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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동남아시아

킬링필드의 현장, 쯔엉아익 / 캄보디아 프놈펜

by 릴라~ 2011. 9. 12.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마음이 천 근 만 근 내려앉는다. 길 양 옆으로 연이어 나타난 크기가 조금씩 다른 구덩이들. 자연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 범죄의 잔혹한 흔적이었다. 구덩이 하나하나마다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한다. 그들이 입었던 옷가지를 담은 함도 길 한 켠에 있다. 그 옷의 주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서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프놈펜 교외에 있는 쯔엉아익(Choeung Ek) 기념관, 킬링필드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 8000여구가 발굴된 곳이다. 폴포트가 축출된 후 다음 정권에서(근데 이 넘들도 비슷한 놈들이라더라) 유골을 모아 기념탑을 세웠다. 유골을 연령별로 나누어 층층이 전시했는데 아이들의 작은 유골에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폴포트가 집권하는 동안 800만 인구 중 약 200만이 희생된 참극의 흔적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희대의 살인마 폴포트. 그가 이끈 크메르 루즈 정권이 탄생한 데는 미국도 한 몫 했다. 미국은 당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정권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생각해서 론놀 장군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쫒겨난 시아누크는 변방의 공산주의 세력인 폴포트와 손잡고 론놀에 저항한다. 당시 베트콩이 캄보디아 정글에 많이 숨어 있던 터라 미국은 캄보디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는데(미군 폭격으로 죽은 사람만 수십만), 론놀 정부의 학정과 미군 폭격에 반감을 품은 농민들이 폴포트의 크메르 루즈에 대거 가담하면서 이들의 세력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남아 있던 론놀 정부 인사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무자비한 칼 끝은 멈출 줄을 몰랐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하다가 급기야는 글을 아는 사람은 다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 안경 쓴 사람은 지식인이라고 죽이고, 연예인까지 다 죽였다 한다. 화폐 철폐, 병원, 학교 등 현대식 시설 거부, 도시를 버리고 농촌에서 집단 생활을 하는 특이한 유토피아의 추구. 그 결과는 참혹하다. 모든 산업이 붕괴되고 캄보디아는 회복 불능의 상흔을 입었다.

친구는 자신에게 크메르어를 가르쳐주는 과외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는 이 모든 일을 직접 겪었다. 수도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 루즈가 공산주의식 이상향을 건설한다며 도시 주민들을 농촌으로 추방할 때 그 선생님의 가족도 강제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각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당시 십대 소년이었던 그에게 크메르 루즈군이 책을 읽어보라고 했단다. 그는 이유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예감에 절대 못 읽는다고 버텼고 그래서 살아남았단다. 베트남군의 진격으로 크메르 루즈 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그는 도망쳐 고향 프놈펜으로 돌아오는데, 폭격이 일어날 때마다 길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것을 끝없이 넘어서 집으로 왔다고 했다.

킬링필드 당시 십대였던 아이들은 이제 중년이 되었고 캄보디아의 인구는 천 오백만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전범 재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치/경제적으로도 이 나라는 최빈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 말에 따르면 방앗간 하나 제대로 없다. 함께 사는 수녀님이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콜라를 마시라고 하더란다. 사람들은 편지나 소포를 대개 인편으로 부친다. 우체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인데, 친구는 우편물이 함까지 들어가는 걸 직접 봐야지 아니면 자기가 나온 다음에 직원들이 우표를 떼서 팔아먹는다고 했다. 국제 우편을 보내도 자기들이 뜯어보는 게 다반사라고. 내전 당시 묻힌 지뢰는 이후로 수백만 개를 제거했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이 묻혀 있는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세계적 유적 앙코르왓 관리는 베트남-일본 합작 회사가 하고 물건 같이 생긴 건 전부 이웃 나라 태국과 베트남에서 수입된다. 이 지역에서 태국과 베트남은 상대적으로 강국이다. 캄보디아 안에도 베트남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넘어와서 베트남계가 꽤 있는데 국적 문제를 비롯해 갈등이 많다고 한다. 폴포트 정권을 몰아낸 건 베트남이고 지금 정부 역시 친베트남계인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베트남의 핍박을 받아왔던 터라 그 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에도 폴포트 한 사람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개입이 있었다.


 

 



국제 정세와 내부적 요건이 한데 어울려 빚어낸 참극. 쯔엉아익을 한 바퀴 돌며 인간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치던 나는 그곳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기억해냈다. 우리 역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외세가 개입한 분단, 그에 따른 6. 25 내전. 내전 중에 일어난, 민간인 이십만 이상이 살해된 보도연맹 사건. 6. 25 역시 그 비극의 실체가 제대로 재조명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킬링필드는 여기 뿐 아니라 우리의 잊혀진 과거 속에도 있었다.

쯔엉아익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침 친구의 크메르어 과외 선생님이 와 있다. 내게 어디를 갔다 왔냐고 묻더니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

"Is it beautiful?"

물음의 의도를 알지 못해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만 답했다.

학살의 현장이 아름다울 리 없다. 헌데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비극을 몸소 겪은 사람으로서 킬링필드가 단지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된 것에 대한 냉소일까. 아니면 캄보디아에서 'beautiful'을 외치는 여행자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돌려 말한 걸까.

그의 표정은 그저 담담했고 나 또한 그 질문의 이유를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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