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와 광주, 넘 멀어서 식구랑 각자 자기 부모를 챙기기로 한 어버이날. 오늘 모친이 바쁘다고 하셔서 어제 뵙고 왔어요. 오늘은 어디에 하모니카 봉사 가고 종일 스케줄 있으니 찾지 말라고.
귀찮아서 아침 거르려다가 배고파 샐러드 재료를 북북 씻다가 문득 생각. 전 결혼을 늦게 해서 40년 가까이 엄마밥을 먹었는데요. 그 밥의 존귀함을 넘 오랫동안 당연시했어요.
칠팔 년 전인가, 시내버스에서 우연히 고3 때 같은 반 친구와 딱 마주친 적이 있어요. 신기하게 보자마자 서로 얼굴을 알아봤어요. 와, 진짜 반갑다 하며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 하는 말이,, 저를 보니까 옛날 도시락 생각이 난다고... 당사자인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제가 원래도 입이 짧고 뭔 놈의 학교가 6시 50분까지 등교라 고3 때 아침밥이 안 넘어갔어요. 그래서 모친께서 점심 한 끼라도 잘 넘기라고 매일 점심시간 직전에 도시락을 가져다줬어요. 그것도 어디 소풍 가는 것처럼 큼직한 3층 원형 찬합에 가득 싸서. 뚜껑 열면 따뜻한 밥 연기가 모락모락... 반찬도 4명은 먹을 분량. 버스서 만난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그때 오늘은 비아 어머니가 또 뭘 싸주시나 기대하며 학교 왔었다고... 저는 피곤에 쩔어 아무 생각 없었는데. 당시 야자로 유명한 D여고는 6시 50분 등교, 밤 10시 하교라 제가 체력이 안 따라서 늘 허덕였거든요.
일 년을 날마다 도시락 배달을 해서 선생님들도 다 아셨어요. 복도 귀퉁이에서 맨날 도시락 들고 서 계셨으니. 학년부장이던 영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랬어요. 당시만 해도 딸들은 아들보다 입시에 관심이 덜했나봐요. 딸한테도 저렇게 부모님들이 관심 좀 가져야 한다고.
우리 모친의 사랑 표현 방식이 밥이었어요. 밥 안 먹는다 그러면 불같이 화를 내고. 거의 목숨 걸고 전투적으로 먹이셨어요. 공부에 대해선 가르쳐줄 수 없었기에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애정이 밥인 듯이.
그런데 그 도시락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니... 친구 만나고 돌아오면서 제 기억력이 어찌 이리 한심한가, 자책했지요. 100퍼 이과형인 모친과 저는 성격이 정반대라 잘 안 맞아서 티격태격한 적도 많았는데.. 그동안 엄마밥 먹은 것만 해도 부모 공덕이 하늘에 닿았다면서.. 그날 몹시 자책했어요.
어릴 때 모친께서 또 하나 전투적으로 챙긴 것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였어요. 당신께서 어릴 때 착하게 살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주신다는 걸 믿고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한 번도 선물을 못 받아서 어릴 때 너무너무 서러웠다고. 그래서 어른 돼서 꼭 챙겼다고 나중에 저희 다 커서 말씀하신 적 있어요. 저는 초등 4학년까지 산타를 굳게 믿었어요. 친구들한테 "야, 너네 엄마가 주는 거다, 이 바보야." 소리 들으면서.
그 믿음이 와르르 깨진 건 5학년 때예요. 학교 근처 문구점을 지나가는데, 문구점 아저씨가 "어제 엄마가 인형 침대 사갔는데, 잘 받았제?" 바보 소리 들을 만했죠.
저는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 두 분 다 전쟁통에 태어나서 여러 형제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사랑 못 받고 크신 분들이에요. 그래도 내 새끼라고, 자녀에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죠. 반면에 참 많은 사랑을 받고서도 자기밖에 모르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주는 것은 주는 걸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받는 법을 모르고 주기만 하셨던 두 분. 두 분 모두 계실 땐 그게 얼마나 튼튼한 세상의 울타리인 줄 모르다가 아빠 갑자기 돌아가시고 한동안 어버이날이 세상 슬픈 날이 됐어요. 7년째인 올해는 드디어 안 우는구나, 했는데, 이 생각 저 생각에 빵 먹다가 결국 눈물 뚝뚝.. 아빠 떠나신 후 엄마는 하모니카를 배우셨어요. 힘든 시기에 음악이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고, 이 시간 봉사 간 데서 하모니카를 불고 계실 거예요(사진은 작년 텃밭). 아빠 몫까지 20년만 더 사시면 좋겠습니다.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버질)
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엄마의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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