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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탈감정주의postemotionalism라는 새로운 사회학적 개념을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적 이론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대부분의 사회학적 이론화에서 잃어버린 원료가 바로 감정의 역할이다. 나는 오늘날의 서구 사회가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에서는 합성된 유사 감정들이 자신, 타자 그리고 문화산업 전체에 의해 행해지는 광범위한 조작의 토대가 되고 있다. 나는 오늘날의 개인들이 우리의 선조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모더니즘 이론가들에 반대하여 지식은 행위를 낳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행위는 감정과 지성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 그간 탈감정사회에서는 그러한 결합이 끊어져왔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대량의 시뮬레이션과 과거 재생의 시대이며 겉으로 보기에 뿌리 없이 떠도는 허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탈근대적 견해를 활력을 주는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탈근대적인 떠도는 허구들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 뿌리가 없거나 무질서한 것이 아니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적 제약으로부터 인간해방도, 그리고 허무주의도 함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탈감정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속박을 이번에는 세밀하게 가공된 감정들에 도입한다. 내가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며 의지하는 이론가와 이론들은 프로이트와 뒤르켐에서 비판이론가들과 장 보드리야르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에서 광범위하다. 그중에서 몇몇 사회학적 저작과 이론들이 특히 중요하고, 나는 그것들을 탈감정주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배경으로 사용한다. p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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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재판과 심슨 재판 간의 유사점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저질러진 보스니아 무슬림에 대한 대량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우스타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주장에 기초한, 세르비아인이 실제 희생자라는 세르비아인들의 주장에 묻혀버렸다. 심슨 재판에서 살인사건은 노예제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주장에 기초하여, 기소된 살인자가 실제 희생자라는 피고 측 주장에 묻혀버렸다. 1990년대의 많은 다른 사건들도 너무나도 쉽게, 대량학살, 살인, 강간, 부패 등의 보다 전통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탈감정적인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의 문제로 포장되어 소비되었다. 이를테면 미국 하원의원 멜 레이놀즈는 성범죄와 공무집행방해로 5년형을 선고받았을 때,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p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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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 세기말을 괴롭히는 것은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이다. 탈감정적 개념과 함께 나는 새로운 어떤 것, 즉 의지와 관념 간의 투쟁 또는 균형이 아니라 표상 또는 관념으로서의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탈감정주의는 문화산업이 신오웰적, 기계적 석화된 방식으로 죽은 추상화된 감정을 사용하는 것을 지칭한다. 탈감정주의에서 'post'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탈감정post-emotion 또는 감정 이후after-emotion를 포함하여 엔드게임endgame을 지칭한다. 그러나 내가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론적 구성물의 독특한 측면은 감정은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탈감정적이라는 용어 속에서도 '감정적'인 것은 여전히 적실하다는 것이다. 지성화되고 대량생산된 기계적 감정이라는 새로운 혼종이 전 세계를 무대로 하여 출현해왔다. 그렇기에 탈근대세계에는 어떠한 연민이나 동정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보드리야르는 틀렸다. 그와는 반대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동정심 피로'를 호소할 정도로 많은 동정심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빗나간 동정심은 전통시대의 카리타스가 아니라 문화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한, 알맹이가 없는 대체된 동정심-연민에 더 가까운-이다. 카리타스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지만, 연민은 사람들을, 호화로움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을 얕보는 사람들과 절망적인 사람들로 분리하여 격리시킨다. pp65-66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의 양극단과 그것들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입장들이 탈감정적 주장을 이용한다. 보수주의자들의 '그리운 옛날'의 향수는 "정치적으로 옳은" 다인종사회라는 이상화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못지않게 감정적 현실을 조작한다. p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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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지향적 아이가 양육되어온 방식은 좀처럼 '상냥하지' 않았고, 아이의 퍼스낼리티와 성향에 대해 거의 전혀 너그럽지 않았다. 내부지향적인 가정에서 마주치는 비정한 기준들이 학교로 이전되었다. 학교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거의 어떠한 매력도 없는 지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부지향적 교사는 아이로부터 사회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러한 거리는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이지 그의 미소가 얼마나 상냥한가 또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협력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학교제도는 아이에게 가족만큼이나 가혹했다.
그러나 타자지향적 학교에서 아이는 일단의 완전히 새롭고 다른 시도들과 마주한다. 좌석 배치가 더 이상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앉는 장소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우정의 도표 위에 한 아이의 위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단서이다." 다음과 같은 점은 1950년대에 그랬던 것보다도 1990년대에 더욱 사실이다.
[내부지향적인 초등학생이 당연히 그의 침대 밑에 자신의 이야기와 그림을 숨겼다면, ........ 타자지향적인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집단 앞에서 낭독하고 자신의 그림을 벽에 붙인다. 이전 시대에는 종종 기껏해야 소수집단이 공유하는 과외활동이거나 사적인 취미였던 놀이가 이제는 학교활동의 일부가 되어, '현실주의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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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런 새로운 현상을 어린 시절의 맥도날드화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 맥도날드 레스토랑은 또한 앞으로 생일날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을 위해 음식, 케이크, 풍선, 그리고 진행을 맡은 어른 놀이친구를 정액제로 제공할 것이다. 내친 김에 덧붙이면, 이제 어른들도 역시 유람선에서, 여행사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미리 선택된 카드, 풍선, 선물, 꽃 등등을 갖추고 거의 모든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지역마다 설립된 기업에서 그러한 포장된 재미를 이용할 수 있다. 이모든 것들이 실제로 탈감정주의를 제도화하는, 즉 다른 무엇보다도 보다 독특하고 사적이고 개인적이었던 행사인 생일, 결혼식, 기념일, 출산과 같은 전통적 행사과 관련된 감정들을 공장처럼 표준화된 상태로 포장하는 요소들이다. 사회적 삶은 조지 오웰과 헨리 애덤스가 예견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기계를 본따서 만들어졌다.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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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느끼든 간에 '좋았어'라고 대답하기로 되어 있다. 유사하게 지미 카터의 과시적 인권 홍보는 하나의 공식이 되었고, 이는 인권 탄압자들에게 사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던 이전의 정치인들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지미 카터는 라도반 카라드지치와 같은 기소된 전범을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그에게 꽃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이전 시대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던 선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그어졌었고, 사람들은 결코 '나쁜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지 않는다. 분명 타자지향성은 문화적 경계를 가로질러 감정 꼬리표를 쉽게 이전하고 조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왔다. 이것은 우리의 선조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다.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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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지향적 사회들은 구술전통, 신화, 전설, 노래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전달했다. (...) 리즈먼은 내부지향적 아이는 그렇나 이야기들을 주로 혼자 읽는다는 중요한 지적을 한다. 그러나 타자지향적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듣는다. "실제로 공동으로 읽거나 듣지 않을" 때조차 그들은 느낌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람들은 항상 골똘히 생각하는 또래집단이 어디에든 존재하는 것으로 의식한다.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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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요소는 어린이 판타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웅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외로운 영웅은 너무나도 내부지향의 냄새가 나고,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내부지향적 영웅 슈퍼맨은 최근에 죽었고, 만화책 시리즈는 끝났다. 어린이의 새로운 역할 모델들은 바니와 친구들, 십대 닌자 거북이들, 그리고 파워 레인저스이다. 이들 모두는 집단으로 활동하는 개인들이고, 최선을 다하여 관용을 베푼다. p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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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바니와 친구들>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장애물에 의해서도 결코 좌절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배운다. 욕망의 장애물들은 집단의 소원과 함께 마술적으로 사라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의 삶에 부적절하다고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어른들의 역할을 배우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서로를 껴안을 수 있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은 탈감정주의를 배운다. 즉 그들의 사적이고 독특하고 어쩌면 의견을 달리하는 감정들은 집단의 감정에 굴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감정들은 미리 규정되어 있고, 미리 포장되어 있다. <바니와 친구들>에는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탐구할 여지가 전혀 없다. 리즈먼의 표현으로, <바니와 친구들>에는 아이가 자율성의 토대, 즉 사람들이 집단에 어느 정도 순응하거나 아니면 이의를 제기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여지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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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즈먼의 통찰력을 보완하여 덧붙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은 다음과 같다. 소비재로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합리적으로 의도된 의미의 담지자가 아니지만, 이제 표준화된 감정 또한 실어나르고 있다. 게다가 감정 그 자체는 앞서 언급한 베블렌과 리즈먼의 의미에서 정확히 하나의 사치품이다. 이전 시기에 사람들은 감정이 모종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오늘날의 탈감정사회에서 감정과 행위 간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관계는 영원히 절단되었다. 감정은 그 자체로 그 어떤 뚜렷한 목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정이 무익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을 드러냄을 하나의 사치로 삼을 만큼 여유 있는 수준의 위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또래집단에 더욱 증명한다.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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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스니아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봤다. 그리고 인터뷰할 때, 그들은 미디어에 자신들이 느끼는 극도의 혐오감, 이른바 동정심, 공포 및 여타 감정들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대량학살은 수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분명 세계 지도자들이 그것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행위들로 전환되지 않았다. 이렇듯 새로운 동정심은 이제 하나의 사치품, 즉 '동정심 피로'로 귀착되는 소비재가 되었다. 이는 구매한 어떤 것에 싫증나게 되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 오늘날의 탈감정적 유형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영역-국내 영역이든 국제적 영역이든-에서도 전 범위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적절한 행위에 헌신함으로써 그들 감정의 진정성을 입증할 것을 요청받지 않는다. 탈감정적 유형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의 보다 고상한 척하는 타자지향적 유형이 포르노가 성범죄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오늘날의 탈감정적 유형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 오늘날 모든 사람은 감정이 어떠한 부담, 즉 어떠한 행위책임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p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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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일부는 타자지향적 사회에서는 리즈먼의 표현으로 개인이 "그와 그의 재능, 즉 그의 정직성과 기술에 의해서 평가되기보다는 청중에 대한 그의 태도, 즉 그의 태도가 성실한가 아니면 불성실한가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이다. (...) 탈감정사회는 그 발전단계에서 불성실한 성실성, 합성된 정직함, 가장된 솔직함, 겉뿐인 개방성을 높이 평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어떤 사람이 외견상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는 한, 그 사람은 어떠한 진리주장과 관련해서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다. p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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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지향적인 응어리진 분노는 타자지향적 친절함과 동정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는 현대의 분노가 또한 적절한 행위와 연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치스러운 감정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 오늘날 분노를 일으키는 광범위한 현상들을 살펴보자. 레스토랑에서 너무 뜨겁게 제공된 커피, 커피숍의 그리 친절하지 않은 서비스, 대량학살, (...) 특정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 너무나도 많은 세금, 세금이 줄었을 때의 너무나도 적은 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미국이 희생자의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의 뒷면은 미국이 응어리진 분노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pp125
##우리 시대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 있지만, 이 모든 지식이 자율성, 시민들의 식견, 민주주의 또는 관용의 증대에 기여해왔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도리어 다양한 정보 아울렛들이 특정 집단과 영합하여, 이를테면 러시 림보의 프로그램이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하듯이, 이미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견해를 설파한다. 증오가 관용과 나란히 방송된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포르노와 테러용 폭탄 제조법을 나란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뉴스조차 너무나 '중립적'-앞서 논의한 의미에서-이어서, 일반 시민들은 통찰력을 얻기보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정보의 원천에 따라 편견 또는 치우침을 낌새챈다. 따라서 정보는 또 하나의 상품이 되어, '표적 청중'의 성원 여부에 의해 예측할 수 있는 노선을 따라 소비된다. 동일한 것이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p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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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체는 그것이 다른 많은 현상들 중에서도 실증주의, 중립성, 지능지수에 대한 관심, 표준화된 시험, 민족주의에 비한 연방주의, 합리화 등의 경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비감정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20세기는 감정 청소의 세기이다. 심지어 강력한 열정과 증오의 장이 되곤 한 전쟁조차도 추상개념들로 축소되어왔다. (...) 수많은 저자들이 주장해왔듯이, 무관심과 냉소주의 모두는 현시대의 특징들이다. p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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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탈감정주의는 향수화된 전통과 내부지향적 과거로부터 거의 항상 간접적이고 과시적이며 또 소비 대상으로 간주되는 '죽은' 감정들을 이용한다.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변형된다. (...) 나는 간접적 감정, 간접적 분노, 과시적 감정, 과시적 분노, 간적접인 과시적 감정, 간접적인 과시적 분노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p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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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독특하고 불길한 형태의 간접성은 타자지향적인 사람이 현재에 온전히 살 수 없게 하는 형태의 간접성이다. 탈감정적 유형은 현재의 사건을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즉 그것에 자발적 감정을 가지고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또는 그녀는 적절한 감정들을 과거로부터 빌려와서 미래를 위해 시연해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를 위해서도 가공해야만 한다. 과거를 분석하고 쇄신하는 역사적 수정주의의 과정과는 달리, 이것은 글자 그대로 발생기 상태를 수정하는 수정주의이다. 즉 이것은 감정을 또래집단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그 감정이 태어나고 있을 때의 감정을 수정한다. 현세에서 여론형성자들은 사건이 전개되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게다가 텔레비전에는 사건이 발생할 때,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사건을 감정적으로 포장해주는 시사해설가들이 있다. (...) 오늘날 타자지향적 유형은 다른 여론형성자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저런 능력을 가진 여론형성자이다. pp1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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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사회와 내부지향적 사회는 항상 개인에게 충분한 프라이버시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 또는 그녀는 전통과 엄격한 가치들을 따르는 척하면서 그러한 행동들에 대한 순전히 사적이고 진정으로 개인적인 반응의 저장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1950년대에도 타자지향적 유형은 여전히 또래집단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탈출은 봉쇄되었다. 누가 친절하고 행복한 악인에 맞서 저항을 동원할 수 있는가? (마르쿠제가 말하는) 반대 없는 사회에서 집단의 감시는 너무나도 정교화되었고, 카메라가 편재하고, 감정 포장하기가 이미 너무나도 표준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정치인이 되어야만 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여론형성자들을 헤치고 나아가야만 한다. 자율성의 가능성은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리즈먼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타자지향성이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율성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서나 자율형은 질문자들이었고," 질문하기가 타자지향적 사회에서 하나의 규범이기 대문이다. 질문하기는 이제 제도적으로 병리적인 단계에 도달했다. 내가 앞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를 언급하며 제시했듯이, 이 단계에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p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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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사회이론가로서 사회변동이 항상 상대적으로 열려 있고 또 외견상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회체계도 궁극적으로는 혁명이나 반란의 결과 무너지거나 바로 그 자신의 무게에 눌려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탈감정사회 역시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리즈먼(그리고 마르쿠제)에서 찾아낸 가장 중요한 통찰은 또래집단의 탈감정적 권위주의는 '친절하고' 상냥하고 행복하고 관대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유형의 반란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매우 공격적이거나 심지어는 베블렌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가의 지갑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기가 쉬웠다. 그렇다면 누가 '관용'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심지어는 관용이 너그럽지 못할 때조차도 말이다. p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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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비자는 아도르노가 주장했듯이 단지 대중사회의 자동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집단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 일정한 자유를 가진다고 확신하는 하나의 행위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행위자가, 특정한 하위집단적 형태의 감정적 현실과 관련한 광고를 하는 기업의 조작대상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보다 잘 의식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를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현대 광고는 특정 제품에 합성하여 부착시킨 느낌, 분위기, 감정을 판매한다. 특정한 감정적 경험에 대한 소비자의 '충성'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 수십억 달러가 소모된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철저한 개인주의 감정을 이를테면 말보로 맨과 결부시키거나 또는 맥도날드가 자신의 놀이터와 해피밀을 통해 조장하는 가족생활의 행복감과 결부시키면서 스스로를 조작당하도록 놔둔다. (...) 이것은 아도르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너무나도 행복해서 자신들이 조작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p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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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은 많은 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체는 좋은 사회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 그 까닭은 자본주의가 근대성 1과 연관된 합리적 현상임은 물론 탐욕, 아노미, 과시적 소비와 같은 근대성 2와 연관된 비합리적 현상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 즉 서구는 결코 '순수한' 민주주의를 가진 적이 없다. 모든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역사는 인종차별주의, 불평등, 억압 및 여타 비민주적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서구는 인위적으로 고안된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나라들에 판매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 그들은 미국화와 서구화를 문화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태로 인식하고 미국 혐오와 서구 혐오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것은 옛 소련에서 특히 사실이지만, 많은 서유럽 나라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p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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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문명사회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세련된 매너를 보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냉정하게 주시하는 것은 고통을 직접 가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 부도덕할 뿐이다. 따라서 문명은 오늘날에 자주 그 실체를 드러내듯이 실제로는 제조된 가짜 문명이다. p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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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 토플러와 하이디 토플러에 따르면, 정보네트워크는 국민국가를 우회하여 코스모폴리탄 상호작용자 공동체를 창출할 것이다. 즉 "국가는 쇠퇴하고 지식이 승리할 것이다." 이 예언의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른바 인터넷 사용자 공동체는 실제의 공동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의 상호작용에 마음대로 들어가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제 공동체에서 그러한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 20세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국가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민족주의는 아마도 오늘날 세계에서 갖아 강력한 사회적 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p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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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감정주의는 진정성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탈감정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제공되는 가짜는 모든 수준에서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박에 없다.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내밀한 성적 비밀로 보이는 것을 털어놓지만, 시청자들은 마음속으로 그러한 숨김없이 털어놓는 이야기가 돌아가는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느낀다. (...) 일단 개인들이 사적 영역에서 개인적 상실에 대해 반응하자마자 곧바로 슬픔과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자주 생방송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전세계로 방송된다. 그러나 이러한 겉으로 보기에 진심에서 우러나와 털어놓은 명백한 진정성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것들 중의 일부가 바로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이다. p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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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적어도 돈, 엠블럼, 유명 인사, 날짜, 전쟁, 장소, 관념에 여전히 전염성 있는 신성함을 부여함으로써, 전통사회의 집합적인 감정적 흥분을 여전히 모방하고자 한다. (...) 현대 록 스타와 텔레비전 유명 인사들은 탈감정사회에서 신이 되었다. p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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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오늘날 예기치 않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적 힘으로 출현했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국제주의 또는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이어지지 않는 종류의 민족주의의다. 반대로 그것은 오늘날 보호무역주의정책, 강력한 반이주법, 인종청소, 쇼비니즘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뒤르켐식으로 추론해볼 때,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상징이 탈분화되고 그리하여 인간이 사회적 감상의 통합기능을 빼앗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p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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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혁명의 역풍으로 이제 어느 것도 더 이상 신성한 것이 아니다. (...) 실제로 오늘날 아이들이 '저속한' 또는 금지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린이 프로그램과 디즈니 채널과 같은 어린이 채널들도 '저속한' 단어들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성인세계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신비한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AIDS, 코카인 복용, 콘돔 등과 같이 그들에게 이용이 금지되었던 성인 주제들에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더 이상 신성한 것은 없다"라는 흔히 듣는 표현은 중요한 진실의 맹아를 담고 있다. 탈신성화의 옹호자들은 이전에 금지되었던 말, 장소, 보기, 소리 및 여타 현상들을 거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서구가 더욱 민주적이게 되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 민주화의 이면에서 그것은 사회세계에서 신성한 것 그리하여 감정을 제거해왔다. 점점 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보드리야르가 "나는 그것을 했다"라고 표현한 탈감정뿐이다. 나는 앨라모 요새에 갔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매춘부들을 보았다, 나는 사라예보에서 살아남았다 등등. p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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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르켐에 따르면, "열렬한 숭배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죽은 과거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에서 그리고 이 책 도처에서 탈감정적 유형이 재생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죽은 과거에 점점 더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뒤르켐은 또한 믿음이 무엇보다도 행위의 추동력이라고 주장했다. (...) 탈감정적 유형은 냉소적이다. 특 탈감정적 유형은 믿음의 능력을 상실했다. 타자지향적 유형이 직면하는 선택지를 은하수라고 표현한 리즈먼의 은유를 다시 언급하면서,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즉 탈산업적 하늘에는 너무나도 많은 대안, 선택지, 해설들-이것들 모두는 폭로되고 해체되고 탈분화될 수 있다-이 존재해서 탈감정적 유형은 자신들이 내린 행위결정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서방이 보스니아에서의 살육을 막을 조치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현상들에서 이러한 믿음의 상실을 감지한다. p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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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의 순진무구함으로 미국의 전반적인 낙관적 분위기, 한때 미국을 무적의 국가로 인식한 일종의 과도한 자만심, 편협한 독선주의,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과신을 들 수 있다. (...)
그러나 탈순진무구한 1990년대의 미국은 달라졌다. 미국인들이 냉전시대 동안 소련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1950년대보다 훨씬 더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세계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모든 지식은 단지 그들에게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보이는 것에 대처하는 데 자신들이 무력하다고 느끼게 할 뿐이다. p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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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또 다른 새로운 논점은 죽음이 세속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세속적이 된 것이라는 용어는 뒤르켐이 세속적인 것의 개념에 의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을 의미한다. 즉 죽음은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다시 말해 그것을 신성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곤 했던 의례와 집합적 흥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상적 경험의 재료가 되었다. (...)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아이들이 더 이상 죽음을 하나의 미스터리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텔레비전은 이제 일정 정도 시체보관소의 시뮬레이션이 되었다. 죽음이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비위 상함, 불쾌감,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특히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뒤따르는 분노와 슬픔과 같은 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집합적 흥분과 집합적 의례 없이, 현대인들은 주로 사적인 탈감정적인 슬픔, 분노, 전율을 경험한다. 이러한 탈감정들은 탈감정적 유형의 일상생활들로 빠르게 흡수된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현 세기 말에 죽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죽음의 평범함이다. pp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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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죽음에 대해 인간처럼 이렇게 독특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시체의 냄새를 맡아보고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거나 그것이 동족의 일원이라면 외면하고 떠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간들은 죽음을 집합의식에 대한 모욕으로, 그리고 장례식을 통해 멸해야만 하는 신성모독으로 인지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바라본다. (...)
이러한 이유에서 전통사회는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신화에 동참해왔다. "최종결정권은 삶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즉 망자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평화로운 인간사회로 이러저러한 형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죽음은 빠르게 무감각한 사실이 되고 있다. 모든 인간의 죽음이 너무나도 자주 마치 동물의 죽음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
전통사회에서 장례식은 장기간에 걸쳐 정성껏 치러졌고, 때로는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 죽음이라는 종국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탈감정사회는 죽음을 맥도날드화했다. 이제 장례식은 빠르고 효과적이고 합리적이다. (...) 효율성과 표준화의 미국식 구현으로서의 맥도날드화는 죽음의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
그러나 탈감정사회는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한 사회들은 대부분 전통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죽음과 관련된 신화적 믿음이나 의례에 더 이상 동의를 표하지 않는다. 집합의식은 약하고 그 성원들의 죽음에 상당히 무관심하다. 애도과정은 실제로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프로이트의 표현으로 최종적 카타르시스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전통사회와 대조적으로 격정적 슬픔을 위한 감정적 공간을 그리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감정사회에서는 죽음이 삶을 이겨왔다. 이것이 바로 탈감정적 유형이 삶의 시뮬레이션뿐만 아니라 죽음의 시뮬레이션에 사로잡혀 있는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집합적 '반복충동', 즉 프로이트의 무기고에 있는 카타르시스 형태들 중에서 가장 무력하고 절망적인 형태이다. pp24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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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감정사회는 오직 인종적으로만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성적 선호, 생활양식, 그리고 무수한 또 다른 집단동일시에 의해서도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사회적 통일성을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감정사회는 기계 숭배의 확장이며, 따라서 감정은 맥도날드화되고, 무정해지고, 판에 박힌 것이 되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왔다. 기계화는 그것의 제국주의적 영역을 기술과 산업으로부터 확장하여 자연의 마지막 요새, 즉 감정을 식민화해왔다. 이전 세기의 전환기의 많은 저술가들이 그러한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예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것의 결과를 분명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순탄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작용 속에서 탈감정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pp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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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현시대에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3의 힘이 정치적 우파뿐만 아니라 정치적 좌파와 관련하여 공중이 광범하게 드러내는 냉소주의에 의해 창출된 공백을 서서히 거의 감지할 수 없게, 그러나 꾸준히 메워가고 있다. 그 힘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족주의의 출현은 마틴 루터 킹 2세 이후 인종관계가 호전되고 있다고 가정해온 많은 분석가들을 놀라게 했다. 영국에서 유럽통합은,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합적인 감정적 욕구가 영국에서보다 유럽연합에서 더 잘 충족된다는 거을 깨달았을 때,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부활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캐나다 사람들은 퀘벡 민족주의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최근 거의 분리된 퀘벡은 그들에게 현대 캐나다조차 발칸화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이미 다소 길게 논의해왔기에 더 이상 어떠한 논평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서구 세계 전역에 걸친 예기치 않은 민족주의의 분출이 탈감정주의에 맞서는 실제적 저항전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이 탈감정주의에 저항하는 데서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 역시 기계화, 맥도날드화된 민족주의가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문제이다. p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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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악하면, 탈감정주의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실례를 찾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행복한 의식은 대립 없는 사회를 낳기 때문이다. '멋지게' 포장된 어떤 것에 대항하여 효과적인 반대가 동원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리 포장된 탈감정들은 겉치레라는 인상을 준다. p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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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헌신은 전통적 또는 내부지향적 확신, 열정, 강직함을 전제로 한다. 이전 세대가 주장한 이러한 덕목(또는 악)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현대사회는 많은 관점과 많은 가능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 가공된 감정, 유연성을 조장한다. 따라서 헌신은 탈감정적 유형이 모방하는 또 다른 현상이 된다. p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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