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학생들한테서 소식이 오는 시기가 있어요. 주로 대학 입학했을 때, 군대 갈 때, 취직했을 때. 간혹은 결혼할 때도 있고. 취업했을 무렵이 학창시절 선생님을 기억하는 마지막 시기인 듯해요. 그래서 학생들과의 인연은 그들이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 때 대개 종료되지요. 중고등 쌤들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시효가 보통 그 정도인 듯.
어제 만난 H군과는 인연이 좀 더 깊어요. 중학교 졸업 후 한두 번이 아니라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꾸준히 연락이 오갔으니까요. 고교 때도, 대학 가서도, 군대 휴가 나와서도, 로스쿨 다닐 때도, 거의 매년 본 듯해요. 그 사이 중2 소년은 이십대의 끝자락에 와있고 서른 몇 살 선생은 사십대 말미를 지나게 됐고.
사실 제 기억에 확실한 흔적을 남긴 애들은 죄다 말썽쟁이예요. 이 친구가 예외죠. 울반 반장이었는데 다재다능하지만 잔실수가 많았어요. 당시는 학교에서 준비물을 안 줄 때라 반장이 주로 각과목 준비물을 전달했는데 꼭 뭐 하나는 빠트리고 적어요. 가위만 적고 풀은 빼먹는 식으로. 근데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한두 달 지나자 애들이 점점 자기주도적으로 변해요. 반장이 딴 과목 전달사항을 칠판에 적으면 “@@는 안 필요해?” “@@는?” 하는 식으로. 그래도 못 미더운지 옆반 가서 꼭 확인하고요.
한 번은 가정과목 수행평가할 때 미리 숙지하고 와야 할 교과서 쪽수를 얘가 잘못 불러줬어요. 예컨대 42쪽인데 142쪽이라 한 거죠. 그날 아침 자습시간에 학생들이 정신없이 142쪽을 외우고 있는데 한 학생이 “쌤 이거 안 배운 건데 왜 시험에 나와요?” “그럴 리가?” 놀라서 옆반 가정쌤한테 뛰어가 확인하니 42쪽. 우리반 멘붕..! 수행이라 다시 날을 잡아서 별탈없이 끝났지만(요샌 교사들이 일일이 확인하는데 그때만 해도 반장 역할이 컸던 듯).
그래도 모두가 H군을 좋아했어요. 덜렁거려도 선량하고 친절했거든요. 친구들이 부탁하면 수업까지 빼주는 재주도 있었으니. 더운 여름날 국어시간, 교실 들어가니 공부하기 싫어진 애들이 이구동성으로 H군한테 꼭 수업을 시켜보라고 난리예요. 의아했지만 “그래? 10분 시간 주면 되겠지?” 했어요. 헌데 H군 이야기는 10분, 20분을 넘겨 결국 45분을 다 채웠죠. 애들 눈이 H군 얼굴과 벽시계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그해 통틀어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가장 집중한 날일 거예요. 저도 이 녀석 재능에 놀랐어요. 와, 나보다 훨 낫네, 했죠.
그 시절 까불까불하던 소년이 이십대의 긴 여정을 다 통과하고 한결 차분해져서 제 앞에 앉아 있어요. 나름의 삶의 무게를 잘 견뎌왔죠. 변호사시험 끝나고 무궁화호 기차를 동대구에서 동해까지 타고 가서 두타산을 봤대요. 당일여행이라 가는데 5시간, 오는데 5시간, 하루 10시간 기차를 탔다고. 힘들지 않았냐니까 매일 그 정도 공부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해요. 오히려 공부 안 하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되니 너무 행복하더래요. 풍경도 자동으로 계속 바뀌어주고.
올해 졸업하고 다행히 바로 취업해 담달부터 서울서 일하게 됐대요. 방 구하는 일만 남았다고(월세가ㅠㅠ). 사회인으로 정신없이 일 배울 땐 학창시절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지요. 이 친구가 보고 싶으면 이제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할 때가 왔구나 했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 먼저 연락해야지, 헤어져 돌아오며 그 생각을 했어요.
사진은 H군의 담임이었던 그 옛날, 우리 반 녀석이 쓴 시. “무섭고 힘쎈 괴물, 포로수용소 같은 우리 반의 아침”에서 허걱… 그땐 어찌 그리 에너지가 넘쳤을까요. 사려 깊음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부끄러움만 한가득이지만 무모한 젊음이 있던 시절. 지금은 힘 다 빠졌고 그 청춘이 그냥 그리운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누군가는 피어나고 누군가는 시들어가는 시간. 꽃이 시듦을 한탄하기보단 고목처럼 든든해져야겠어요. H군의 새출발에 행운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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