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중에서 펌)
바흐는 1703년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처음 취직을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라는 대단한 오르간 연주자가 있었는데, 바흐는 그의 연주를 들으러 한달 휴가를 허락받고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약 500㎞나 되는 거리를 직접 걸어갔다가 온 일이 있었다. 바흐는 그 정도로 북스테후데의 광팬이었다. 바흐는 3개월 동안 무단결근을 하면서 뤼베크에서 4개월을 보냈다! 교회의 추기경단은 그런 바흐에게 경고를 내렸다. 추기경단은 이어 아른슈타트로 돌아온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이상한 화음을 사용하고 신기한 변주를 해서 청중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바흐는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었지만, 거장의 연주를 듣기 위해 왕복 1000㎞나 되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걸었을 정도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히고 음악을 탐구하는 데 목말라했던 청년이었다.
바흐는 그 후 1707년 뮐하우젠의 오르간 연주자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으며, 1708년 바이마르 궁정과 1717년 쾨텐 궁정의 음악 책임자로 일하면서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과 뒤따른 재혼,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으로 인하여 1723년 라이프치히로 이사를 하게 되고, 저명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 자리에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바흐의 지원서는 게오르크 텔레만과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등 여러 음악인에게 밀렸다. 텔레만과 그라우프너가 초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비로소 바흐가 뽑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성 토마스 교회 측에서는 “최고의 음악가들을 초청할 수가 없으니 그저 그런 음악가들로 만족해야 한다”라는, 지금 관점에서는 충격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때부터 생을 마감한 1750년까지 모두 27년을 이 교회에서 일했던 바흐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못된 상사들의 끊임없는 질책, 괴롭힘과 질투를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근무했다. 1730년에 일어난 성 토마스 교회 측과의 다툼으로 월급까지 깎이는 일을 당하자, 자신의 소꿉친구인 게오르게 에르트만에게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호소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바흐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300여곡이 넘는 칸타타를 작곡했지만, 살아생전에는 단 한곡만 출판됐다.
전문가들에게는 존경과 칭송을 받았던 바흐지만, 동갑의 헨델이나 세살 어린 비발디처럼 당대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바흐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오페라나 굉장한 기교와 친근한 멜로디로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하는 음악을 하지 않았으며, 학구적인 음악과 교회음악을 추구했다. 어떤 음악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절대적 전설이 된 바흐의 음악이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대중성도 없었고,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https://m.hani.co.kr/arti/culture/music/1031723.html?fbclid=IwAR2My0wSgStfzyzZ5ljMKL94YRh8eoseFPu5ere__yjfQF58m5nMe4p2CMQ#ace04ou
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펌) 바흐가 그저 그런 음악가란 평을 들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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