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끝나고 봐서인지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영화. 보면서 많이 울었다. 자비 없는 법 때문에 19년을 갇힌 장발장의 한과 가엾은 팡틴의 가난 때문에 울었고, 이러한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솟아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때문에 울었고, 미리암 주교의 자비와 자베르를 용서한 장발장의 관용 때문에 울었다. 레미제라블에 담긴 사상적 풍요로움을 생각할수록 지금, 여기의 척박함에 가슴이 무너져왔다.
톰 후퍼 감독의 <레미제라블>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만 전개되는 뮤지컬 영화이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인물의 내면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집약해서 전하고 있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레미제라블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기도 노래도 훌륭하며(노래가 뮤지컬보다는 많이 못하다고들 하는데 현장녹음이라 하니 이 정도면 만족함) 영화의 공간 역시 웅장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다. 그 스케일은 혁명기의 파리의 분위기를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자비의 화신 미리암 주교(잠깐 등장하는 데도 굉장히 뭉클하다. 대사보다 노래가 그 장면의 울림을 더욱 잘 표현하는 듯), 굳건한 양심과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킨 장발장, 관용이라곤 없는 냉혈한 자베르 경감, 돈 밖에 모르는 테나르디에, 가난하고 착한 여인 팡틴,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이 캐릭터 하나하나가 혁명기의 시대정신인 자유, 평등, 형재애의 정신과 잇닿아 있다.
이 영화가 리암 닛슨 주연의 레미제라블과 다른 점은 바로 그 들끓는 혁명기의 빠리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발장이 갇힌 교도소와 팡틴이 일한 공장은 산업혁명기의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보여주며, 바리케이트 친 시가지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청년들의 열망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프랑스 대혁명 후 왕정 복고에 대항해서 1832년 일어난 마리우스와 청년들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그 희생이 파리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공화국의 이상이 실현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고 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장발장이 이 세상을 용서하는 방식은 마음을 울렸다. 장발장과 자베르의 대결은 인간이 과연 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담고 있다. 자베르가 보기에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며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지만, 미리암 주교의 선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만 한 전과자 장발장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장발장이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자 애쓰며 끝끝내 자베르에게 복수하지 않는 모습은 우리 삶을 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남긴다. 장발장이 자베르를 용서한 이유는 그것이 그가 자기 삶을 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발장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그가 보여주는 '관용'의 정신은 19세기 프랑스의 시대 정신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발장이나 미리암 주교처럼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며 그들처럼 '관용'의 힘으로 자신과 세상을 구하고 있지도 못하다. 박근혜 5년, 동포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짐승들 틈에서, 특히 주위 사람 열 명 중 여덟 명 이상이 다른 사람은 죽든 말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딸에게 투표한 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어두운 시간 동안 무엇이 이 아픈 세상과 우리들의 부서진 가슴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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