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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비 오는 날의 단상

by 릴라~ 2006. 5. 19.

아침부터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동생이었다.

 

"왜?"

"비가 와서 너무 좋아. 처마 밑에 의자 내놓고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셔야겠어."

 

"나도 처마 밑에서 커피 마시고 싶어."

"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창밖이나 쳐다봐라. 렌지후드에 또 새가 알을 낳았다. 시끄러워서 일찍 깼어. 지금 밖에는 소쩍새 소리가 들리고, 새 소리 들으니 정~말 평화롭다"


이 인간이 아침부터 이렇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작년에 동생이 사는 곳에 가본 적이 있다.

예천 어느 한적한 동네의 보건소의 2층에 사는데 집 뒤로는 산이 있고

방 문을 열면 바로 넓다란 옥상이다. 처마 밑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시원한 경관이 펼쳐져서 정말 낙원이다 싶다. 온 천지에 새소리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가라앉히고, 아파트 숲속에서 그냥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보니 집에 관한 내 아름다운 기억은 죄다 주택에 살 때다.

아파트에 살고부터 집은 그냥 머무는 곳일 뿐,

나의 애정이 담뿍 깃든 삶의 터전이란 느낌을 잃었다.

평수가 적건 많건, 아파트는 아파트일 뿐이다.


태어난 집은 기억나지 않는다.

곧바로 가창변전소의 사택으로 이사왔다고 하는데,

커다란 수탉 한 마리가 푸드득 내 앞을 지나간 것이 나의 첫 기억이자

그 집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엄마한테 물으니 사택 마당이 넓어서 닭을 몇 마리 키웠다고 한다.)


유치원 때까지 살았던 범어동 사택은 기억이 또렷하다.

여러 집이 모여 있었고, 그 자체가 작은 마을이었다.

옥수수밭 사이로 다녔던 것, 도랑 건너다가 빠졌던 것,

엄마가 열심히 가꿨던, 맨드라미, 사루비아....

여름날 오후면 커다란 고무 함지에 물 받아놓고 목욕하며 장난 쳤던 것...


유치원 때 범어산 밑에 집을 지어서 이사갔다.

그 집이 세워지던 과정은  생생하다.

아빠가 평생 살 집이라고 너무 정성을 들이는 바람에 돈이 부족해서

결국 2층은 못 올리고 말았지만.

그 집 지으며 너무 고생해서, 엄마는 늘 집을 직접 짓는 것처럼 바보짓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다 짓기 전에 이사와서 우선 방 하나만 쓰면서 인부들을 지휘해가며 집을 완성했다.

나무 대문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멋졌기 때문에 (평생 살 집이라고 아빠가 좀 오버했다고 함)

당시 어린 나도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집이었다.


그네가 세워지던 날은 얼마나 행복했는지.

공터에 버려진 못쓰는 그네를 주워와서 아빠가 직접 색색으로 페인트칠을 했다.

노란 색으로 전체를 먼저 칠하고 나서 빨간색, 파란색을 칠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매일 그 그네에 앉아서 덜렁거렸다.

동생이랑 그네에 앉아서 거의 날이면 날마다 '스무고개' 놀이를 했다.


엄마가 국화를 좀 좋아했다. 가을이면 화분에 실국화가 가득하고

대추나무는 무성하게 자랐고, 작은 배나무에선 실제로 조그만 배가 열려서 신기해했고

온갖 종류의 벌레가 있었고, 가을이면 잠자리도 그렇게 많았는데..

어느 집에 토끼가 너무 예뻐서 매일 구경갔는데 아빠가 두 마리를 얻어와서

우리 집에서도 키웠다.

결국 한 마리는 우리 밖으로 나와서 쥐약 먹고 죽고

한 마리는 엄마가 닭고기라고 속여서 몰래 나한테 먹이고 말았지만... TT


어릴 때라서 집에서 학교까지 꽤 멀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길이 온통 흙탕물이라, 두근두근거리며 머나먼(?) 길을 가곤 했다.


아파트에 살고부터는 그런 삶의 질감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공간'이, 그 공간의 배치가

우리 삶의 성격까지 결정하는 것 같다.


아파트는 균질화된 공간, 차이가 없는 공간이다.

가구만 좀 다르게 들여놓을 뿐, 다 엇비슷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삶의 방식도 다 고르게 균질화된다.

 

아파트 사이에 난 길도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구부러진 길,

그 길 주위에 수많은 풍경이 있었던 그 길과 달리 무색무취이다.

아무런 추억을 생산하지 못하는 그런 길. 그런 공간.

이 안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겐 그만의 독특한 추억이 없다.


요즘 '나의 집'이 점점 절실해진다.

계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집, 밤에 잠시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집,

비가 오고, 그 비가 마르고 땅의 흙냄새가 올라오는 집,

그런 집에 살면 삶이 더욱 생생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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