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해외여행 이야기/인도, 네팔

[네팔] 베이스캠프에서, 산 그리고 나 - Annapurna Sanctuary 11

by 릴라~ 2008. 4. 20.

오후 내내 눈보라 속에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 끝에 저물녘, 우리는 드디어 ABC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다섯째 날이 되는 저녁이었다. 그런데 나를 감격케 한 것은, 도착했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저녁 식사 메뉴였다.

롯지의 네팔 청년이 웃으면서 '비빔밥'이 있다고 했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비빔밥이 있었다. 포카라에서 듣기를 봄은 유럽 시즌이고 겨울은 한국 시즌이란다. (최성수기는 가을이다.) 겨울에 네팔을 찾는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한국인이라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휴대용 즉석 비빔밥이 있었던 것. 지리산의 세석이나 장터목 대피소에서도 판매하는 것이지만 맛 없다고 한 번도 사먹은 적이 없는데, ABC에서 먹는 비빔밥과 된장 국물은 정말 구세주였다. 입맛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게 아니었더라면 저녁을 먹지 못했으리라.

식사 후에 청년 한 명은 고소 때문에 먹은 것을 다 토하면서 힘들어했다. 대학생 몇 명은 머리만 살짝 띵할 뿐 괜찮다고 했다. 이들은 식당의 그 흐릿한 불빛 아래서 즐겁게 독서를 하고 있었다. 황석영의 신간 '바리데기'도 보인다. 이처럼 씩씩한 청년들을 보니, 한국의 장래가 밝아 보였다. (여행 떠나기 전, 이명박 및 인수위의 삽질로 인해, 우리 나라의 미래에 대해 우울해했기 때문에...)

내게는 두통이 찾아왔다. 약한 두통이었지만 쉴새 없이 쿵쿵, 그것도 밤새도록 울려대는 바람에 아주 고통스러웠다. 배낭에서 짐을 꺼내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펄떡펄떡 뛴다. 잠시 움직일 때마다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밤, 나는 가슴 두근거림과 두통 때문에 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 4~5시 쯤 되었을까.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마차푸차레와 주변 산들의 경관 앞에 홀린 듯 멈춰서고 말았다. 슬리핑백 속에서 내내 참다가 도저히 안 되어 몸을 일으켜 나왔던 것인데 덕택에 베이스캠프의 가장 숭고한 광경과 만나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 끝없는 정적 속에서, 하얗게 살아 있는 설산 봉우리들이 내뿜는 희고 차가운 입김은 그 무엇과의 비교도 거부했다. 차가운 달 표면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광막한 우주 속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별과 달, 하얀 산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세상 밖 풍경이었다. 잠시 후에 사라질 어떤 것이 아니라, 허상 너머 어떤 절대의 세계! 그곳에는 오직, 산과 나만 있었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너무 추워서 잠시 서 있기도 힘든 판국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날이 밝고 나서야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사진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지만, 한밤에 본 그 거대한 침묵은 이미 물러가고 없었다. 내 눈과 마음 속에 그들을 영원히 담아가는 수밖에.....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