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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빛은 사방에 있다 - 김정란

by 릴라~ 2006. 3. 27.

빛은 사방에 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정란 (한얼미디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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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의 에세이 모음집. 여성 작가들 중 보기 드물게 좋은 글을 써내는 이다. 몇몇 꼭지는 매우 탁월했다. 대부분의 글을 공감하며 읽었으나 지나치게 심리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어서 선뜻 이해가지 않는 것도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시적인 감수성을 죽 펼쳐놓은 글들에서 세상을 향한 그녀의 눈짓, 손짓, 발짓, 그녀만의 몸부림이 느껴졌다.


남성 작가들이 결코 포착해내지 못하는 세계, 우리 삶의 작고 미세한 떨림을 담아내고 있기에 여성 작가들이 쓴 글을 읽는 건 신선한 체험이다. 여성 작가의 글에는 '일상성'이 살아 있다. 문제는 좋은 작가가 드물다는 것. 안을 깊이 사유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김정란은 그 반대다. 안과 밖을 함께 들여다본다. 그녀에게 일상과 정치는 연결된다. 일상의 가녀린 속살거림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에서 진실을 본다. 진실은 때로, 그렇게 구석진 곳에 있다. 그녀는 일상의 미세한 매커니즘을 깊이 응시하는 것이 곧 사회적 매커니즘을 뒤집는 실천을 낳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철저한 시인이자 문학도인 동시에 대사회적 발언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이의 목소리에는 남성 작가가 보여주고 들려주지 못하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묻어난다.


다만, 김정란의 감성은 너무 비장하다. 이 가벼운 세태 속에 그녀가 지닌 진지함은 가치 있지만, 그래도 너무 무겁다. 김정란은 끊임 없이 빛을 이야기한다. 빛이 오리라는 것을 강렬하게 믿고 있지만, 아직은 빛은 요원하다. 그녀는 빛을 기다린다.


김정란의 사유, 그녀의 문학 세계가 기독교적 사유의 틀 안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녀는 예수의 죽음 후, 부활이 있기 전까지의 사흘의 시간에 속한 사람 같다. 그녀는 상처와 고통을 목격했고, 그것의 치유와 새 생명 즉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고통을 극복했지만 아직 완전한 새 날이 오지는 않았다. 부활이 있기 전의 사흘, 그녀는 빛을 예감하며 빛을 고대한다.


그녀가 기독교적 세계 인식의 틀을 넘어서 더 환하고 찬란한 글을 썼으면 좋겠다. 비장함을 걷어내었으면 좋겠다. 부활의 희망으로 용솟음치는, 생명의 몸부림이 펄펄 살아 뛰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러한 비장함, 이러한 진지함이야말로 그녀 고유의 빛깔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척박한 우리 문학의 영토 안에 작은 샘물로 존재하는 이가 김정란이다.


영감을 주는 여성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유,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기 위해서, 이젠, 남성들의 힘, 남성들의 기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사유, 그들의 사상만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이는 여성이다. 남성은 자아가 부서질 각오를 하면서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사랑을 하면서 자아가 부서져 버렸다. 그러나 이제 김정란의 말처럼 새로운 여성들이 오고 있다. 탈현대의 다면체적 사랑을 꿈꾸는, 여성성과 육체를 새롭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들은 자아가 다 부서져나갈 각오를 하고 사랑하지만, 결코 자아의 중심점을, 그리고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의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는다. 그녀들은 순하지만, 동시에 용감하다. 그녀들의 사랑에 대한 언술은 대단히 세련되어 있으면서도, 원시적이고 고대적이다."


우리 문명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끊임 없이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죽어가는 문화, 죽어가는 지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태초의 여성성(매스컴이 조작하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이 아닌), 그 근원적인 생명의 힘으로 무장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과 문화가 그러한 여성성으로 풍만해져야 한다. 그래서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찬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야 한다.


여성 문학인, 여성 정치인의 등장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성 사상가가 나와야 한다. 여성 교황, 여성 추기경이 나와야 한다. 지적 권력과 영적 권력의 획득 없이는 완전한 양성평등의 문화가 창조되기 어렵다. 수많은 여성 사상가들이 배출될 때, 여성 종교 지도자들이 배출될 때, 우리의 반쪽 문화는 온전히 치유되고, 새로운 영성, 새로운 생명 문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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