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에서 우리가 느낀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바라나시는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그 무엇도 거기엔 없었다. 갠지스 강을 따라서 어쩌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버린 것인지도...
릭샤를 타고 힌두교 사원을 몇 군데 돌면서 나는 내 느낌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내세가 현세를 완전히 뒤덮은 곳, 인도. 마음을 다해 신께 기도하는 누추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내가 본 건 체념이었다. 거기엔 어떤 희망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삶은 고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을 목격하는 것이 내게 고통이었다. 어서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갠지스강을 인도 사람들은 강가라고 부른다. 강을 따라 계단으로 된 가트가 죽 이어져 있다. 우리는 릭샤꾼의 안내에 따라 화장터가 있는 가트로 갔다. 공기조차 마치 몇 백년 전이나 그 자리에 있어온 듯 낡고 눅눅한 느낌이었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으로 갔다. 장작 더미 위에서 하얀 색의 무언가가 타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마네킹처럼 보였다. 나는 한참을 보고서야 그것이 사람의 몸임을 알아차렸다. 거의 다 탄 얼굴에 귀가 붙어 있었다. 팔과 다리는 사라지고 없었고 몸체와 얼굴이 아직 불길에 싸여 있었던 것.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생명이 떠나고 난 사람의 몸은 나무 토막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전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무상함에 몸서리쳐져 더 지켜보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릭샤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조건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급 호텔로 가자고 했다. 가까운 곳에 '갠지스 호텔'이 있었다. 화려하고 편안한 호텔 안은 인도가 아니라 다른 세상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호텔 밖을 나서면 곧 마주치게 될 비참함이 이젠 넌더리가 났다.
우리가 갠지스의 화장터에서 본 것은 허무 그 자체일 뿐이다. 갠지스에서 인생을 깨달았다느니 하는 여행자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생의 축복은 없다. 있는 것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인생 뿐. 인생은 슬픈 연극일 뿐이었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기 갠지스에서 사람들은 어떤 구원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다시 태어나는 것?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인도 사람들의 달관은 체념에서 우러난 것이다. 비참한 현실을 뚫고 일어날 의지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곳에서 나는 절망을 느꼈다.
다음날 새벽, 바라나시를 떠나기에 앞서 배를 타기 위해 갠지스에 다시 갔다. 오토릭샤를 타고 가며 본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좁은 골목길은 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낡고 음침한 거리는 처음이었다. 낮이라도 길을 잃으면 찾지 못할 것이다. 골목통을 지나자 강이 나타났다.
자욱한 안개 속에 목욕하는 사람들, 기도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뱃사공이 노를 저었다. 안개 때문에 주위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화장터의 연기는 쉼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적지 않은 돈을 치렀는데, 선착장에 오니 대부분의 돈은 호텔에서 소개해준 사람이 가져갔고, 한 시간 동안 애써 노를 저은 노인에게는 몇 푼 돌아가지 않았다. 미리 알았다면 노인에게 직접 돈을 주었을 텐데.
자욱한 안개 만큼이나 무상함이 짙게 드리워진 곳, 바라나시를 떠나게 되어 기뻤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네팔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국경도시 소나울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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