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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schooling

소라의 짧은 여행

by 릴라~ 2017. 2. 12.

N중학교 2학년 2반은 전교에서 가장 시끄러운 반이었다. 수업 한 시간이 끝나면 교사가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만큼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애들이었다. 남학생들만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여학생들도 드센 아이들만 모아 놓았다. 40명이 와글와글하기 떠들기 시작하면 여기가 대체 교실인지 시장바닥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반 아이들이 칠판 앞에서 서로 부딪히면서 장난을 심하게 치다가 칠판이 떨어져 내렸는데 그 때 그만 한 녀석의 손끝이 잘리고 만 것이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 그 잘라진 손끝의 살점을 찾기 위해 온 반 학생들이 오후 내내 쓰레기통 하나까지 다 엎어가면서 찾았다. 찾았으니 다행이었다. 그걸 들고 너무 늦지 않게 봉합 수술을 하러 달려갔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 반 담임 선생님도 살다 살다 그런 반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 시끄러운 2학년 2반에 그 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소녀가 있었다. 이름은 이소라. 내가 소라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소라가 내가 지금껏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문학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소라는 또래보다 조숙했고 독서광이었으며 언어 감각이 탁월했다. 공부도 아주 잘했다. 하지만 반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부족해서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바로 옆의 1반은 정말 얌전하고 조용한 반이어서 소라가 그 반이었으면 학교 생활을 훨씬 편안하게 했을 것 같았다. 소라가 하필이면 그 사나운 2반에 있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 또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 역시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2반을 통제하지 못해 애를 먹은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조용하라' 하다가 한 시간 다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하루 종일 그 교실의 소음을 견뎌야 하는 소라에게는 얼마나 큰 고역이었을까.

 

수업 중 소라의 목소리를 듣기는 힘든 일이었다. 소라는 발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늘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공부하거나 책을 읽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가 막힌 글씨로 10줄을 써야 하는 과제는 한 쪽을, 한 쪽을 써야 하는 과제는 두세 쪽을 반듯한 글씨로 써오곤 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소라는 자기 글을 타인 앞에서 읽는 것을 워낙 싫어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기에 나는 수업 시간에 애써 발표를 시키지는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소라의 공책을 읽는 것을 소소한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나 또한 소라와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3학년이 되어 소라는 앞 반에 배정되었고 나는 뒷 반 수업을 맡게 되어 수업 시간에는 소라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5월쯤 되었을 무렵이다. 소라가 내 블로그 방명록에 몇 줄 소식을 남겨놓았다. 작년에 숙제를 이메일로 제출한 적이 있어서 내 메일 주소가 소라에게 있었는데 그거 타고 날아와 봤다고 했다. 반가워서 나도 소라의 메일을 따라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학교에선 무뚝뚝한 아이였는데, 소라의 블로그는 다정다감하고 환상적인 목소리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시라기보다는 노랫 가사 비슷한 내용의 자유로운 글들이 소라가 직접 만든 애니메이션과 함께 지속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이 아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라는 내가 알던 이지적이고 단정한 모범생이 아니라 섬세하고 다분히 감상적이며 지금 이 현실이 아니라 어딘가 먼 곳에 자신이 발 디딜 만한 별을 찾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외롭고 자유분방한 영혼이었다. 블로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어려웠던 질문은 '넌 누구냐?'이다. 굉장히 단순한 질문이지만 약간 철학적으로 간다면 엄청나게 말하기 어려워지는 뭔가가 있는 질문이기에."

"예전에 중세 시대를 기준으로 한 전생테스트를 인터넷에서 해봤는데 남을 위해 희생하는 백기사가 나왔다. 난 그런 날개 없는 천사는 결코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사항이지만 나는 떠도는 나그네나 음유시인을 원한다."

 

떠도는 나그네나 음유시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초등학교 5학년생의 소라. 그 아이의 반짝이는 감수성을 블로그라는 창을 통해 비로소 조금 엿보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학교에서 한 번도 소라의 밝은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또래 여학생들은 별일 없어도 늘 생글생글거리는데 소라는 잘 웃지 않았다. 늘 조금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함께 보낸 중학교 2학년 수업이 끝나갈 무렵, 수업 시간에 소설 쓰기 활동을 한 적이 있다. 한 쪽짜리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었는데, 며칠 뒤 소라는 한 쪽이 아니라 공책 마지막 장에 A417장이나 덧붙여서 깨알 같은 글씨로 소설을 써왔다. 그런데 난 학년말에 어찌나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지 소라가 정성들여 쓴 그 이야기를 읽을 짬을 내지 못했다. 나는 ', 이걸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뇌기만 하다가 그저 공책에 도장만 찍고 돌려주고 말았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소라가 고2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라에게 병이 있는 줄도, 그 아이가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다 갈 줄도 몰랐다. 내가 만난 가장 천재적인 문학소녀의 피어보지 못한 젊음과 재능이 아까워 눈물이 났다. 음유시인을 꿈꾸었던 아이가 서울의 강남이라고 하는 대구 S학군에서 입시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소라의 중2 때 담임 교사도 말했다. 그렇게 빨리 갈 것을 한번도 자유를 맘껏 누리지 못하고 공부만 하다가 갔다고. 딸 하나를 곱게 키우던 소라 어머니의 슬픔 또한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소라가 쓴 한 편의 서평뿐이다. 중학생의 글 치고는 훌륭하고 논리정연한 글이지만 이 글은 한 사람의 내면에 관하여 소설이라는 형식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반의 반도 보여주지 못한다. 소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소설은 우리가 일상적인 만남이나 대화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타인의 진짜 내면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저마다 그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을 가슴에 담고 있으며, 그것을 가장 온전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소설인 것이다.

 

소라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이제 어디로 먼 길을 떠났을까. 나는 열 다섯 살 소녀가 품고 있던 미완의 꿈들을 읽어주지 못한 자신을 한동안 자책했다. 그 이야기들은 소라의 가슴과 머리를 통과해서 이 우주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테지만, 내가 그 우주와 접속할 수 있는 축복 같은 시간은 이제 영영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소라의 블로그를 방문해서 그 아이가 자기 소갯말에 남긴 글을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볼 뿐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만나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있나니 다른 것을 찾지 말지어다."

 

 

 

 

 

일상에 짓눌린 학생들의 자화상을 그리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2학년 223번 이소라

 

지금 이 현실은 꿈과 우정 사이

 

중학교 점심시간. 밖에서 축구하는 남학생들, 왁자지껄 떠드는 긴 머리의 여학생들 사이에서 종종 교실 의자에 앉아 교과서를 보거나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을 발견하곤 한다. 자신의 꿈과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한순간의 고통 정도는 참을 줄 아는 그들의 자세는 선생님들에게는 크나큰 보람일지 몰라도 다른 학생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기에는 충분하다. 짧기 만한 하루하루의 시간을 아끼면서 미래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행복한 인생을 사는 방법 중 하나이지만 가장 꽃 같은 시기를 오직 책과 함께 보내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후에 그들의 머리가 하얗게 새고 허리가 꼬부라져 지난날들을 회상해 볼 때 자신을 웃음 짓게 만드는 기억이 없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일 것이다. 지식이란 건 단편적이거나 순간적일 때가 많아 나이가 들면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이런 지식도, 추억도 없이 삶을 마쳐야 하는 그 학생들에게 거의 100년간의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공허함으로 전화를 걸어도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어색함과 갑작스런 의아함만이 교차할 것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고 책을 읽지만 의외로 그들의 미래가 더 허무하고 쓸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원한다. 무엇이 꿈과 우정의 위태로운 외나무다리에 올라서게 만드는가, 어린 아이들의 삶에 한 움큼의 책임감을 안겨주는가.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러한 물음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 한 소년의 불우한 어린 시절 속으로

 

수레바퀴 아래서는 신학교에 들어가게 된 영특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신학교 소년들의 꿈과 우정의 엇갈림을 그린 책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뛰어나 마을의 유망주로 꼽히던 한스 기벤라트는 어린 시절을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질이나 동물 기르는 것을 포기한 채 기하학, 호머 등을 배우며 공부에만 매달린다. 그리고 2등이라는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헬라스 방에 배정된 한스는 처음에는 조용한 모범생으로 선생님과 사랑과 아이들의 동경 ? 질투를 한 몫에 받는다. 그러나 시인이기를 꿈꾸는 헤르만 하일너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은 180°로 바뀌게 된다. 반항적이면서도 감수성이 풍부한 하일너는 한스를 미련한 노력가라고 비평하며 이 세상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한스는 하일너가 자신의 모든 신념과 단 하나의 목표를 흔들어 놓자 몹시 당황해 하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하일너는 선생님들에게 점점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하일너는 그럴수록 자신과 멀어지는 한스를 경멸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일너와의 우정을 져버려야만 하는 상황. 결국 한스는 하일너와 어울려다니다가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던 두통에 시달리다 신학교를 나와 기계공이 된다. 옛 친구의 도움을 받아 처음 노동의 기쁨을 느끼게 된 한스. 그러나 작가 헤르만 헤세는 끝내 그의 기쁨과 보람을 한순간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스 기벤라트, 그리고 나

 

농장과 들판 곳곳을 뛰어놀고 낚싯바늘에 올라오는 물고기를 보며 오랜 기다림의 보람을 느껴야 하는 어린 시절에 한스 기벤라트는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둔 채 오직 자신이 꿈꾸는 목표만을 위하여 휴가 중에도 예습을 하는 열의를 보인다. 선생님들은 물론 주위의 아이들까지 모두 그가 신학교를 거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막상 신학교에서 그는 교과서와 다른 세계를 하일너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존재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행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 같이 아파하고, 동감하였다. 어머니께선 어릴 때는 큰 감동을 받은 책이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읽었을 때는 별로라고 하셨다. 그만큼 내가 이 소년과 한 장 한 장을 함께 감동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학생'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그저 공부가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시험을 잘 쳐서 멋진 판사가 되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낙이자 행복, 목표, 이상 그 모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꼬마였던 시절이 지나자 옆눈이 뜨이고 주위의 여러 친구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부는 인간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혹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사회의 축소판인 이 학교라는 곳에서 꿈과 우정 모두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난 그렇게 한스 기벤라트처럼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밤하늘 별빛이 꺼지듯 내 꿈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인간상은 과연 무엇인가?

 

한스 기벤라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어디 하일너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작가는 누누이 학교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저 공부만을 하고 조용히 책이나 보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산품인양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이 사회는 모든 사람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에 비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개성이나 고요의 생활 같은 건 희생되어도 좋다는 뜻이지 않은가. 학교가 그런 곳이다.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사람은 누구나 다른 어떤 곳에 재능을 보이지만 우리는 똑같은 과목을 배우고 그것만이 성공하는 길이라 믿고 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어릴 때는 대단한 천재라고 소문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평범한 아이로 몰락하는 것을 기삿거리로 종종 볼 수 있다. 사람 하나하나의 뛰어난 재능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려면 학교를 자주 빠져야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고 학교에서 평준화된 교육을 받으려고 하면 그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진정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범한 행복을 지닌 평범한 사람, 불우한 인생을 지닌 비범한 천재, 우리는 비범한 천재를 원하지만 이 사회는 인재를 구하면서도 평범한 사람을 원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수레바퀴 아래서는 그런 총명한 한 소년을 둘러싼 환경이 가진 모순을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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