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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자비를 팔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

by 릴라~ 2009. 3. 12.


진실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 우리의 직관을 따를까, 아니면 이성적 판단을 따를까. 가장 좋은 것은 직관이 주는 느낌의 정체를 파헤쳐서 이성적 추론을 처음부터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지 싶다.

 

마더 데레사를 비판한 히친스의 책을 읽었다. 번역이 좀 어색한 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문장력과 표현력에 찬사를 금할 수 없다. 그는 데레사 수녀를 살아있는 성녀가 아니라 다국적 수도회의 수장으로, 보수 기독교 이념의 전파자로, 신비주의적 이념으로 세상의 고통을 미화하는 광신도로, 세속 권력의 하수인으로 평가 절하한다.

 

그가 증거로 제시하는 논거들은 타당하고, 내가 논박하기 어렵다. 마더 데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 엄청난 기부금을 받고 있지만 그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기부금이 인도의 민중들에게 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 뿐이다.

 

마더 데레사는 사랑의 선교회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한 사기꾼 로저가 그녀의 명성을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아이티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독재 정권을 옹호했고, 세속 권력자들에게 깊은 호의를 보였다(조국 알바니아의 무자비한 살인마에게도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단체를 운영할 때는 극단적인 소박함을 추구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도시에서 수용시설을 건립할 때 마더는 엘리베이터 설치를 거부했고 시에서 이를 허용하지 않자 설립을 포기했다. 엘리베이터 비용을 시에서 부담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녀가 병이 들었을 때는 서구의 값비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또한 그녀는 낙태와 피임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가난과 고통을 숭상했으며, 테러로 피해를 입은 현장을 방문해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촉구했다. 물론 용서는 아름다운 가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난 이후에 가능한 일이며, 당장 말 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할 만한 언사는 아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내가 처음 접하는 사실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마더 데레사는 책과 영화를 통해서 본 것(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ㅠㅠ), 그리고 마더 데레사 사후에 방문한 꼴까따의 마더 하우스이다(여기서는 적지 않은 의문을 가졌으나 더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다).

내가 본 책과 영화는 무시하고, 내 경험부터 다시 살펴보자. 2001년 1월 꼴까따의 마더 하우스. 인도 여행 중에 일주일 봉사하려고 들렀다가 우리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해서 사나흘 머물고 떠났던 곳. 네 군데 봉사의 집 중에서 우리가 들른 곳은 두 곳. 임종자의 집 칼리가트와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집 다야단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불과 몇 십명 정도.

 

임종자의 집에 머문 사람들은 인간적인 보살핌을 받았던가. 매트리스도 아니고 아주 얇은 쿠션이 들어간 비닐 시트가 바닥에 죽 늘어서 있고, 매일 그 시트를 하얀 소독약으로 닦고 있었다(매우 독해 보이는). 마치 수용소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아니었다. 모든 봉사는 해외 각지에서 온 봉사자들이 맡고 있었다. 인도인 봉사자도 물론 거의 없었다.

 

몇 달째 장기 봉사를 하고 있는 한 서양인 여성이 봉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나와 내 친구에게 얼마나 오래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서양인 봉사자들이 쉬운 일만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동양인 봉사자를 더 반가워했다. 서양애들은 걸레질 같은 걸 잘 못한다). 우리가 곧 여행을 떠날 거라니까 매우 섭섭해 했었다.

 

똥오줌이 묻은 빨래를 다른 사람들이 맡기를 꺼려해서 결국 나와 친구가 그것을 한 적이 있는데, 마더 데레사는 생전에 세탁기를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손으로 일일이 빨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때는 인도의 여건이 워낙 열악해서 그런가 했는데, 이 책의 다른 사실들을 읽으니 좀 다르게 다가온다. 히친스는 ‘마구잡이식 날림시설’을 운영했다고 비판한다.

 

서양의 조직화된 사회복지시설을 예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느 나라건 대규모 수용 시설굉장히 큰 문제를 지니고 있다. 나는 마더가 그런 것을 비판하면서 인간적인 ‘작은’ 시설, 인간적인 ‘보살핌’이 있는 시설을 추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마더 데레사의 방식은 지나치게 금욕적이고 원시적이다.

 

임종자의 집을 둘러본 폭스 박사는 마더 하우스가 재해 지역의 어떤 임시 진료소보다도 못한 처방을 하더라고, 의자도 정원도 없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지도 않더라고 증한다. 임종자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호스피스 활동과는 전혀 다르다고. 저자는 임종자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서구인들의 동정과 자기 만족의 대상이라고 비판한다.

 

내가 갔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인도 여성은 마더 하우스에서 먹는 한 끼가 전부라고 했다. 그녀에게 세 끼를 다 줄 수는 없었을까. 봉사자들에게는 간식도 주면서. 물론 비스킷 몇 조각이긴 하지만.

 

인도에서 돌아와서 아는 신부님께 마더 하우스의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고, 기부금은 다 어디로 쓰는지 모르겠다고 여쭤본 적이 있다. 신부님께선 거기 이름만 났지 돈 별로 없다고, 그렇게 시설을 확장하지 않고 영성을 살리는 것이 맞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책의 자료를 보니, 마더 데레사는 엄청난 기부금을 받고 있다.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수천명의 수도자들과 수만명의 봉사자들이 있는 대규모 단체다. 로제 수사의 떼제 공동체 수사들이 백명을 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이 로제 수사님도 꼴까따에 들렀고 마더 데레사와 함께 얼마간 지냈고 함께 책도 썼는데, 그 분은 그 때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셨을까.)

 

마더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예수님이 겪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프랑스의 삐에르 신부는 마더가 결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고통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그분의 지적이 옳다고 본다.

 

반면에 ‘내 친구들에게 인사하실래요’, ‘오후 네 시의 평화’ 등에서 마더하우스에서의 경험을 아름답게 묘사한 조병준씨도 있다. 그곳에 오래 머문 이들은 그곳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인간 관계를 맺었을 것이고 그래서 다른 경험을 했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꼴까따 시장에서 만난 한 인도인은 마더 데레사가 너무나 훌륭한 여자라고, 인도의 가난한 이들을 정말 좋아한 여자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목마른 사람들'은 어떤가. 시티 오브 조이의 원작 소설인 그 책은 작가가 꼴까따 빈민촌과 마더 하우스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성인인가, 선교 사업체의 수장인가. 안타깝게도 내 답은 후자로 기운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부금의 사용이 투명하지 못한 것, 환자를 치료하는 시설이 아니라 환자를 죽게 내버려두는 시설들을 각지에 짓는 데 그 돈을 쓰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데레사 수녀는 분명 옳지 못하다.

 

그녀는 죽음을 전시했고 그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녀의 영성에는(이는 내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고통에 대한 숭배가 엿보인다. 그녀에게는 가난과 고통을 숭상하는 신흥 종교의 함의가 있다. 고통과 병고에 대한 숭상, 그것은 일종의 ‘사의 예찬’이다. 죽음에 대한 우상 숭배. 그것을 통한 초월. 감히 신의 뜻을 말한다면, 신이 바라는 것은 그 반대가 아닐까.

 

나는 이 세상에 성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 사이에서보다는 이름 없는 이들 사이에서 더 많이 발견될 것 같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보내고 남몰래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어느 수녀님처럼.


*덧붙임 : 저자는 한국과 인연이 있다. 잡지 기고문에서 "그(김대중)가 남다른 것은 그의 온건
고 민주주의적인 정견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미국에서의 개인적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자
신의
원칙들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레이건 행정부에서 막연한 보장밖에 안
했는데
도 김씨는 귀국하여 자신의 자리에 섰다." 다른 책에서 "김대중 씨가 서울의 공항에서 다
시 붙잡
혀 가던 순간에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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