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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by 릴라~ 2018. 12. 3.

대선 끝나고 내게 개새끼가 된 학자. 지우려다 내 독서 기록이라 놔둔다.
철학자는 혁명가고 문명의 깃발이라면서 본인은 어디 가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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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을 당하고도 복수를 생각하지 않거나 시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민족이 있다면 아마도 온전한 정신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복수의 결기도 없이 무조건적인 화해나 평화를 들먹인다면, 이는 나약함의 표시일 뿐입니다. 복수는 극복이고 자기 회복의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복수의 결기가 없는 민족은 피해를 가한 상대를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것으로만 세월을 보냅니다. 이러다 보면, 가해자의 장점을 배워서 일단 자신의 힘을 기르려는 노력이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시작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민족은 저주나 원망에만 머무르지 않고 패배의 근원을 탐색하고 조용히 힘을 길러 최소한 다시는 이런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자세에서라야 진정한 용서와 평화도 가능해집니다.

조선의 역사에도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당한 치욕은 적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임진왜란을 민족적 치욕이라고 말합니다. 침략한 일본을 나쁘다고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맞습니다. 치욕을 당한 후 어찌 증오심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치욕으로만 여기고 또 일본을 증오하기만 했습니다. 지금껏 그 치욕을 되갚아주려는 장기적이고 차분한 준비는 없었습니다. 저는 임진왜란을 당한 것도 치욕이지만, 더 큰 치욕은 이것을 되갚아줄 어떠한 시도도 구체적으로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상 복수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묻는 더 큰 치욕이어야 합니다. p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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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비독립적이라고 말할 때, 제3세계 종속이론 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방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왔거나 살고 있는 삶의 대부분이 '따라하기'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종속성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생각의 차원에서 종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종속적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함을 앞으로는 계속 가지고 살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종속적인 이 단계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단계로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번 해볼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높인 가장 핵심적인 사명입니다. 이 심각한 사명을 우리가 완수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우리의 삶을 철학적 차원으로 상승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의 독립, 이 이상의 자유, 이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p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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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민한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 할 주제입니다. (...)

우리가 흔히 아는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 산 사람들입니다. 노자도 공자도 칸트도 헤겔도 모두 '자기처럼' 산 사람들일 뿐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계에 철학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들은 칸트를 배우면 칸트처럼, 노자를 좋아하면 노자처럼, 공자를 좋아하면 공자처럼 살아보려고 합니다. pp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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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시선은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룹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지성적 활동이기 때문에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파악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다른 흐름을 제공하기도 하고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관도 근대를 수학적이고 양적이며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을 인도했습니다. 포이에르바하의 '물질'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그렇습니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관념'적 범주들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했죠. 공자나 노자가 말한 '도'라는 철학적인 '범주'도 세상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끌고 가는 역할을 했고요.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바꿉니다. 아니면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세계를 철학적 시선이 가장 앞서 포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든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높은 차원에서 먼저 인지하든, 어느 쪽이든지 간에 철학은 적어도 우리에게 세계의 변화 자체를 인지시키고 거기에 반응하도록 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혁명가이며 문명의 깃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입니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하는 삶이지요. 판 자체를 보기 때무에 새판을 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삶은 변화의 맥락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능력이 떨어져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생산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잇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는 말로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 지성의 극처 가운데 한곳에 철학이 있다는 말입니다. pp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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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매우 반성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철학 생산국이 아니라 철학 수입국입니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이지요.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은 삶의 기본 원칙들을 수입한다는 것으로 결국 종속성을 드러냅니다. 즉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가 산업에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종속적인 산업 구조를 갖게 하지요. 결국 사유의 종속성으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창의적 결과들을 따라하기만 하는 것, 이것이 철학 수입국인 한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철학 생산국들은 좀 다릅니다. 밖에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독립적 사유라고 합니다. 이 독립적인 사유의 터전은 외부에 이미 있는 사유의 내용일 수가 없습니다. 대신 바로 자기가 처한 당장의 세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사유는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 속, 역사적인 세계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사유의 뿌리를 그들이 처한 세계 그 자체에 두는 것이지요.

철학 생산국들은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구성합니다. 플라톤도 그랬고, 헤겔도 그랬고, 마르크스도 그랬고, 니체도 그랬습니다. 공자도 그랬고, 노자도 그랬고, 주자도 그랬으며, 양명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모두 그들의 시대에서 태어납니다.

이와 달리 철학 수입국들은 그 구성된 내용을 수용하기 때문에, 기성품으로서의 이론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세계를 거기에 맞추려고 합니다. 진리의 터전은 구체적인 세계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만들어진 이론을 진리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철학적인 이론을 꽃피우지 못하고,수입된 철학 이론으로 자신의 세계를 관리하려 덤비는 것입니다. 그러니 효율성 면에서 생산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 이렇듯 한쪽은 효율적으로 전진하고, 다른 한쪽은 비효율성을 계속 쌓아가다 보니 어떻게 해도 차이가 좁혀지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립니다.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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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대답과 질문은 다른 두 기능으로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다른 두 행위입니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입니다.

질문-독립적 주체-궁금증과 호기심-상상력과 창의성-시대에 대한 책임성-관념적 포착-장르-선도력-선진국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사실 질문이 성한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모험, 도전, 탐험, 개척 등등도 모두 질문 주변에서 함께 작동되는 것들입니다. 대답에만 빠져 있고 질문이 귀한 나라는 후진국이거나 중진국입니다. 대답은 과거에 머물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독립적 주체성을 갖는 '질문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책임성이 자신에게 있으니 시민의식도 더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p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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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시민이란 독립적 주체성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로 책임성 있게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비율이 많아지면 당연히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독립적 주체성보다는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가치에 자기 자시을 더 의탁하면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길이 막히죠.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선진국 수준의 삶을 만드는 선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장르'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장르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질문'의 힘을 내면화하는 시민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p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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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젱는 지금부터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벌써 정체가 시작되었고 또 모든 분야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후퇴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한계를 느끼거나 정체되어 있다면, 문제는 분명합니다. 그 나라를 끌고 갈 꿈과 이상이 설정되지 못했거나 설령 설정되었다고 해도 현실적인 요구와 일치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선 이상을 설정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건국-산업화-민주화 단계까지는 순조롭게 왔는데, 민주화 다음 단계의 목표 설정에는 아직까지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다음 단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진화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차원의 시선이 주도권을 발휘하는 단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진화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과업에서 아직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먼저 그것 자체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버거운 일인 것입니다. 건국이나 산업화나 민주화는 과제 자체가 눈에 보이고 매우 구체적입니다. 선진국들이 이미 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쉽게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죠. '따라하기' 단계의 일이기 때문이죠. (...)

그런데 선진화는 목표 자체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기 어렵습니다. 선진화라는 것이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시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선도력을 형성하는 일이고 세계의 흐름을 관념의 높이에서 포착하는 일입니다. p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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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계속 이야기했듯이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시대의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서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한 것입니다. 특정한 내용의 철학이 생산되는 시점에서는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이 하나의 맥락 아래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수입도리 때는 그 시대적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들어옵니다. (...)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일은 누군가의 전도사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탈레스나 베이컨의 예에서 보았듯이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정해진 것들과 결별하는 독립적인 자세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고, 문명의 깃발이 되는 일이고, 인간에게 새 빛을 끌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앞선 것을 숙지하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구체적 현실로서의 시대라는 터전에서 독립적인 사유를 발동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해버리고 제한해버리는 확정적인 이론보다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시대의 구체성에 집중할 때, 시선을 비로소 앞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앞선 철학자들은 모두 다 이렇게 했습니다.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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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입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꿈을 대신 꾸어주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없습니다. 꿈은 나만의 고유한 동력에서 생겨납니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근원적으로 발동해서 생산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꿈을 꿀 때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재합니다. 이때는 내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옹골찬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차돌처럼 존재합니다. 자기가 바로 참여자이자 행위자가 됩니다. 비평가나 비판가로 비켜나 있지 않습니다. 구경꾼으로 살지 않습니다. (...)

지금 우리에게는 일류 비평가나 일류 분석가보다는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이들의 적극적인 차여가 필요합니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말이죠. p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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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 잘 살고 있는지, 독립적 주체로 제대로 서 있는지, 누군가의 대행자가 아니라 '나'로 살고 있는지,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는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높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확인하면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껍데기입니다. p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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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로 등장하는 조짐과 신호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나 사회에는 반드시 예민함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예민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대응할 수 있고, 먼저 대응하니 앞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반응하는 예민함에서 차이가 납니다.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도 사실은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예민함의 차이입니다. 근대화(서구화) 물결이 시작되자마자 그 조짐을 읽고 빨리 대처한 일본과 느리게 반응한 조선의 차이죠.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쓴 박훈 교수는 그 책 안에서 서양의 외압에 반응하는 일본의 태도를 '과장된 위기의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강제개항 등과 같은 일련의 압력에 대하여 일본이 실제 내용보다 훨씬 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민함이 좀 떨어진 문화권의 사람들 눈에는 항상 제국이나 선진국의 예민함이 좀 호들갑스러운 것으로 보이거나 공연히 지나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항상 사태가 발생해야만 그때부터 대응하기 시작하는 특징적인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에서는 '늑장대처' '땜질처방' '대증요법'과 같은 한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항상 선제적 대응에 실패하고 사태가 발생해야만 움직이는 습성 때문입니다. 이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개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당연히 예민함을 발휘해본 적이 없고,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습성입니다. pp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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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가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매우 두드러집니다. 우리가 보통 개별적 주체들의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래서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인 경우가 많죠. 이런 주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공동체는 주체들의 자발성이 발휘되기 힘들어 사회가 경색되기 쉽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문명의 진행 방향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반응할 수 없게 되어 종속성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종속성을 벗어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도력이나 선진성이나 창의성 등은 바로 종속성을 벗어나는 데서만 꽃필 수 있습니다. 종속성을 벗어나는 일은 의식 있는 개별자가 역사적 책임성을 회복해야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독립적으로 시대의식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자신만의 능력으로 세상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p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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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탁월한 인간은 항상 '다음'이나 '너머'를 꿈꿉니다. 우리가 '독립'을 강조하는 이유도 '독립'만이 '다음'이나 '너머'로 넘어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머'나 '다음'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죠. 그 불안이 힘들어서 편안함을 선택하면, 절대로 '다음'이나 '너머'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p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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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고적 기풍을 벗어나서 창의적 기풍을 세운다는 것은 이렇듯 지적인 게으름을 벗어나 지적인 부지런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관찰, 통찰, 사유의 집요함 같은 부지런함이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와 사회를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기풍으로 채우는 일은 결국 나와 사회를 인격적으로 성숙시키는 일이며 또한 인격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지식의 습득보다 인격적 성숙은 난이도가 훨씬 높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난이도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는 것도 선진국으로 올라서도록 해주는 대부분의 조건이 인격적 차원의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입니다. 창의성은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토양에서 튀어나오는것이죠. 이것이 바로 삶의 깊이와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p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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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진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 구도 속으로 들어가는 한, 우리는 그 경쟁이 벌어지는 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새로움, 고유함, 선도력은 시도되지 못합니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경쟁 구도 속에서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행복하지 앟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경쟁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두 행복할 수없는 이유입니다. p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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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높이를 가진 자는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지 않습니다. 자기를 이기려 하지 타인을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경쟁 구도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경쟁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구도 자체를 지배하거나 장악합니다. 자기 게임을 할 뿐입니다. 태연자약한 태도로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애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멸함으로써 승리자의 지위를 오래 유지합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일등보다는 일류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일등은 판을 지키는 사람이고, 일류는 새판을 짜는 사람이죠. 우리가 따라하고 부러워하는 바로 그 단계입니다. 짜여진 판 안에서 사는 데 만족하는 나라는 전술적 차원에 머무르고, 판을 짜보려고 몸부림치는 나라는 전략적 차원으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이 전략적 차원에서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독립과 창의를 맛볼 수 있습니다. p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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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지성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그것이 담고는 있지만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을 궁금해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지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성적이면 질문을 하지만, 덜 지성적이면 고작 대답하는 일에 그치게 됩니다. 안전, 준비, 그리고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덜 지성적이기 때문입니다. (...)

안전, 준비, 훈련,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이나 사유가 지성적인 차원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양, 인문, 철학, 문화, 선진 그리고 선도적인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난이도가 높은 것입니다. p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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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실상 안전, 준비, 훈련, 선진, 상상, 창의, 선도, 관념의 포착, 장르의 창조, 지성, 문화, 예술, 철학적 시선, 시적 상상력, 독서 습관, 박물관이나 갤러리 가는 취미, 예민함 등등은 모두 같은 높이에 있습니다. 단어만 다를 뿐 이것들의 작동과 실행은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회사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안전의식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그 회사는 반드시 상상력도 부족할 것입니다.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는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는 반드시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도 함께 부족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p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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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낡고 병들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직장인으로만 존재합니다. 군인도 영혼이 빠지면 직장인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면 국방에 대한 민감성이나 예민함도 사라져 경계가 느슨해지고, 심지어는 부패하게 됩니다. 이렇듯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에는 부패가 만연하고 생기가 없습니다.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는 급격히 쇠퇴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직'을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돈 몇 푼에 영혼을 쉽게 팔지 않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몰입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p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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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질문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될 것 같은가요, 저렇게 될 것 같은가요?'
이런 식의 질문에는 자기 주도권이 양보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식의 질문보다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라는 식의 질문이 더 질문다워 보입니다. 질문에는 반드시 '자기 관찰'과 '자기 의도'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도권 없는 질문이 계속 반복된다면 자기 주체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을 할 때도 이 세계를 객관화시켜서 제3자 입장에서 말하기보다는 나의 입장을 부각시켜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혹은 '나의 관점은 어떠하다'라는 의지를 선행시키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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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어떤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할 때 그 공부 대상이나 연구 대상이 가지고 있는 방식이나 체계가 나한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진실한 나의 마음 상태 혹은 심리 상태가 오히려 더 그것을 정확히 보고 새롭게 보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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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에서 얻은건데 좌우지간 자신한테만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돌지는 모르지만 해석되지 않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입니다. 절차나 순서나 내용을 정확히 인식하려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 자신을 직접 내던지는 일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세계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는 하지 않으면서, 세계에 내던져진다면 언제쯤 나올 수 있는가, 자신을 세계에 내던지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꼭 내던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만 따지는 데 많은 시간을 씁니다. 세월을 이렇게 보내지는 마십시오. 행위 다음의 절차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무엇인가를 하십시오. 실행하지 않고 궁리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저멀리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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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는 자신의 꿈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가족과의 조화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일을 시작한 인물이 있던가요? 그분들은 그분들의 지성의 높이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려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논의의 완결성을 추구한다든지 합리성을 추구한다든지 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혹시 자기가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지나친 고려가 시작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울퉁불퉁한 삶, 새로운 삶, 고유한 삶을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자기를 발휘하고 표출하는 일을 하면서 주변을 너무 자주, 너무 깊게 고려하는 것은 매우 점잖아 보이지만 실은 별로 필요 없는 일들로 보입니다. 큰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p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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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본 나라는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대응할 줄 알기 때문에 계속 전진할 수 있지만,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보지 않은 나라는 계속해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변화하는 세계에다 억지로 적용하니까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전진이 더디거나 아예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자아를 성숙시킨다, 자아를 독립시킨다는 말은 사건 B를 마주할 때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이론) A'로부터 이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에서 이탈해서 B를 A'로 보지 않고 B'를 생산하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개인의 성숙, 지적 성장, 독립, 이런 것들은 그것 자체가 이미 사회적 진보와 관련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립적 주체가 발휘하는 인문적 용기는 문명이나 국가나 사회나 인간이나 인류의 방향과 관련되는 일이므로 이미 사회적입니다. 성숙한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성숙을 통해서 이미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pp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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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주체성을 갖는 것이 분명 우리를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끌고 갈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 자유스럽게 하는 것이라면, 이제 각자의 혁명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자기가 자기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하는 자기 결정의 문제인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나라의 집단적인 성향이 개인의 독립적 주체로의 성장을 방해할 정도로 아직도 그렇게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혹시라도 집단적 성향이 너무 강해서 독립적 주체로의 성장이 방해받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상을 탓하면서 살아왔던 방식에 순종하며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자기 삶을 통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습니다. 또 반드시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pp315




sheshe.tistory.com/974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최진석 ㅡ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다

## 한편, '문文'이라는 글자를 봅시다. '문'은 원래 무늬라는 뜻입니다. 우리 옷에 무늬가 그려져 있지요. 그것을 '문', 즉 문양이라고 합니다. 무늬는 누가 그립니까? 인간이 그려요. 그럼 '인문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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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she.tistory.com/975

경계에 흐르다 | 최진석 ㅡ 고전은 자기 자신으로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물

##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다면 이미 무늬도 아니다. 예술가의 고뇌는 여기서 시작된다. 즉 '이 무늬'에서 '저 무늬'로 이동하는 인간(문명)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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