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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논산 씨튼 영성의 집

by 릴라~ 2024. 11. 20.

1. 

한 번 다녀가라는 친구의 초대에 신청했던 일박이일 개인 피정. 동대구역에서 오송역, 오송역에서 공주역 도착. 역사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 서울서 보고 근 일년 만. 20여 분 차를 달려 공주와 논산의 경계를 살짝 넘어간 곳에 씨튼 영성의 집이 있었다.  계룡산 자락이 환히 보이지만 산과 거리가 있어 햇살이 아늑하게 스며드는 자리, 지금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온한 공간으로 가꾸어져 있지만 주변에 워낙 굿당이 많아 처음엔 좀 심란했다고 한다.

 

계룡산이 무속의 본산인 줄 이제 알았다. 수녀원 주변에 단군성전을 비롯 굿당 간판이 여럿 보였고, 바로 근처에 신원사가 있는데 신원사는 우리나라 유일의 국가 산신각이 있다 한다. 조선시대 국가 산신각은 북쪽(북악)에 묘향산, 중앙(중악)에 계룡산, 남쪽(남악)에 지리산 세 곳이 있었는데, 현재 계룡산만 남았단다. 그래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2. 

배정 받은 방에 딱 도착했을 때 신기하게도 그 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다. 그만큼 평화로운 공간이었다는 의미다. 여기는 작은 천국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가꾸어온 천국. 신이 있다면 그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신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3. 

어쩌면 나는 이 문제를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할 지도 몰라.

 

가을 햇살 아래 계룡산의 능선과 가을빛으로 물든 대지를 보며 난 그렇게 생각했다. 이토록 안온하고 커다란 평화가 있는 곳, 신의 현존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공동체 속에서... 이곳의 아름다움이 내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곳에서 관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슬픔이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슬픔이 조금도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슬픔은 말수가 확 줄었고, 내 마음의 방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슬픔이 떠들지 않으니 그걸 바라볼 힘이 생긴 것이다. 슬픔을 조용하게 만든 것이 이곳의 힘이었다. 

 

5. 

저녁식사, 아름다움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닌, 이곳을 가꾸는 손길의 아름다움이었다. 어느 한 구석도 매만진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래서 어디 있든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모든 곳에서 위로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 

 

밥상도 그러했다. 어떤 슬픔도 잠시 가라앉혀 주는 밥상,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겠구나 했다. 밥을 먹으며 나눔과 환대를 생각했다. 공동체의 환영은 인생의 버팀목이구나, 사람의 역할이 거기 있었다. 

 

6.

무력감과 절망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아직 그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겪은 죽음은 폭력이었다. 비록 자연의 폭력이라 하더라도. 단 6개월 사이에 70세에서 90세로 보일 만큼 병이 진행되어 떠난 아빠. 그건 엄청난 폭력이었다. 

 

성모님은 아들에게 닥친 폭력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울었을까, 분노했을까, 슬픔에 미쳐버렸을까, 받아들였을까...

 

7.

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신을 닮아간다. 사랑 없이 가까워질 수 없다. 나와 신과의 사이에 놓인 이 거리와 어두운 심연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서 비롯된다. 생을 축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므로.

 

일박이일은 금세 갔다. 가을의 끝자락을 달리는 대지의 끝없는 아름다움과 치유의 집을 가꾸는 인간의 고귀한 손길과 풀리지 않는 나의 많은 의문들이 함께 흘러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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