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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schooling

교육 시론 _ 내부로의 망명 혹은 낙오자 되기 / 김상봉

by 릴라~ 2010. 9. 15.
 

제1장 교육과 서로주체성

 

 1. 교육은 인간성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라는 것.

 한국교육이 이미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실상을 공정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학교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학교가 아니며 교육이 더는 참된 의미의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학교와 교육은 한국에서는 존재이유를 상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직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고 있지만 학부모들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학교 아닌 학교와 교육 아닌 교육이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은 때가 되면 소멸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필연적 법칙이다. 한국의 학교 역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현실적으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학교는 누구도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 곳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학교가 싫다 해서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대다수 학생과 학부모들이 학교를 적극적으로 기피하는 것이 현실로 닥쳐오면 사람들은 비로소 과연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준비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이 본래적 진리로부터 멀어졌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본래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먼저 교육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이란 우리 앞에 감성적으로 주어진 사물적 대상은 아니라 우리가 오직 생각 속에서만 표상할 수 있는 활동의 총체이다. 그런 까닭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육이 무엇인가의 규정은 교육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이념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양육만이 아니라 동시에 교육을 필요로 한다. 다른 생명체들은 태어나 영양을 공급받고 특별한 질병이 없이 성장하기만 하면 그가 속한 생물종의 본래적 기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그는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 하더라도 만약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다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교육이 없다면 다른 무엇보다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며, 교육이 없이는 다른 모든 지적인 능력은 물론 정서적, 의지적 소질 역시 계발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이 외모만 인간일 뿐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적 소질을 전혀 계발하지 않은 상태에 머문다면, 그를 가리켜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성이란 인간적인 활동에 존립하는 것이지만, 그 활동의 능력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발하고 도야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렇게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오로지 가능성 속의 인간을 현실적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활동이다. 이처럼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자기가 되고, 교육을 통해 인간성이 실현되는 한에서, 우리는 교육을 가리켜 인간성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처음부터 고정된 존재가 아니어서 어떤 일정한 한계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인간이 된다 하더라도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교육을 통한 자기실현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나는데, 한편에서 인간은 교육을 통해 보편적 인간성을 도야하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 개성적 인격을 실현하게 된다. 앞의 경우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추어야 할 지성과 의지와 정서의 보편적 바탕을 함양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이며, 뒤의 경우에는 개인의 개성적인 소질을 계발하고 자기 고유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가 된다.

두 경우 모두 교육이 좋으면 그에 따른 자기실현도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것이며 반대의 경우라면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요컨대 보편적인 인간성에 있어서나 개성적인 인격에 있어서 모두 좋은 교육은 좋은 사람을 낳고 나쁜 교육은 나쁜 사람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이상적인 교육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인간의 온전한 자기실현을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2. 누구도 자기가 자기를 교육할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은 교육을 통해 자기가 된다. 인간은 자연의 피조물인 만큼 교육의 피조물이다. 신이 인간을 가능성으로 세계에 보내면 인간은 교육을 통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은 인간이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활동이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한 근원적 자유와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가 자기를 교육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성 속에 내재한 근원적 한계이다. 인류를 전체로서 보자면 인간이 인간을 교육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기를 교육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자유로이 자기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들 각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 의해 교육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의 손에 이끌려 인간이 되고 자기가 된다. 이처럼 인간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에 속하는 서로주체성이다.

 

3.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만남은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인간성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활동에 존립한다. 활동은 능동성의 표현이요 실현이다. 그런 한에서 인간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능동성을 실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에는 수동적인 주체로 세상에 온다. 인간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아무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행위할 수 없는 욕구의 덩어리일 뿐이다. 교육을 받고 많은 것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온전한 인간의 형상에 다가가게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능력은 오랜 교육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얻어지는 소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은 수동성으로부터 능동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나 속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너와의 만남 속에서 일어난다.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만남은 모든 면에서 동등한 만남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아직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주체와 능동적인 주체의 만남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주도적 학습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교사에 대한 학생의 근원적인 의존성을 부정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너가 먼저 될 때 그 속에서 내가 된다. 타인의 부름에 대답함으로써 자기가 되는 것이다. 교사는 그렇게 학생을 부름으로써 그를 자기로 세우는 자이다.

이처럼 교육이 상대적으로 더 수동적이고 더 능동적인 두 주체의 만남으로 일어난다는 사태를 가리켜 우리는 교육적 만남의 비대칭성이라 부를 수 있다. 교육의 숭고함과 위험이 모두 이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 교육자는 피교육자의 (가능적)주체성을 위임받고 있으며, 피교육자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그 위임받은 주체성을 통해 대신 결정해야 한다.

학교와 시장의 차이 역시 이 비대칭성으로부터 설명된다. 시장에서의 만남은 대등한 경제주체들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만남은 언제나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시장에서의 만남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아니라 단지 화폐를 통한 상품의 교환일 뿐이다. 이처럼 학교와 시장에서의 인간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른 까닭에, 학교를 시장화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을 거스르는 처사로서, 필연적으로 교육의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4. 교육적 만남의 비대칭성으로부터 교육이 도구화될 위험이 생겨난다는 것.


   인간은 너를 통해 내가 된다. 이것이 인간의 서로주체성이다. 내 편에서 보자면 교사는 내가 그를 통해 참된 내가 되는 그런 너이다. 그러나 이 비대칭성 속에 교육의 본질적 위험도 놓여 있다. 즉 교육의 내용과 형식이 교육자에 의해 대부분 규정된다는 것은 교육이 교육자에 의해 도구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은 교육의 악의적인 도구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통해 우리들 각자는 온전한 인간이 되지만, 어떤 인간이 될 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교육자이다. 이를 통해 교육자는 타인(피교육자)의 삶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자가 학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남의 삶을 자기 뜻에 따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월권을 행사할 위험을 안고 있다.

 

5. 자유와 주체성의 능력의 계발이 교육의 첫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


   교육의 본질 속에 놓인 비대칭성 가운데서 가장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비대칭성은 교육의 목표를 피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자가 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이는 피교육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교육자가 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을 어떤 사람으로 기를 것인가?―교육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교육은 본질적 딜레마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에서 피교육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피교육자의 주체성의 침해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교육은 사람됨의 과정인 까닭에 우리는 교육을 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학생이 어떤 사람이 되도록 작용을 행사하게 되고 또 행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학생의 주체성을 침해하거나 그의 삶에 월권을 행사하지도 않으면서 그가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하도록 하기 위해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소극적인 원칙을 밝힐 필요가 있다. 교육을 통해 우리 모두는 어떤 사람이 된다. 그런데 교육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미리 규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월권이다. 우리는 학생(또는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해 나가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인간의 자유 또는 같은 말이지만 주체성이라 부르는데, 교육이 피교육자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자유와 주체성을 근본에서 침해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은 내 속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능력들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에 속하는 능력으로서 힘들여 도야되고 계발될 때에만 온전히 발휘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수동적인 의존상태나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남에게서 자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실현하도록 하려면, 자유의 능력 자체가 잠재성의 상태에서 현실성의 상태로 계발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목적은 자유의 능력 또는 같은 말이지만 주체성의 능력의 도야에 있다. 자유와 주체성은 인간의 자기실현과 자기형성의 능력에 존립한다. 교육은 학생이 스스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확장시켜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본질에 내재한 비대칭성은 학생의 주체성과 자유의 신장을 위해 작용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사가 학생으로부터 위임받은 주체성을 대신 행사할 때, 이를 통해 학생의 주체성이 확장되는 한에서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반대로 교사가 학생에 대한 비대칭적 우월성을 학생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사용할 때, 교육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위임받은 주체성과 그 한계)

한국교육이 그 본래성을 상실하는 지점이 여기이다. 이 땅에서 학생들은 교육과정에서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억압받고 더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 공교육의 체제가 본질적으로는 전혀 변치 않고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유인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없다.

 

6. 자유는 만남에 있다는 것.―서로주체성의 이념.


   인간의 주체성은 자기를 반성적으로 의식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며, 자기가 누구여야 할지를 적극적으로 욕구하고, 이를 현실 삶 속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활동 곧, 자기의식과 자기형성의 활동에 존립한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형성할 때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며, 이 주인됨을 가리켜 우리는 자유라 부른다.

자유와 주체성은 그 자체로서는 자기가 자기를 형성한다는 뜻에서 자기관계에 존립한다. 그러나 자유도 주체성도 아무 조건 없이 발생하는 자기관계는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반성적으로 의식하기 위해서든 자기의 삶을 실천적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든 나는 언제나 타인과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나는 타인의 부름을 통해 자기를 의식하며, 타인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자기의 기쁨과 슬픔을 발견하고, 타인의 욕구 속에서 자기의 욕구를 확인한다. 그런 한에서 너와의 만남이 없다면 나 또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오직 너를 통해 내가 된다는 것,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서로주체성이라 부른다. 

이런 사정은 인간의 사회적 자기실현 및 자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나는 오직 사회 또는 나라의 주인이 될 때에만 나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 혼자서 나라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유인이 아니라 폭군의 삶이겠지만, 폭군의 의지는 자의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점에서 노예와 마찬가지로 부자유상태에 있다.) 나는 타인과 더불어 나라를 하는 한에서만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만남에 있으며, 자유의 능력은 만남의 능력에 존립한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교육하기를 원한다면, 이를 위해 우리는 학생에게서 만남의 능력을 키워주지 않으면 안 된다.

 

7. 교육의 진리는 참된 만남의 실현에 있다는 것.


   교육은 인간성의 자기실현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고립된 홀로주체의 자기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과정이다. 교육은 만남에서 시작되고 만남을 통해 지속되며 참된 만남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은 교육의 본질적 진리에 속한다. 교육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 가르침(敎)이나, 상기(anamnesis), 이끌어냄(educare) 또는 형성(Bildung) 등은 만남의 이념에 의해 다시 조정될 필요가 있다.

 

8. 만남의 총체성이 나라라는 것. 여기서 나라는 목적이요 이념이라는 것.

 

9. 일단 국가가 형성된 뒤에는 나라가 현실에서 교육의 기초가 된다는 것. 교육은 나라의 기초요 가장 중요한 나랏일이라는 것.

 

10. 나라가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즉 교육은 나라의 첫째가는 의무라는 것. 나라가 교육을 규정하는 첫번째 주체라는 것. 그러나 이것이 홀로주체성의 일방적 권리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공교육의 기초.

 

11. (교육이 사람됨의 과정인 한에서) 나라는 인간과 사회, 국가와 세계 그리고 역사와 자연에 대한 공유된 이해에 입각하여 교육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어떤 사람을 원하는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 교육의 근저에 놓여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

 

12. 나라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다시 나라를 만든다는 것. 교육은 곧 정치요, 정치가 교육이라는 것. 이 둘은 뗄 수 없다는 것.

 

 

제2장 한국 공교육의 근본악에 대하여

 

14. 한국의 근대적 공교육은 식민지 지배와 함께 기초가 놓였다는 것.


   이것이 이른바 선진국과 한국의 차이이다. 그 나라들은 주체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근대적 시민을 양성해야 할 필요에 따라 공교육제도를 확립했다. 요컨대 자율적 시민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근대적 공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율적인 근대화가 식민지 지배에 의해 단절되었고 교육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이후 한국 교육의 역사에 두고두고 해악을 끼치는 원죄가 되었다.

 

15. 공교육의 목적이 시민의 자기교육이 아니라 (황국)신민의 타율적 양성이었다는 것.


   근대적 공교육이 일제에 의해 도입되기는 하였으나, 교육의 껍데기만 근대적이었을 뿐, 그 목적과 내용에서 보자면 학교교육은 자율적인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 잘 듣는 식민지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식민지 시대 수신 교과서는 이런 목적을 잘 보여준다.

 

16. 해방된 뒤에도 한국 교육의 목적은 자유로운 시민적 주체의 양성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호명되는 양순한 객체의 양성일 뿐이었다는 것.


   해방 후 식민지 지배자들이 떠난 자리에 미국 군대가 새로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그 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 나라는 오랫동안 독재자들의 나라였다. 독재 권력은 시민적 자유를 지속적으로 억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해방 후에도 교육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아무런 자율성을 누리지 못하고 권위적 국가에 의해 호명되고 동원되는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은 이 나라에서 교육이 어떻게 전체주의적인 동원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는 않겠지만 학교가 국민교육헌장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미지수이다.

 

17. 처음부터 너무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교육이 지배적 권력의 도구가 된 결과 교육의 도구화가 자명한 사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는 교육계도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에서부터 교육은 직접 간접적으로 권력에 부역해왔지만 한 번도 그 역사가 엄중하게 비판받거나 청산된 적이 없다. 교육자에 대한 사회적 존경에 편승하여 교육계는 친일파 청산을 하지도 못했고, 독재권력의 잔재도 씻어내지 못했다. 그 결과 다른 어떤 곳보다 자유로워야 할 학교에서 억압과 굴종이 지배적 문화가 된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18.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은 자본이라는 것. 교육을 지배하는 권력도 마찬가지라는 것.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으로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에 자본은 더 이상 외부의 적을 갖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본은 스스로 왕관을 제 머리에 씌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국가기구 아래서 그 지배에 따르던 시늉을 하던 자본은 이제는 아무런 저어함 없이 국가기구를 지배하려 한다.

한국의 경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민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가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동구권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겹쳐 있다. 이른바 민주화의 과정에서 독재 권력이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새로운 지배자가 자본이었다.

교육을 지배하던 권력 역시 국가기구에서 자본으로 이동한다. 국가는 다만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공교육을 규정할 뿐이다. 교육 역시 이른바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원칙에 종속하게 된다.

물론 아무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하더라도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런 가치들이 사회의 타락과 결정적인 붕괴를 막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회이다. 그것이 불행을 더 가중시킨다.

 

19. 자본에 국경은 없지만 주인은 있다는 것.


    자본이 지배한다고 해서 말 그대로 돈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자본은 노동의 객관적 현실태인 만큼, 또한 욕망의 객관적 현실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없는 곳에 자본은 없으니, 자본이란 주체의 사물화되고 객관화된 활동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주체성이다. 

그러므로 주체 없는 자본은 없다. 쉽게 말해 자본에 국경은 없지만 반드시 주인은 있게 마련이다. 또는 자본은 거꾸로 자본가와 국가에 기생해서만 자기증식 운동을 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지배는 단순히 비인격적인 구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권력관계를 매개로 하여 현실화된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은 전지구적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자본에 국경이 없다는 것은 자본의 지배가 단순히 한 국가 내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수탈하듯이, 한 나라도 다른 나라를 착취하여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자본이 지배한다는 것은 동시에 미국이 지배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하여 교육 역시 미국화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이런 사정을 보다 근본에서 설명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고 할 때, 상품화는 존재의 형식을 규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의 전반적 시장화란 사회적 존재의 형식이 상품성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시장은 추상적인 화폐의 교환만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교환을 매개해 줄 언어도 필요하고, 소유권을 확립해 줄 법도 필요하며, 법의 강제성을 담보해 줄 물리적 힘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시장이 세계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결제수단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반드시 세계화된 언어와 각종 국제적 법과 조약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작동하는 군사력의 출현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 세 가지 헤게모니는 하나로 결합할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다.

 우리시대에 전 세계적인 언어와 법과 군사력을 하나로 묶어놓은 리바이어던이 미국이다. 따라서 교육이 시장화를 강요당한다는 것은 미국화를 강요당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0. 교육은 시장 질서에 동화될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


    교육은 일종의 서비스산업이 되었다. 학생은 수요자요, 학교는 사업자에 지나지 않는다. 교사는 백화점의 점원과 다를 것이 없다. 교육은 그저 무형의 서비스를 사고파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교육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공교육이라 해서 다를 것도 없다.

자본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자본주의적으로 재편하려 한다. 학교는 공공재가 아니라 사유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을 위해서는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기왕에도 사립학교는 공공재라고 부를 수 없는 사적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국공립 대학까지 이른바 법인화라는 이름으로 민영화하려는 것이 작금의 추세이다.

이른바 4.15 교육자율화조치로 학교에서 방과 후 학원 교습을 허용한 것도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에서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외형이 아니라 교육의 내용이 더 이상 공공성의 정신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 이것이 문제이다. 학원이든 학교든 교육이 상품교환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21. 상품을 매개로 한 만남은 만남이 아니라는 것.


    교육은 만남이다. 하지만 상품을 매개로 한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체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주체는 자본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하수인 또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미 있는 관계는 상품 교환 그리고 자본 증식일 뿐이다. 다른 모든 관계는 이것을 위한 것일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그들이 돈과 돈이 오가는 것을 매개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사람이 누구인가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사람은 돈의 탈것(vehiculum)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학교교육에까지 스며들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의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다만 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맺어지는 관계로 전락한다. 그런데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방침은 학교 교육 이런 자본주의적 관계 방식에 따라 재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2. 학교는 시장이 될 수 없다는 것.


   학교가 시장이 된다는 것은 학교가 지식이라는 무형의 상품을 사고파는 곳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는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인격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교수되는 교육내용은 향유되고 소비되는 대상으로서의 서비스 상품이 아니다. 학교에서 문제되는 것은 3인칭의 대상이 아니라 1인칭인 나 자신이다. 상품의 구매가 아니라 자기형성의 마당이 학교인 것이다.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시장화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 자체를 상품화하거나 도구화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에게 오직 한 가지 존재방식만이 허락된다. 팔릴 수 있는 (노동) 상품이 되는 것. 자본주의가 절대화된다는 것은 이 원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외 없이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 역시 이런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 않을 때 존재 이유를 인정받지 못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미래의 취직시장에서 보다 높은 가격에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교육이라는 상품을 구매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상품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24. 지배자가 누구든 한국의 공교육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구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있다는 것.


    식민지배자든, 독재자든, 자본이든, 지배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나타나든 그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지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배자들 아래서 교육은 인간을 지배하기에 적합한 노예적 인간으로 훈육하는 일을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한국교육의 불행의 뿌리이다.

 

 

제3장 학벌사회에 대하여

 

25. 교육이 무엇에 의해 도구화되든 한국 교육에서 그것의 현상형식은 하나라는 것. 그것이 학벌경쟁이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교육이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순응과 도구화의 정도와 방식은 사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한국에서는 교육의 도구화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유한 방식으로 일어나는데 그것이 학벌주의이다.

학벌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 없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도 그리고 자본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와서도 학벌경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처음보다 학벌경쟁이 더 격화되었고, 그 결과 학생들이 학교에 감금되어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으며 학부모들의 사교육비가 늘어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이처럼 학벌주의 교육이 누가 교육을 지배하고 통제하든 한결 같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주인이 누가 되든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26. 주체성과 이익을 교환하는 것이 학벌주의의 경제라는 것.


    학력이 개인의 속성이고, 학연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라면, 학벌은 그 자체로서 집단적 주체로서 사회적 실체(social entity)이다.1) 개인은 사회적인 실체로서 군림하는 학벌에 자신의 주체성을 양도하고 학벌의 속성으로 전락하는 대가로 이익을 얻는다. 학벌이라는 집단적 주체는 그것 이외에 다른 어떤 가치를 통해서도 결속되고 유지될 수 없다. 이처럼 학벌주의는 자유를 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 노예적 인생관의 표현인 동시에,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을 노예적 인간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학벌체제가 주인이 누가 되든 주인의 요구에 맞게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할 수 있는 까닭도 학벌주의가 사적 욕망의 추구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가치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학벌에는 영혼이 없다.

 

27. 학벌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유독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주체성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


    학벌주의의 작동원리는 철저히 사적인 이익의 추구이다. 학벌주의는 사회에 대한 관념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라에 대한 관념도 없다. 그런 것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 학벌주의의 특성이다.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온전한 의미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더라면 이런 반사회적인 가치관이 뿌리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과거에는 이소사대(以小事大)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을 정도로 주체성이 없었고, 근대 이후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사회성이나 공공성의 이념이 처음부터 자리잡기 어려웠던 나라이다. 보수 우익이라는 집단이 곧 매판 세력인 나라가 한국이다. 나아가 국가권력 자체가 기생권력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람직한 사회와 나라에 대한 이상이 없고 오직 개인의 출세와 성공에 대한 관심만 사회에 넘쳐나게 되는데 학벌주의는 바로 그런 토양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28. 학벌사회의 작동원리는 자기긍정이 아니라 타자의 부정이며, 자기실현이 아니라 타자와의 경쟁이라는 것.


    학벌체제는 보편적 적대관계에 기초한다. 학벌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 나와 너 사이의 공동의 이익은 없다. 나의 이익은 너의 손해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적대관계 속에서 참된 만남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남이 없는 곳에는 교육도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만남뿐만 아니라 학생 상호간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들을 무한경쟁 속에 가둠으로써 그들 모두를 지배한다. 모든 학생을 학벌경쟁 속에 밀어넣음으로써 이 사회의 지배자는 그들 모두를 가장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divide et impera!) 학벌체제는 한국의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을 탈정치화시키는 가장 훌륭한 장치이다. 이 경쟁의 장에서 사람들은 공공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시민적 주체가 아니라 오직 사적 욕망의 주체로서만 판단하고 행위하기 때문이다.

 

29. 보편적 적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쟁의 기준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보자면 그 기준은 돈이다. 돈은 서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고 결과적으로 경쟁할 수도 있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동일한 목표, 즉 돈을 위한 것이지만, 동일한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에서의 경쟁은 학교에서의 경쟁보다 차라리 덜 비극적이다.

하지만 학벌경쟁은 경쟁의 목표가 같을 뿐만 아니라 경쟁이 일어나는 활동까지 같다는 점에서 훨씬 더 비극적이다. 그 같은 활동이 바로 시험 공부이다. (과목 선택에서의 차이를 실질적인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학벌사회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할 뿐,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발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개성이란 주체성의 내용이다. 학벌경쟁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개성 없고 획일적이며 몰주체적인 인간을 기르게 된다.

 

30. 시험의 탁월함이 인간의 탁월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학벌경쟁은 시험경쟁을 통해 실행된다. 그리하여 학벌경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교육은 시험에 종속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시험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육이 파탄에 이른 까닭이 여기 있다.

시험 또는 평가는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에 속한다. 그러나 평가나 시험은 교육의 수단일 뿐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시험이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고 일렬로 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은 학벌경쟁 때문에 상대평가 시험이 실질적인 목적이 되어 있다. 이로써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다.

시험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지성적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한국의 학교에서 시행되는 객관식 시험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온전히 증명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 여기서 객관식 시험이란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찾는 시험을 말한다. 물론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있고 정신은 이 둘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한에서 객관식 평가는 교육과정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일에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신이 일방적으로 정답 찾기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게 된다. 대개 객관식 시험은 아무리 섬세하게 출제된다 하더라도 정답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정신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북돋우지 못한다. 이른바 통합 교과형 출제라고 하면서 객관식 시험이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해도, 그것은 학생들의 정신을 더 치밀하게 구속할 뿐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주관식 평가라고 하더라도 그 폐해는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논술시험 같은 것이 입시의 일환으로 시행되면, 학생들은 끊임없이 출제자의 의도를 고려해서 글을 쓰는 일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 결과 자유로워야 할 생각이 내적 검열 아래 억압된다.

주관식이든 객관식이든지 간에, 시험에 길들여진 정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물음을 던질 줄 모르게 된다는 데 있다. 시험을 본다는 것은 대답하는 일이다. 시험에 길들여진 정신은 오로지 대답하는 데 길들여진 정신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정신이 남이 제출한 문제의 해답을 찾는 일에 길들여지고 나면, 이윽고 그것은 스스로 물음을 던지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학문과 인식의 영역에서 참된 진보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들이 던지지 않는 물음을 던지는데 존립한다. 마치 아무도 사과가 왜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지를 묻지 않았을 때, 뉴턴이 혼자 그 질문을 던진 것이 새로운 물리학을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더 나아가 시험의 탁월함은 그 자체로서는 일의 탁월함이 아니다. 시험은 일을 위한 자격을 측정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법시험이 그 자체로서 변론행위일 수는 없으며, 의사고시 자체가 의료행위는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어 시험이 그 자체로서 언어행위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시험은 생동하는 현실의 문맥을 사상한 조건 아래서 시행된다. 따라서 시험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조건 그것도 소극적 조건을 측정할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가 일의 탁월함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

 

31. 시험 교육이 무능한 인력을 양산하는 주범이라는 것.


   시험이 인간을 탁월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교육의 목적이 되고 학생들이 온통 거기 길들여져 있는 까닭에 한국교육이 길러내는 인간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지극히 무능하고 쓸모 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이 대졸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면서 대졸자의 능력이 가장 저조한 나라라는 최근의 조사결과가 말해준다.

인간의 재능은 한 가지가 아니다. 능력의 탁월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험은 그 모든 재능을 한 가지 재능 곧 시험의 재능으로 환원시키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 시험을 위해 필요한 소질은 (진실을 덮으려는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 하나 암기력이다. 하지만 암기력은 지적인 능력의 첫 단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쓰면 늘고 안 쓰면 퇴화되고 사장된다. 그런데 과도한 시험경쟁은 학생들의 다른 모든 재능을 억압한다. 그리하여 12년 동안 시험공부에 길들여지고 나면 학생들은 아무데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대학에 들어오게 된다.

 

32. 무능의 본질은 타율성이라는 것.


   인간의 능력은 활동에 존립한다. 활동의 본질은 자발성에 있다. 이 스스로 함이 활동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은 활동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는 존재만이 활동하는 것이다. 무능하다는 것은 자발적인 활동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외적 자극에 의해서만 활동하는 것이 무능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율성에 길들여진 정신은 그 자체로서 무능한 정신이다. 한국교육이 무능한 인간을 양산해내는 까닭은 그것이 학생을 철저히 타율적으로 길들이기 때문이다. 시험 경쟁은 누구에게도 자발적인 욕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학교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하기 싫은 일을 상시적으로 강요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자발적 욕구 능력 자체를 상실할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학생들을 무능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33. 학벌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것.


   이처럼 학벌주의가 교육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학생들을 무능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경쟁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경우에도 학벌주의를 혁신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다른 나라 청소년들이 정상적인 교육과정 속에서 자기의 개성과 소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해 나가면서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동안 한국의 청소년들은 모두가 똑같은 기준으로 경쟁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발견하지도 계발하지도 못하고 시험기계가 되어 어른이 된다.

현대 사회는 사회가 복잡한 만큼 다양한 재능을 필요로 하며, 학교교육은 바로 그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의 재능과 적성을 계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교는 학생들을 시험선수로 기르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적성과 소질의 계발도 해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서야 자기의 적성과 소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뒤늦게 찾는 것이 제대로 찾아질지도 의문이지만, 그것을 찾는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청년들보다 훨씬 뒤늦게야 자기 고유의 적성을 계발하기 시작하게 된다.

한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이렇게 늦게 자기를 발견하고 계발할 수밖에 없다면, 이런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와 경쟁할 때, 우위에 서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벌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나라의 미래가 어두운 까닭이 여기 있다.

 

34. 대학의 평준화만이 학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학벌주의는 단순히 애교심이나 자기학교제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대학들 사이의 서열에 뿌리박고 있다.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한국교육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학벌주의를 타파하려면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든 대학을 한꺼번에 평준화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립대학들부터 평준화해야 한다. 서울대학을 포함하여 모든 국립대학이 공동으로 학생을 모집해야 한다.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수험생들에게 대학과 학과를 1, 2, 3 지망까지 지원하게 하고 지원자가 정원보다 많을 때에는 추첨에 의해 선발하면 된다.

국립대학 교수들은 순환근무를 의무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대학이 가족적 공동체로 전락하는 것을 많은 부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 역시 교수의 추천과 동의에 따라 다른 대학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교수가 이동할 경우 학생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폐쇄적인 학벌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비단 국공립대학이 아니라도 교수를 채용할 때 초임에 한해서는 출신대학에 임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특정 대학을 선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공직자 지역할당제가 실시된다면 학생들이 기를 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려 애를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이 지방의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또는 로스쿨이 처음 추진자들의 의도대로 수십 개 대학에 비슷한 규모로 배분되었더라면 법조계의 학벌주의는 약화되거나 점진적으로 소멸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2) 

이런 것 외에도 사회적으로 학벌을 조장하는 온갖 제도와 관행들을 고쳐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입사원서에 학력란을 없애는 것(필요한 증명서류는 입사 후에 받아도 늦지 않다)이라든지, 학벌에 따른 가산점 부여를 금지한다든지, 아니면 지역별로 고르게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기업에 세제상의 혜택을 준다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학벌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타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35. 그러나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제도적 개선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


   제도적 개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기다린다거나 그것만을 위해 정치 사회적 운동을 벌이는 것만으로 학벌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학벌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나와 직접 상관없는 사회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라고 느끼는 일인 까닭에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학벌 경쟁에 참여하고 있고 그 경쟁은 점점 더 격화되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개선을 기다리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도 학벌경쟁은 점점 더 심각한 문제가 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결단하고 저항하는 것이 미래의 제도개선을 위해 싸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 담론의 장에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병행해서 지금 우리들 각자가 선 자리에서 학벌차별과 학벌경쟁에 저항하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교육운동은 이를 위해 시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설득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교육의 과제이다. 교사는 특히 학생과 학부모로 하여금 지금 그들이 선 자리에서 학벌경쟁에 저항하도록 결단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제4장 내부로의 망명 또는 낙오자 되기

 

36. 현재 한국 교육은 학벌경쟁의 정점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정상에 도달하면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는 것.

지금이 최악이다. 먼저 상황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나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회인지 느끼지 못한다. 학생들은 대다수가 다른 종류의 학교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다른 학교를 상상하지 못하며, 지금의 학교가 으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학부모는 자기 자신이 교실에 앉아 있지 않기 때문에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기도 하고 욕망에 눈이 멀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기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입시경쟁이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삶이 불행했던 것도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부모들의 학창 시절에는 학생들이 아침 0교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강제적으로 학교에 붙잡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에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이렇게 좋은 세상에 공부를 하지 못하는가 하고 아이들을 닦달한다. 과거에 대한 환상과 자식에 대한 욕망과 자기에 대한 허영이 현실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학벌체제가 더욱 악화되어 온 까닭은 경쟁이 지속적으로 더 격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학벌경쟁에 참여하게 되어 지금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서울대 정원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3000명 안팎일 뿐이다. 그러므로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과거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었다. (전태일을 생각해보라!) 그런 까닭에 학벌경쟁은 기본적으로 상류계급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그런 한에서 학벌경쟁의 본질이 일종의 계급투쟁이라는 것이 은폐될 수 있었다.

도리어 시험의 공정성과 객관성이라는 신화, 학벌경쟁을 통한 계급이동의 가능성의 유혹, 다시 말해 입시경쟁에서의 승리를 통한 개인적 출세의 유혹이 학벌체제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효율적인 체제 유지의 수단이 되게 만들어주었다. 간단히 말해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제 점수 올리느라 다른 일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먼저 학벌경쟁에 참여하는 학생의 수가 임계점에 달해 이제는 줄어드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 감소는 기본적으로 낙오와 탈락이다. 학벌에 의한 사회적 차별이 여전히 지속하는 사회에서 학벌경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낙오하고 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첫 번째 낙오자들이다. 이들은 언어습득단계에서부터 치명적인 장애를 안고 삶을 시작한다. 절대다수의 경우 엄마가 한국어를 제 때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은 이들을 처음부터 입시경쟁의 패배자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학교는 이들에게 아무런 배려도 해주지 않으며 도리어 차별하고 배제한다. 따라서 이들은 상시적으로 입시경쟁의 외부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배제와 낙오는 비단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학벌경쟁에 뛰어 들게 되면서 경쟁이 격화될 대로 격화된 결과 더 먼저 달리기 시작하고 더 좋은 조건 아래서 경쟁하는 학생들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는데, 이들은 부유층의 자녀들이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의 상류층은 입시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유지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온 나라를 지배하는 영어교육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다른 학습과목과 또 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다. 언어, 특히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해와 암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와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언어는 삶 속에서 배울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작해야 녹음기나 컴퓨터로 영어를 배우는 학생보다는 방학마다 미국에 영어 연수 가서 살다 오는 학생이 월등하게 더 빨리 영어를 습득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부잣집 아이들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영어몰입교육 운운하면서 모든 학생들을 영어의 노예로 만들어가는 흐름의 심층에는 이를 통해 부유층 자녀들과 일반 학생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차이를 제도화하고, 이를 통해 점점 더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나라에서 지배적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지배계급의 욕망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일단은 성공할 것이다. 영어는 가난한 사람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잠재적인 경쟁자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영어 때문에 입시 경쟁에서 배제되는 결과가 생겨날 것이다. 어차피 방학 때마다 영어연수를 받을 수 있는 부유한 학생들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과거 전통사회에서 한문이 수행했던 진입장벽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모든 양민들에게 과거의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극소수의 양반집 자제들만이 노동에서 면제되어 그 어려운 한문을 깨칠 수 있고 이를 통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영어 역시 우리 시대에 소수의 상류층과 절대다수 민중들을 나누는 계급적 장벽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입시경쟁은 지난날 과거시험과 마찬가지로 명목상으로는 모두에게 열린 시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상류층 자녀들의 일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의 서열이, 마치 논술시험을 보는 대학과 보지 않는 대학으로 나뉘듯이, 영어로 시험을 보는 대학과 한글로 시험을 보는 대학으로 양분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본고사에서 영어논술시험을 본다든지 영어로 면접을 보는 것이 그런 경우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대다수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런 대학을 포기하고 자기들에게 맞는 낮은 서열의 대학에 처음부터 눈높이를 맞추어 준비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당연히 공교육 역시 학교 안팎에서 이원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어떤 식으로든 교육이 계급적 차별기제라는 것이 갈수록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울지역 대학과 여타 지방대학의 이원화가 가속화될 것이다. (특히 국립대 법인화는 지방 국립대학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울의) 사립대학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특히 지방 학생은 서울지역의 하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서울로 진학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 역시 교육에서 차별과 양극화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입학시험이 겉으로는 공정한 경쟁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열악한 경제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 경쟁에서 배제되고,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가게 될 것이다. 특히 이전과 같은 거품경제가 종말을 고하고 사회가 경제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절대 다수 민중의 생활이 점점 더 한계선상으로 내몰리게 되면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첫째가는 사회불안요인이 될 것이다. 대다수 부모들은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교육을 받게 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만, 양극화된 현실 앞에서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학벌체제가 기존의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기제였다면 이제부터는 학벌과 자녀교육문제야말로 한국 사회의 첫째가는 사회불안요인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가 폭발하는 것은 한동안 출산율 저하에 의해 지연될 것이다. 평범한 부부는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려 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듯이 둘이 맞벌어서 자녀의 학원비를 대는 부모가 엄마가 직장에 나가지 않고 자녀의 학업을 전담해서 돌보는 부유한 부모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좌절감이 학벌체제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동요의 시작이 될 것이다.

 

36. 조기 해외유학은 길이 아니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외부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기유학이 성행하고 있으나, 조만간 그것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 금세 판명날 것이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가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자녀에게 치명적인 아이러니는 다시 없을 것이다. 조기유학과 가족의 해체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자녀에게서 빼앗는데 그 하나는 고향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다. 한국의 상류층은 이 나라 안에서 조기유학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교육제도를 고안해낼 것이고 중산층 이하는 더 이상 조기유학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37. 내부로의 망명만이 길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벌체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망명이다. 지금은 자본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식민지화해버린 시대이다. 학벌체제는 그것의 하수인이다. 예전 같으면 두만강을 건너서 망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익환과 윤동주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명동촌을 일구고 거기 학교를 세우고 식민지 반도와는 다른 자유로운 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국경을 넘어 망명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오직 내부로의 망명이 있을 뿐이다. 내부로 망명한다는 것은 체제 내에서 체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의 선친은 창씨개명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일본형사에게 일본 헌법에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지 물어 형사의 말문을 막았다. 어느 시대에나 내부에서 망명할 통로는 있다. 자기에게 정직하고 외부의 억압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내부에서 망명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망명은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오자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자발성이다. 낙오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게다가 모두가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을 때 먼저 낙오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낙오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물구나무 선 사회에서는 거꾸로 성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38. 내부로의 망명이나 낙오자가 되기가 대학 없애기나 대학안가기 운동은 아니라는 것.

 

39. 교사나 학부모가 아니라 학생들 자신이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는 교사들, 특히 전교조 교사들이 교육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였다. 커다란 성과에도 불구하고, 교사운동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학부모운동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무엇보다 학생들이 학벌타파와 교육개혁의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교육운동의 핵심적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 자신이 학벌사회에서 병든 교육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나서게 할 수 있는가에 맞추어져야만 한다.

 

 

청소년 학생들을 위한 조언

 

38. 낙오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나 낙오자가 되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는 두려움에 기생한다. 학벌사회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낙오하면 끝장이라고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모두가 낙오자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 때는 낙오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면 된다. 이미 지금도 이 사회에서는 대다수가 낙오자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낙오자들이 낙오하지 않겠다고 서로 반목하고 경쟁한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사람은 끝에 가면 지혜를 얻게 된다. 그 때가 되면 자발적으로 먼저 낙오한 사람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히 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

  

39. SKY 대학 못 갈까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다른 대학 가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SKY대학 들어간다고 인생이 한 순간에 낙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인생의 참된 보람과 가치가 학벌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선구자는 알량하게 지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간 뒤에 그 때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참된 자기실현을 위해 결단하는 용기 있는 정신이다.

특히 한국의 대학들은 서열화되어 있지만, 교수들은 평준화되어 있다. 학교를 따지지 말고 자기가 무슨 전공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전공분야에서 객관적으로도 훌륭하고 주관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교수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40.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청소년기를 그것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암중모색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입시교육은 청소년의 자기성찰과 자기발견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무엇이 하고 싶은지 발견하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아니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 바탕 위에서 미래의 뜻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어느 대학에 갈 것이냐 하는 것보다 백배 더 중요한 일이다.

 

41. 하기 싫은 시험공부는 이제 집어치우고, 진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일단 시험공부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이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배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남의 노예가 된다.

하지만 배움은 시험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삶과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전체적인 연관관계에서 아는 것이요, 다시 그것을 자기와의 관계에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학창시절에 닦아야 할 중요한 과제는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들이는 일이다. 이 습관이 평생을 간다. 한국의 교육은 문제집 교육인 까닭에 이 일에서 완벽하게 실패한 교육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육에서 낙오자가 된다는 것은 문제집을 덮고 좋은 책을 펴는 데서 시작된다. 책이야말로 한국의 청소년 학생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망명지인 것이다.

 

42. 이를테면 영어 문제집을 풀지 말고 영어로 된 책을 읽으라는 것.


   책을 반드시 우리말 책만 읽으라는 법은 없다. 영어의 기본문법을 이해한 뒤에는 직접 영어로 씌어진 책을 읽는 것이 허구한 날 토익이나 토플 문제집을 끼고 사는 것보다 (영어공부를 위해서도) 백배 더 좋은 일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에로소설을 읽을 때는 사전이 필요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런지 시험해볼만 하다.

 

43. 청소년 시기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이라는 것.


   인간이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고 쾌락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야말로 절대 자본주의 사회의 징후이다. 인간관계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버리면,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돈 이외의 다른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학벌경쟁에만 목을 매고 살아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쾌락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의 의식은 자리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연애편지를 한 번도 써보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내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44. 할 수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하나의 악기를 배우는 것이 좋다는 것.


   적어도 홀로 있는 시간을 위해서라면 어떤 기쁨도 예술이 주는 기쁨처럼 영속적일 수 없다. 그것은 삶에서 큰 돈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의 하나이며 고통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예술조차 시험과목으로 만들어 혐오의 대상으로 만든다. 하지만 예술과 아름다움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이다. 할 수 있다면 악기를 하나 배우는 것도 좋다.

낙오한다는 것은 개미가 되지 말고 배짱이가 되는 것이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만 한 사람이 2MB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치명적인 사고를 치는 사람이다. 게으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게으른 시간을 위해 평생의 친구를 얻는 것과 같다.

 

45. 쓸데없이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훨씬 좋다는 것.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치 사육당하는 돼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학생들의 큰 불행 가운데 하나이다. 의료보험의 민영화가 눈앞에 닥친 지금 몸을 아끼고 건강히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청소년기에 얻은 변비와 요통은 평생 가는 고질병이 될 수도 있다. 시험공부는 건강을 잃어가면서까지 목을 매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다.

 

46. 사회활동을 하라는 것, 특히 약자를 위한 자원활동을 하라는 것.


   오늘날 한국 사회와 학교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라는 것이다. 나의 이익이 너의 손해이며 너의 이익이 나의 손해인 입시경쟁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참된 관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낙오한다는 것은 약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진실은 참된 만남에 있다. 그리고 인간의 최고의 행복도 바로 거기에 있다. 만남의 능력은 삶의 가장 능동적인 능력이며 자발적인 기쁨의 능력이다. 그런데 모든 참된 만남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과 참여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응답하는 능력과 소질은 삶을 잘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한국 사회가 야수적 자본주의의 수렁 속으로 더욱 더 깊이 빠져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 사회에는 고통받는 약자들이 늘어간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할 수 있는 대로 도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의무이다. 청소년도 마찬가지이다.

 

47. 가능하면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


   이런 식으로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니기는 어렵다. 하지만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학교처럼 나쁜 공간도 없다. 야수적 경쟁과 폭력의 전시장이 오늘날 한국의 학교이다. 초등학교에서 집단 성범죄가 일어나는 곳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갈 데까지 다 간 것이다. 학교는 소돔과 고모라이다. 뒤를 돌아다 보지 말고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

흔히 학교에서 나오면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고 걱정하지만 경쟁원리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친구를 찾는다는 것은 다소 우스꽝스런 일이다. 만약 학교에 정말로 친한 친구가 있다면 같이 학교를 나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염려할 것도 없다. 친구는 학원에도 있고 절이나 성당 또는 교회에도 있다. 아무튼 학교에서 나온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언제나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48.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


   부모를 설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할 수 있다면 문제아가 되는 것이 좋다. 문제아가 된다는 것은 폭력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야만적 억압에 순응하지 않고 물음을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최악의 경우라 해야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하라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고분고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무엇이 손해가 되는지를 헤아려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아닌 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교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49. 저항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것이 좋다는 것.


   기왕이면 친구와 함께 뜻을 모아 저항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혼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므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것은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같이 저항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변화는 그만큼 더 빨라질 것이다.

 

50. 할 수 있다면 대안학교에 다니라는 것.


   학교에서 나온 뒤에는 할 수 있으면 대안학교에 가는 것이 좋다. 요즘은 다양한 대안학교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여서 잘 찾으면 자기 형편에 어울리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학원도 훌륭한 대안교육기관이다. 어디든 학교보다는 훨씬 더 좋다. 잘 찾아보면 검정고시 학원도 있고 재수생을 위한 종합반 학원도 나쁘지 않다. 낮에는 학원에서 규칙적으로 공부를 하고 저녁시간에는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시교육이지만 억압이 학교에 비해서는 훨씬 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그나마 학교보다는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큰 억압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그런 공부도 그런대로 할 만하다.

 

 

교사를 위한 조언

 

51. 다음과 같은 루소의 말을 기억하라는 것.

   “나는 교사의 자격에 관해서는 단 한 가지만 말하려 한다. 그것은 교사는 어떤 경우에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에밀) 돈은 학원에서도 벌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한국교육의 위기는 교사가 더 이상 교육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현재의 사범교육과 임용고사를 통한 교사임용은 단순히 교사의 질적 저하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교직을 다만 안정된 돈벌이 수단으로 알고 교직에 들어서는 사람을 막을 방법이 없다. 교사는 이런 상황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자기가 평범한 월급쟁이가 아닌지 늘 되물어야 한다.

 

52. 전체의 편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


   대다수 교사들이 학생들 전체의 입장에서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학생을 위해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때려서라도 내 학생의 성적을 올린다면 그 학생을 위해 잘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교사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성인에게 어울리는 사고방식이 아니다. 교사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심부름센터 직원이 아니다. 교사는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자기 학생에게 좋은 것이 다른 학생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허락되는 일이다. 

하지만 입시경쟁은 한 사람이 이익을 보면 한 사람이 반드시 손해를 보게 규칙이 정해진 경기이다. 따라서 각 교사가 열심히 입시경쟁에 몰두하면 할수록 전체 학생에 관해서 보자면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좋은 교사는 입시경쟁에 게으른 교사이다.

더 나아가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운동에 참여하는 교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교조 교사의 입장, 아니 그 가운데서도 자기가 속한 정파의 눈으로만 문제를 보려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교육운동에 미래는 없다.

 

53. 교육활동 그 자체가 교육운동이어야 한다는 것.


   일상(日常)이 이상(理想)이어야 한다. 교사에게 일상은 교육현장이다. 자기가 가르치는 일에서 이상적 척도를 견지하는 것이 모든 교육운동의 출발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벗어난 모든 ‘투쟁’은 결실을 얻을 수 없는 일종의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교육제도를 고친다는 것은 마지막에는 전국민적인 합의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끈기 있게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며, 그것이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다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미래에 선거에 참여할 시민이 바로 우리의 학생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배우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학교 문을 나서느냐에 따라 미래의 교육개혁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누구보다 먼저 우리 앞의 학생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이 바로 지금 또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미래에 학벌을 타파하고 교육을 근본에서 개혁하는 일에 최소한 박수를 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앞에 있는 학생들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투쟁만 하겠다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53. 지식인의 사명은 진실을 말하는 데 있다는 것.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실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학생에 대한 교사의 사명이기도 하다.

정치적 투쟁이 교육운동의 전부가 되면 안 된다. 교육은 그 자체로서 가장 근원적인 실천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잘 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운동이요 실천이다. 우리가 정치권력과 싸우는 까닭 역시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하지만 정치투쟁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교육현장에서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사가 맡은 과목이 무엇이든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맡은 과목에서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다.

 

54. 학생과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것.


   교사가 만약 학생들의 성적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실은 교사가 아니다. 무릇 참된 교사는 학생들 각자의 개성과 꿈과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학생 대 교사의 비율을 낮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교사가 만나는 학생들이 소수일수록 만남이 깊고 친밀해지기 때문이지 다른 무슨 효율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학생을 인격적으로 만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학생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교사의 태도와 더 큰 관계가 있다. 지금 한국의 교사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학생들을 수험생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55.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차별대우 하지 말라는 것.


   공부 잘한다고 편애하고 공부 못한다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교사들이야말로 경멸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교사들의 그런 잘못된 편애와 멸시가 학교교육에서 없어도 좋을 학벌차별을 내면화시키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런 태도가 마지막에는 교사들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사가 학생을 성적순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데, 학생들이라 해서 교사를 똑같이 존경하라고 요구하거나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교사가 학생을 평가하고 차별하듯이 학생도 그것을 배워서 교사를 평가하고 마음으로 차별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학교는 시장바닥이 된다. 학생들은 본전 생각을 하고 어떤 교사가 쓸만하고 쓸만하지 않은지를 따지게 된다. 이것이 모두 교사들이 자초한 결과이다.

좋은 교사는 도리어 반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아이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 자체가 약자와의 연대를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는 교육이다. 교사가 진심으로 공부 못하고 소외된 아이 편에서 생각하고 교육한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사실상 강자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사회질서는 학교에서부터 조성되고 내면화된다. 한국에서 학교의 존재이유는 오로지 최상위 학생들의 입시경쟁의 성공일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 학생들의 운명에 대해 학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양심적 교사는 이런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 장애아,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의 자녀에서 시작하여 모든 학습부진학생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친구가 되고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적을 통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소수의 성공을 위해 대다수 약자들을 배제하거나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약자먼저의 원리가 지켜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깨우쳐야만 한다.

 

56. 어떤 일이 있어도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것.


   때려서 교육하려거든 교육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학생에게 매질을 가하는 교사는 교사의 자격이 없다.

비단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교사에 의한 모든 종류의 모욕과 인권침해는 한국 학교의 심각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표현해 모든 강제는 인권침해이다. 임박한 위험을 막기 위해, 그리고 학생들의 자유와 주체성을 확장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타율적 강제는 인권침해이다.

 

57. 학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말해주라는 것.


   병든 사회에 살면서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깨우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우리가 학벌사회를 근본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학벌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그 학생들이 학벌사회가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면 그들이 학벌사회를 바꾸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지금 당장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학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불의하고 부당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그들은 끝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벌사회가 사악한 사회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지시켜야 한다.

 

58. 너도 하면 된다고 학생들을 기만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증스런 기만이다. 서울대 정원은 3000명 정도이다. 나머지는 아무리 해도 거기 들어갈 수 없다. 처음부터 절대다수가 패배하는 것이 정해진 게임이 입시경쟁인 것이다.

게다가 서울대 들어간다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서울 법대 가지 못하는 학생은 다시 그 안에서 은밀한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서울법대생은 괜찮은가? 그네들을 그들대로 상업학교 출신과 고대 출신 대통령 밑에서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하는 미개한 학벌사회의 사회 심리학이다. 결과적으로 이 게임에 승자는 없다. 교사는 그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59. 진학지도를 제대로 할 것.


   학생이 싫다는데, 서울대 합격생 숫자 늘리기 위해 무조건 서울대 원서 쓰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된 교사라면 배치표 보고 학생의 점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원서를 쓰게 하지 말고 학생의 적성과 장래희망을 고려하여 조언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학생들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60.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죄수이고 교사는 간수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학생들의 일탈행동은 죄수의 일탈행동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며,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발도 강한 법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싫으면 학생을 죄수로 만드는 간수 노릇을 그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사들 자신이 학생들을 억압하면서 학생들의 반발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교사는 무엇보다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학습부담은 이미 정상적인 요구수준을 넘어 폭력이나 다름없는 강제가 되었다. 교육이 그 자체로서 인권침해로 전락한 것이 한국의 학교인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그런 일에 동원된 하수인이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 일인지를 알 것이다.

학생들은 공부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교사는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보이는 행태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자기 수업시간에 다른 짓 한다고 신경질 내거나 화를 내는 것은 금물이다. 그럴 때는 조용히 다른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아니면 나가 놀라고 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능하면 학생들에게 존대말을 쓰는 것이 좋다. 교사는 학생들의 존경을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지 말고 먼저 예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교육적 모범이기도 하다. 언제나 학생들을 인격적 주체로 대하고 그들의 사적인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만남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61. 학생들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는 모든 관행에 저항하라는 것. 특히 0교시 수업, 야간자율학습의 지도와 감독을 거부하라는 것.


   우열반 편성 반대. 학교 내에서의 성적에 따른 학생복지상의 차별대우 반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문제제기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저항도 필요하다.

 

62. 교사 자신이 문제집만 보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혼자만 읽지 말고 학생들에게 자기가 읽은 책의 구절을 읽어주는 교사가 되라는 것. 할 수 있거든 학생들과 독서 동아리를 만들라는 것.


   한국의 교사들의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가 그들이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학교는 교사에게 지식인 또는 지성인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시험성적만 올려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사들은 점점 더 참된 지식과 교양에서 멀어진다.

오늘날 이런 사정은 진부한 사범교육과 임용고사라는 교사 양성 및 채용제도와 결합하여 가히 더 이상 나빠질 수조차 없을 만큼 나쁜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신임교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의 교사들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전문적 지식과 폭넓은 교양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에 뿌리박은 일종의 반지성주의가 있다. 그것이 교사들을 집단주의로 이끄는데,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나 교육운동을 위해서 백해무익한 태도이다. 

학교 교육이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학생들을 책 읽는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책을 읽지 않는 교사가 학생들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만들 수는 없다.

적어도 전교조 교사들만이라도 학교 내에서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같이 읽고 토론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실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더 이상 거리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같이 모여 토론하는 과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교육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젊은 교사라면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그 핑계로 학교 일에 게으른 교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것이 약관의 서른 초반 오산학교 역사교사 시절이었다.

 

63. 학교가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

   언제라도 학교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단에 서라는 것. 누구든 매이면 공명정대하게 행위하기 어렵다. 학교를 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교사에게는 학교에 남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학교에 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덜 비겁할 수 있다. 어차피 학교는 학원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게 되어버렸으니, 참된 교육자라면 더 이상 학교에 미련을 가질 까닭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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