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우리의 경험을 좌우하는 것은
장소의 특성보다는 여행의 방식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내게는 제주가 그러한 곳이었다.
올레 1코스에서 15코스까지 제주 해안선의 절반 가량을 천천히 도보여행을 했는데
바람과 바다가 빚어낸 해안선의 절경에 취하고
소박한 마을 골목길이 주는 평안을 맛보는 데서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나쳐간 마을과 야산 곳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흔적을 아울러 만났다.
일제강점기의 땅굴과 4.3 사건의 흔적들이었다.
도보여행이 선물한 것은 역사에 대한 '감각'이었다.
역사를 추상적 사실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로 맞닥뜨리게 한 곳이 제주였다.
4.3 평화공원 방문은 그로부터 6,7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제주 시내가 아니라 절물자연휴양림 부근에 있어서
남부 해안선을 따라가는 올레 코스와 맞지 않아 그간 들를 짬을 내지 못했다.
이번 제주 여행은 절물자연휴양림에서 쉬는 걸로 계획했기에
렌트카로 쉽게 찾아가볼 수 있었다.
4.3 평화공원은 해발 450미터 중산간의 드넓은 부지에 조성되어 있었다.
인근에 절물오름, 민오름, 절물휴양림, 사려니숲길, 라헨느골프장, 명도암유스호스텔이 있었고
멀리 제주시의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녹색의 기념관 건물은 4.3을 담는 그릇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내가 방문한 어떤 기념관보다도 사료가 풍부해서 많이 놀랐다.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이 4.3 사건이 촉발되고 진행된 과정 전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고, 구성 방식도 예술적이었다.
광주 5.18 기념관보다 훨씬 나았다.
물어보니 준비 기간에만 십년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 예술가들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정성을 들였다 한다.
특별법 제정으로 예산이 보장된 것도 큰 힘이 되었다고.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내가 역사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4.3은 단지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누적된 갈등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 근대사를 압축하는 상징적인 사건임을 알려준 곳이 4.3평화공원이었다.
4.3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이 정말 가슴 아팠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모인 민간인을 향한 발포에 분노한 제주도민은
5.10 남한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여 투표를 보이콧하여
제주 전체 3개 지역 중 2개 지역에서 투표 무효가 성립된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고 대대적 토벌에 나선다.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오고 2500여명이 검거되고 고문 치사가 발생하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무장대와 정부군이 싸우는 동안 아무 죄없는 양민 이만 오천에서 삼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숫자는 보도연맹 사건보다는 적지만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은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에도 유래가 없던 '제노사이드'였다.
정부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양민도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수많은 인명 살상을 막을 수 있었던 숱한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제주를 죽이는길을 택했다.
그래야 1948년 7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주 양민을 학살하고 나서야 가능했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누군가에게 이 정부는 정당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4.3 당시 공권력의 남용에 대하여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4.3 사건으로 긴 세월 서로 도우며 살아갔던 제주의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제주 중산간 지역은 자연 환경이 척박하여 마을이 없는 줄 알았는데
토벌 과정에서 주민들을 해안으로 이주시키면서
84개의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부군은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이 해안에서 한라산으로
범위를 좁혀가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재일교포 중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4.3으로 인해 가까운 오사카로 탈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기념관 뒤로는 드넓은 추념 광장을 끼고
희생자 13,903명의 위패를 모셔 놓은 위패봉안소가 있고
그 옆으로는 수천 기의 행방불명인 표석이 있었다.
희생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과 4.3사건으로 구속된 후
각 지역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수천 기의 표석들,
불행한 시대에 희생된 가엾은 민초들의 이름 사이를 거닐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의 심정이 들었다.
희생자들은 이렇게 많은데 가해자들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70년이 지나는 동안 고위직은 물론 일반 군경을 포함하여
당시 학살에 가담한 이들이 참회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마 제주 진압의 대가로 국립공원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많은 비극이 그랬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화해와 상생을 피해자들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방식만으로는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민초들의 희생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와 상생을 말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평화'는 가해자들을 공적인 자리에 소환하여
이 사회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때 이룩되는 것이다.
가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실한 증언도 참회도 없이 이 시대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4.3 평화공원에서 우리의 평화는 아직 요원하구나 했다.
*여행한 때: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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