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진짜 숲에 들어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전거로 20분을 달려온 L은 덕원고 옆 개울 앞에서 멈춰섰다. 욱수골에서 발원해 아파트 사이를 가로질러 금호강으로 흘러가는 욱수천이다. 전날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져서 물소리가 세찼다. 개울 양편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졌다. L은 개울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징검다리를 건너서 덕원고 뒤편에 있는 비탈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은 쾌청했고 오후의 그늘이 산에 드리워져 있었다. L의 눈동자에도 하얀 모니터 화면 대신에 산이 걸렸다. ‘눈이 다 시원하네.’
숲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가자 L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후각을 온통 사로잡는 흙 냄새였다. 그 냄새가 너무 강렬해서 L은 깜짝 놀랐다. 그냥 흙 냄새가 아니었다. 전날 내린 비로 습기를 흠뻑 머금은 흙 냄새… 비 냄새와 풀 냄새가 잔뜩 섞여 있는 흙 냄새. 흙의 향기가 이렇게 황홀하고 경탄스러울 줄은 몰랐다. '어떤 꽃 향기보다 더 감미롭잖아.' L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냄새가 바로 지구의 냄새일 거야. 어머니 지구의 냄새…
L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습기 머금은 땅은 먼지가 날리지 않아서 걷기에도 좋았다. 한 발 한 발 흙의 감촉을 느끼며 편안한 속도로 걸었다. 땅을 밟음이 그저 감사하고 편안한 순간이었다. L이 신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영적으로 가장 충만하다고 느끼는 건 이런 순간이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존재의 느낌이라고 L은 생각했다. 어제와 내일에 대한 잡생각 없이 그저 지금에 몰입하게 되는 순간. L이 그런 상태에 가장 근접할 때는 자연을 걸을 때였다. 숲에 오니 세계가 다시금 향기를 머금고 다가왔다.
늦은 오후, 여러 종의 풀벌레 소리가 조화롭게 섞이면서 잔잔하게 귓전을 울렸다. 멀리 고속도로 소음이 들려오긴 했지만 방해가 되진 않았다. 수풀 사이로 햇살이 조명처럼 한 줄기씩 숲에 비쳐 들어왔다. 햇살은 뜨겁지 않고 그늘은 시원했다. 길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숲 너머 하늘은 환했다. 그늘과 햇살의 대비가 신선했고 한편으로는 아늑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는 숲은 아직 푸르렀고 억새가 곧 모습을 드러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까마귀 몇 마리가 왔다갔다 했다. 밤송이도 보였다. 굵은 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져 길섶에 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있네' L은 다시금 중얼거렸다. 숲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었다. 완전한 공간이었다.
그 완전한 공간을 온전히 채우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L은 느꼈다. 숲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은 이름이 없지만 반짝반짝 살아있었다. 나무에겐 나무의 삶이 있었고 풀벌레에겐 풀벌레의 삶이 있었다. 그 모든 삶들이 여기에서 겹쳐지고 포개지면서 자연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 유기체로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넘어서는 무한의 풍료로움과 신비가 있었다. 아무 것도 막막하지 않았고 그저 경이로웠다. 자연에겐 후회도 절망도 비탄도 체념도 없다. 생명의 속삭임만이 존재한다. 인간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이 그곳에 흘러넘쳤다.
한 시간 반을 걷고 돌아오는 길, L은 삶이 주는 최상의 선물은 모두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비 냄새가 섞인 흙 냄새, 풀벌레 소리,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녹색, 크고 작은 나무들의 행렬, 폭신한 땅의 촉감, 연푸른 하늘빛, 먼 산의 실루엣, 숲에 드리워진 감미로운 그늘,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기분 좋은 햇살...
거미줄에는 죽은 곤충이 걸려 있었다. L은 그 광경을 무심히 보아 넘겼다. 문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L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우리 생명의 불씨가 꺼졌을 때 우리가 돌아가는 곳도 캄캄한 우주가 아니라 이 푸르름 속이라면?' 평소 죽음에 대해 갖고 있던 공포가 조금 사위어지는 듯했다. 죽음이 더 큰 생명 속으로의 귀환이라면 그대로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L은 산을 내려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산을 비추고 있었다. 개울 물소리가 들렸다. L을 집으로 데려다줄 자전거가 저 앞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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