 그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대 삶과 전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윤리의식과 '몽실언니'라는 기억에 남는, 캐릭터의 힘 때문이다.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윤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 잘 없으며, 이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캐릭터도 흔치 않다. 그리고 난 권정생님의 문장이 참 좋다. 이렇게 쉽고 짧고 담백한 문장으로 이토록 마음을 속속들이 건드리다니! 우리말의 대가다.
이야기는 1947년 봄에 시작된다. 해방 후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몽실이 가족.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은 몽실이 가족을 갈라놓는다. 몽실의 어머니는 몽실 아버지 정 씨가 멀리 일하러 간 사이에 몽실이를 데리고 살림에 여유가 좀 있는 김 씨에게 살러 간다. 배다른 동생인 영득이 태어나면서 그 집에서 구박덩이가 된 몽실은 새아버지 김 씨의 폭력으로 절름발이가 되고 그때부터 더한 고생이 시작된다. 그 집에서 살지 못하고 친아버지에게 가지만 친아버지 김 씨가 새로 맞은 착한 아내 북촌댁은 지병이 있었다. 북촌댁이 난남이라는 아기를 낳고 세상을 떠나자 몽실이는 구걸까지 하면서 배다른 동생 난남이와 병든 아버지 정 씨를 끝까지 보살핀다. 그리고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또다른 배다른 동생 영득, 영순까지 사랑으로 감싸안는다.
어른들은 국군과 인민군이 갈라져서 싸우고, 죄없는 어린 몽실이를 '화냥년의 딸'이라 부르고, 몽실이가 의붓자식이라고 박대하지만 몽실이는 그런 세상 속에 휩쓸려가지 않는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가난 때문에 몸을 파는 양공주 금년을 이해하고, 빨치산이 된 아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동네 할아버지를 이해한다. 국군이나 인민군이나 다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배다른 동생들을 남이 아니라 진짜 자기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다.
당시는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었다. 전쟁통에 이쪽 저쪽 편을 갈라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동네 하나가 폭격으로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몽실의 아버지도 불쌍한 몽실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른들의 불행은 때로 힘이 약한 어린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몽실 곁에는 그런 어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몽실이를 살뜰하게 걱정한 고모네와 친딸처럼 다정하게 대해준 북촌댁, 남주네 어머니와 최 씨네 가족, 금년이 아줌마가 있었다. 몽실이는 그속에서 인간미를 잃지 않고 세상을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자란다. 사람을 언제나 사람으로 대할 줄 알았다.
책을 다 읽고 이 땅의 수많은 '몽실언니'들을 떠올렸다. 1950~70년대를 이야기할 때 흔히들 고도의 경제성장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만,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은 경제 발전만이 아니다. 어떤 곤궁 속에서도 자기를 잊고 주위 사람을 먹이고 살리고 입히면서 온 생을 보내온 몽실언니들이 존재했다. 우리들의 언니, 어머니, 할머니들이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건 그들의 손길 덕분이다.
덧붙임) 1984년 첫연재 당시, 검열 때문에 인민군 이야기가 다 잘려나가서 작가가 쓰려고 했던 분량보다 훨씬 줄어들어서 작품이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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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나 일본 같은 외국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줄지어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조국의 품은 초라하고 쌀쌀했다. 그래서 말만으로 해방된 조국에 빈몸으로 찾아온 그들은 살아갈 길이 없었다. 귀국동포라는 말은 라디오나 신문 같은 데에서만 쓰이고, 보통은 '일본 거지' '만주 거지'라고들 불렀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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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바위골 앵두나무 집 할아버진 어찌 됐어요, 아버지?"
"아마 돌아오시기 힘들게 됐나 보더라."
"왜 못 오시나요?"
"아들이 있는 곳을 대 주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는다니까."
"하지만 할아버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잖아요?"
"누가 그걸 곧이듣니? 할아버지가 잘못한 거지. 아무리 자식이지만 빨갱이한테 떡을 해주고 닭을 잡아 주다니. 그건 백 번 천 번 잘못한 거야."
"아버지!"
몽실이 정 씨 얼굴을 쳐다봤다. 어두운 움막 속에서도 그걸 알 수 있었다.
"...... 그렇지 않아요. 빨갱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 거여요."
"......"
정 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이 맞죠?"
정 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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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생은 하던 말을 잠깐 그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학생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 지금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도 과연 남의 꼭두각시놀음이 아닌, 제 스스로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면 언제든지 속게 마련입니다. 속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정신 차려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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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고모네도 불탔다. 그리고 고모는 그 불구덩이에서 죽었어."
"......"
몽실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개암나무골은 무슨 죄가 많아 그런지 동네가 모두 타 버렸지. 사람도 반은 죽고......"
"그럼, 고모부는 어쨌어요?"
"너희 고모부는 우리 애 아버지랑 북으로 끌려갔단다. 인민군이 데려간 거지. 나 혼자 남겨 놓고, 집도 없이 이렇게 남겨 놓고......"
아주머니는 코를 핑 풀고는 눈물을 훔쳤다. 아주머니의 얘기는 한참 이어졌다. 살아남은 고모네 아이들은 국군이 다른 많은 아이들과 함께 트럭에 싣고 갔다는 말까지 자세히 했다.
"애들은 고아원에 갔단다.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놓고 키운대."
몽실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왠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다만 쌀을 씹는 이빨의 느낌이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이빨만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 다된 거야. 언제 그 사람들이 돌아오겠니?"
아주머니는 무너지는 듯한 한숨을 토해 내었다. p15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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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저건, 저건 갓난이아야!"
어떤 아주머니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검둥이 새끼구나, 어느 나쁜 엄마가 내다 버린 거야!" (...)
"에잇, 더러운 것!"
어떤 남자가 침을 뱉으며 발길로 찼다.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었따.
"안 되어요!"
몽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아기 쪽으로 가리고 섰다.
"비켜! 이런 건 짓밟아 죽여야 해!"
"화냥년의 새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제각기 침을 뱉고 발로 쓰레기 더미를 찼다. (...)
몽실은 얼른 아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줄곧 무언가 소리 지르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몽실은 열 걸음쯤 달아나서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곤 애원하듯이 꾸짖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 p1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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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휴전협정이라는 것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한 삼팔선은 없어지지 않고 다만 이름만 휴전선으로 바뀐 채 본래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과 남쪽에서 북으로 간 사람들은 돌아가지도, 돌아오지도 못한 채 전쟁만 쉬게 된 것이다.
개암나무골 몽실이 고모부도, 그리고 그곳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의 남편도 돌아오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전쟁은 일으켰고, 무엇 때문에 쉬게 되었는지, 후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바보처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병신이 되고 그리고 고향을 잃었다. 총알이 날아오는 전쟁은 그쳤지만,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또다른 전쟁을 해야 했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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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하고 우울한 항구 도시는 먹고살기 위해 서로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먹고사는 일 외에 좀 더 즐기기 위해 남을 해친다. 어떤 방법이라도 가리지 않고 많이 차지하는 것을 좋아했다.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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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앓은 지 10년째, 난남이에게 이젠 모든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 얼굴의 아름다움도, 착한 마음씨도, 그리고 사랑했던 남편도 난남이에게서 멀리 가버렸다.
"언니."
"응."
"엄마가 날 낳아준 것 고마워."
"뭘 새삼스럽게 그런 말 하니!"
"언니가 참 좋거든."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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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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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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