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매우 잘 쓴 책이다. 이 정도면 명저라고 할 만하다. 450쪽이 넘는 책을 술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사상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넘 좋아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그들의 불온한 사상 덕분에 우리는 중세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가 그들의 빛나는 이상과 고귀한 신념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은 바로 그 루소와 몽테스키외로부터 시작하여 법의 정신에 영향을 준 열 다섯 명의 사상가들을 다룬다. 한 명 한 명 두께가 만만치 않은 사상가들인데, 저자는 그들의 사상을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맥락과 개인적 생애사를 통해 쉽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뿐 아니라 풍부한 인용을 통해서 그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본질도 놓치지 않는다. 간간이 등장하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그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읽히게 만든다. 개론서로서는 정말 좋은 책이다.
밑바닥 출신인 루소와 부유한 귀족이었던 몽테스키외 편은 원래 좋아하는 사상가들이라 흥미롭게 읽었고, '악법도 법이다'란 주장의 근거 없음을 조목조목 밝힌 소크라테스 편도 읽을 만했으며, 개인적으로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가 담고 있는 사상도 매우 감명 깊었다. 반역자인 오빠를 장사지내지 말라는 왕의 법, 인간의 법을 물리치고 '신의 법'을 택한 안티고네 이야기는, 기원전에 이렇게 깊이 있는 사상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 문화의 수준을 짐작케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조 브라운을 위한 청원> 편은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이라 눈여겨보았다. 지금 미국 전역엔 조 브라운 도서관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조 브라운은 무력/폭력으로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하여 1859년 미국에서 반역죄로 사형당한 첫 번째 인물이다. 소로는 비폭력 시민불복종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또한 '혁명권'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것은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극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 거기에 충성하길 거부하고 저항하는 권리다."
밀의 '자유론'은 아직 읽지 못한 책인데, 그가 주장한 자유가 세 가지 영역이라니, 신선했다. 첫째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의견과 감각의 자유 등 '의식의 내면적 영역'에 관한 자유다. 둘째는 생활을 스스로 계획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들에게 방해받지 않을 '취향과 탐구의 자유'이고 셋째는 역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떤 목적을 위해 단결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자유 하면 내면적 영역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행동할 자유와 단결할 자유가 없다면 이 자유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저자가 예로 드는 한국사회의 여러 단면들도 생각할 점이 많았다. 2000년대 총선시민연대가 국회의원의 재산, 전과 등을 공개한 것이 불법이어서 기소되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당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지금 당연한 것이 그때는 불법이었다니. 1988년 지강헌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 556만원을 훔쳐 17년형을 받은 지강헌이,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52억을 횡령해 7년형을 받은 것을 보고 탈옥했다가 경찰과 대치 끝에 사망한 사건.
책장을 덮으며 한 인간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사상'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불온한 사상이 담긴 책들을 불태워왔다. 인류사에서 책이 넘넘 소중한 이유도 바로 책이 전하는 사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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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곧 인간으로서의 자격과 인간으로서 갖는 권리, 심지어는 자신의 의무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누가 됐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에게는 아무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다. - 루소
민주 정체에서 인민은 어떤 면에서는 군주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민이기도 하다. 인민은 자신의 의지의 표현인 투표에 의해서만 군주가 될 수 있다. -몽테스키외
만약 내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 자신의 군주, 자신의 조국, 자신의 법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고, 또한 자신이 속한 나라나 정부, 각자 맡고 있는 직위 속에서 행복을 보다 잘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스스로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몽테스키외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종잇조각 하나가 아니라 당신의 모든 역량을 던져라. 소수가 다수에게 고개를 숙일 때 가장 무력하다. 그렇지만 혼신을 다해 막을 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 소로
미국에서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어떤 정부와도 대등하게 맞서는 한 인간으로 규정하며 그토록 끈질기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미국인입니다. - 소로
인간성을 위협하는 위험은 개인적 충동과 선호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에 있다. 진보의 원칙은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하나의 인민은 일정 기간 진보적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정지한다. 언제 정지하는가? 그것은 개성을 갖지 못할 때다. - 밀 p.295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울프피쉬 호리'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서 키우면 1센티까지 자라는데, 연못에서 키우면 5센티미터, 강에 있으면 15센티미터, 바다에 있으면 50~60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국가와 사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틀입니다. 이 틀이 우리의 사고를 속박하도록 짜여 있다면 우리는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그 틀이 짜여 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p296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헌법과 국가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의 빈민은 행복하고, 그들에게 무지와 불행이 없으며, 감옥에는 죄수가 없고, 거리에는 거지가 없으며, 노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세금이 과중하지 않으며, 우리는 세계의 행복과 친구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세계가 우리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렇다. -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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