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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철학, 심리

경계에 흐르다 | 최진석 ㅡ 고전은 자기 자신으로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물

by 릴라~ 2018. 12. 2.

  대선 끝나고 내게 개새끼가 된 학자. 지우려다 내 독서 기록이라 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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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다면 이미 무늬도 아니다. 예술가의 고뇌는 여기서 시작된다. 즉 '이 무늬'에서 '저 무늬'로 이동하는 인간(문명)을 포착하다가 '이곳'에 있는 자신이 '저곳'을 봐 버린 것이다. 이곳과 저곳 사이에 걸쳐져 있는 자신은 분열을 겪는다.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이곳에 저항하는 모습이다. 익숙한 '이곳'에 대한 배반이며 변신이다. 혁명가와 예술가가 중첩되는 지점이다. (...)

예술가여! 예술의 정신은 '먼저 보는 일'에 있음을 기억하자. 먼저 보는 일은 익숙한 자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 저항의 힘을 잃고, 저항했던 기억의 지배를 받는다면 당신은 이제 예술가가 아니다.

잭슨 폴락의 그림에서는 폴락 사후 25년이 지난 후에나 체계적으로 발표된 프랙탈 이론이 발견되고, 반 고흐의 몇몇 그림에서는 50년 후에 발표될 유체역학의 '콜모고로프 척도'가 구현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본 사람은 남몰래 봐 버린 그것을 '갑자기' 드러낸다. 예술의 힘이다. p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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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이 써놓은 것이다. 나의 '읽기'는 타인의 '쓰기'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에는 '쓰기'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읽기'가 '읽기'만으로 있고, '쓰기'가 '쓰기'만으로 있지 않다. 어디 '읽기'와 '쓰기'만 그러하겠는가. 모든 일이 그러하다. '쓰기'와 '읽기'는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기실은 하나의 사건이자 하나의 동작이다. 동시적 사건의 다른 두 얼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읽기'의 과정에는 반드시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 있어야 한다. 들어오는 일은 나가기 위해서고, 나가는 일은 들어오기 위해서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를 못하거나, 나갔다가 돌아오지를 못한다면 '생명'으로 승화될 수 없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한편에 말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성장이나 변화는 바라지도 못한다.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주체는 들어오기만 하거나 나가기만 하지 않고 부단히 들락거릴 수 있다. 들락거리면서라야 주체는 무럭무럭 자란다.

'읽기'와 '쓰기'는 하나의 활동이다.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야 '읽기'는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된다. 옥수수의 생명이 되었던 물방울이 긴 여정 후에 승천하여 다시 지상에 강림하듯이 하강과 상승을 하나의 사건으로 품은 물방울만이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과 같다.

'읽기'와 '쓰기'를 하나의 활동으로 내장할 수 있는 주체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말한다. 독립적 주체는 '읽기'를 사명감으로 하거나 기억하기 위해서 하지 않고, 우선 재미로 혹은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주장하기 위해서 읽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읽을 것이다. p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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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통해 저자의 세계로 초대 받아서 저자와 저자의 세계를 탐구하지만, 이 초대의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은 저자와 대화하는 일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저자와 대화하고 있는 자기를 만나는 일이다. 읽는 일 자체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바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읽기와 쓰기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p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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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일에서는 감탄과 수긍도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쾌락이 드러나야 한다. 쾌락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큰 진동이다. 읽기를 통해서 지향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쾌락을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쓰기로 확장된다. 자기가 '운동', 즉 움직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한다. 이 변화는 나에게 구체적인 행복, 구체적인 자유, 구체적인 생기를 선사할 것이다. 또한 나에게 겸손과 아량, 평화와 유대를 안겨 주며, 결국 자기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p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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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존경받는 수많은 고전 가운데 어느 한 권이라도 자신 이외의 누구처럼 살다가 나온 것이 있겠는가. 플라톤은 플라톤 자신처럼 살다가 '국가론'을 남겼고, 노자도 공자도 다 각자 자기 자신처럼 살다가 '국가론'을 남겼고, 노자도 공자도 다 각자 자기 자신으로만 살다가 '도덕경'과 '논어'를 남겼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도 오직 자기처럼만 산 사람이다. 그 결과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인류의 빛으로 세워 놓았다.

이제 알겠다. 위대한 고전들은 다 자기 자신처럼 산 사람들이 남긴 결과라는 것을. 그렇다면 위대함은 다 자기 자신으로만 산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알겠다. 고전을 생산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만 살았는데, 고전을 존숭하는 자들은 그 고전을 따라 살려 한다. 자신으로부타 나온 것만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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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내용이나 '인문'의 내용을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그것들이 그들 삶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인데, 수입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고상하고 초월적이며 순수한 보편성을 갖춘 구조물로 둔갑한다. '전략'이 '진리'화 해버리는 것이다. 한 번 주도권을 놓치면 회복하기 힘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자들은 이미 지난 것으로 치부하고 버린 '전략'마저도 '진리의 이념'으로 숭앙하면서 '이념'적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 전체를 비효율로 끌고 가는 그 잘난 사람들은 '미학'도 '정치'임을 알 리가 없다.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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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겠다. 지성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갇힌 생각을 '우리'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있던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곳에서 안 보이고 만져지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가려고 몸부림을 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있는 익숙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과감히 이탈하여 아직 열리지 않은 어색한 곳으로 건너가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 지성인의 율동이다. p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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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기다림이 있다. 단 한 명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도 나 자신에게 그 정도로 정련된 나를 만나게 해주려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세계를 감동시켜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그 꿈이 자기가 되지 않은 사람, 꿈이 머리와 입에만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절대 이룰 수 없다. 시대의식을 장악하고 헌신하는 사람, 지적인 삶을 거기에 바치려는 사람은 시대의식이 곧 자기가 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힘, 여분의 것과 잉여의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남는 자신만의 고유한 동력을 덕德이라고 한다. p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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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인문이 사회를 운영하는 기틀이 될 때 그 나라는 비로소 창의적 역동성으로 무장하는 선도적 길을 갈 수 있다. 선도적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문화적 활동은 오롯이 문자에 담긴다. 문화적 역량을 결집하고 문명의 방향에 대한 미래적 비전을 독립적으로 세울 수 있는 큰 희망은 그들이 소유하고 운용하는 문자를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 독립은 결국 문자의 독립으로 완성된다. 과한 비약이라 하지 말자. 인문적 높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최종적 의미에서 문자를 지배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배자다. 문자를 지배하는 사람은 시대의 문법을 지배하는 사람이니 곧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사람이고, 이념을 생산하는 사람이고, 기준을 형성하는 사람이고, 빛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시대정신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 하지 않고, 이념이나 기준을 수입하려고만 하지 않고, 다른 곳의 빛을 내 빛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창의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다. 완벽하지도 않다. 창의와 완벽과 지도적 반열에서 움직이고 싶어하면서도 외부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착각한다면, 이는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더 엄중하게 봐야 할 일은 흉내내기에 익숙해져 보리면 자신을 스스로 응시하는 능력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일류 국가로 상승하려면 독립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원초적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 원초적 조건이 바로 우리의 문자, 즉 한글이다. 한글이라는 우리만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때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제대로 한번 살아볼 수 있을 것이다. p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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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누기를 할라치면 수만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시를 가지고도 나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범박하게 보자면 사람은 시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크다. 시를 읽더라도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감행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또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육화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 육화의 길에는 바로 외우기가 한 자리 차지한다.

이리하여 사람은 다시 시를 외우는 사람과 외우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시를 외우면 시인이 시를 타고 침투해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더 커져서 시를 지배할 수 있다. 시의 석양 같은 운명이다. 내가 외운 시로 시인이 내 안에서 영역을 확대하기보다는, 시인 몰래 내가 자라 버린다. 무엇보다도 시를 지배하는 인간이 가장 상급이다. p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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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호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위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중진국 트랩에 갇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목표를 합의 도출하지 못하고 남 탓만 하며 분열적 대결로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성숙한 시민계급이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으로 무장하여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어나가는 나라다. 그런데 이 책임성은 시민적 수준에서 나온 책임성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사회적 책임성을 드러내며 정치 활동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주체적 자발성에서 발휘되는 책임성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이념에 대한 맹목적 신봉에서 나오는 책임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이런 책임성은 주체적 자각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시민의 책임성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에 근거하는 매우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책임성일 뿐이다. 이런 정도의 책임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높이가 바로 중진국이다.
(...)

시민적 책임성을 가진 사람은 제3자적 입장에서 비판만 하지 않고, 직접 행위자로 등장하려 애쓴다. 청탁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자신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는 절대 청탁을 하지 않거나 청탁을 거부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춘다. 끼리끼리 문화를 비판하기 전에 동문회나 지역의 암묵적 정서를 이겨낸다. 앞차가 끼어들려고 방향 표시등을 깜박이면 오히려 속력을 높여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준다. 우리 사회가 너무 성공지향적이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는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한국 사회가 이웃간에 정이 사라지고 각박해진다고 비판하기 전에 엘리베이터에서나 길에서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책을 읽지 않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책을 읽는다.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학습 습관ㅇ르 기른다. 학연, 혈연, 지연에 좌우되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하기 전에 자기가 승진하고 싶을 때 학연, 혈연, 지연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남의 불통을 탓하기 전에 불통하는 자신부터 반성한다.

매우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결론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성숙한 시민계급의 성장 없이는 위기 돌파가 불가능하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우선 시민적인 교양을 갖추는 일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p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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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 | 최진석 ㅡ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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