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끝나고 내게 개새끼가 된 학자. 지우려다 내 독서 기록이라 놔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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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文'이라는 글자를 봅시다. '문'은 원래 무늬라는 뜻입니다. 우리 옷에 무늬가 그려져 있지요. 그것을 '문', 즉 문양이라고 합니다. 무늬는 누가 그립니까? 인간이 그려요. 그럼 '인문人文'은 뭐냐?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냥 들쑥날쑥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큰 무늬, 커다란 결 위에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다르고 개성이 있지만 이 다른 개성 모두 다 한 결, 한 무늬 속에서 움직이는 다름일 뿐이에요. p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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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이전 사람들에게 인간이 존재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었어요? 신에게 있었지요.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 신에 의해 존재했던 거예요. 하지만 데카르트의 생각은 달랐죠. 우리가 존재하는 근거는 이제 더 이상 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이 생각한다는, 바로 이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근거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사람과, 생각한다는 이 사실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인종이지요.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세인과 근대인이 달라집니다. 다른 생가을 가진 인간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갈라짐'이 바로 '획기적'인 것이고 거기서 세계관이 갈라지고 시대가 구분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여러분께 강조하려는 것은 갈라지는 그곳이 아닙니다. 갈라지는 곳의 좌우에서 각각 하나의 결로 움직이는 '인간의 무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인은 고대식의 무늬를 그려요. 중세인은 중세적인 무늬를 그리죠. 근대인과 현대인은 각각 근대적 혹은 현대적 무늬를 그립니다. 인간은 이런 큰 틀의 결 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문'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무늬' 혹은 '인간의 결'입니다. 쉽게 '인간의 동선'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과거는 '인간의 동선' 뒤쪽이고 미래는 앞쪽 방향일 뿐입니다. 그러면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이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가늠하지 않고도 가능할까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상상력'이란 것도 별반 다른 게 아니에요. 즉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일지 꿈꿔보는 능력이지요. 상상은 망상과 다릅니다. 상상은 항상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과 함께 하면서 꾸는 꿈이지요. 망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과 아무런 관계없이 멋대로 하는 생각입니다. 창의성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이 어디로 갈 것인지 꿈꿔 보고, 또 꿈꿔 보다가 그 나아가는 방향 바로 앞에 점을 찍고 '우뚝!' 서 보는 일입니다. '인간의 동선'과 관계없이 점을 찍게 되면 무엇이 되나요? 그것은 바로 '엉뚱함'일 뿐입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창의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인문의 향기를 피하면 안 되는 것이죠. (...) 인문학 없이는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혹은 결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인간의 동선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당연히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 되겠지요? 지금의 학문 분류에 따라서 말할 때, 인문학에는 대표적으로 문학과 사학 그리고 철학이라는 세 분야가 포함됩니다. 줄여서 문사철이라고 하지요. 철학이든 사학이든 문학이든 인문학으로서의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을 알려주려고 하는 학문들이지요.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계기를 재료로 삼아 인간이 그리는 결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면 사학이 됩니다. 명증한 범주와 개념들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주면 바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바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지요.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독립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 인문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문학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어떤 새로운 사태나 사건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하나요? 대개는 일단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이렇게 우선은 정치적 판단을 합니다. 이 정치적 판단을 해주게 하는 것, 이것은 뭡니까?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신념들 때문이지요. 그것들을 기준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사태를 만나고, 그 기준에 맞으면 좋다 하고 맞지 않으면 나쁘다고 하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이념, 신념, 그리고 가치관 등이 자기의 독립성보다 강하여 자기를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인문적 통찰은 불가능하고 더듬이는 없어지죠.
그럼 관건은 뭐냐? 도대체 인문적 통찰을 하는 관건은 뭐냐?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pp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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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기억, 즉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벗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오직 자기 자신만 남습니다. 자기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자기로만 남은 이 사람에게는 인간이 그려 나가는 무늬가 새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그러면 이 무늬가 어떻게 그려질까,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어떤 폭으로 움직일까를 꿈궈 볼 수 있습니다. 상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과정에서 기존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것들은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고 오직 부교재 내지는 보충 자료로서만 행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의성은 또 뭡니까? 이념이나 신념이나 가치관과 같이 자신을 채우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던 기존의 굴레를 뚫고 나와 그들을 밟고 우뚝 서거나 그것들을 손 안에서 탁구공 다루듯이 가볍게 희롱할 수 있게 된 독립적 주체가 인간이 그려 나가는 무늬의 정체와 방향에 대하여 꿈꿔 보다가 그 동선의 앞에 조금 일찍 서 보는 일이에요. 창의성을 원하는가? 상상력 갖기를 원하는가? 먼저 자기한테 물어봐야 할 일입니다. 내가 나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을 혹시 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과 가치를 나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에게 심각하게 물어봐야 해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때에라야 비로소 인문적 통찰의 첫 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식과 이념의 지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p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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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 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튼실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라야 건강합니다. 사회를 위해서 자기 욕망을 소외시키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결국 부조화스럽고 비틀어집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자기의 것'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즐길 수 있어야 또 잘할 수 있지요. 즐겨서 잘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그 잘하는 성취로 한국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사명감에 짓눌려 일을 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행복한 개인들로 자라나서, 그런 개인들이 이룬 사회라야 강하고 튼튼하며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도덕이 유지되고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p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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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내가 나인가?" 하는 질문을 항상 해야 합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항상 자기한테 해야 해요. 삶은 자기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삶의 활동성은 오직 자기에게서만 비롯됩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마저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 내적인 활동성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사는 일이 불안하고 피곤하며 뭔가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들고 총체적으로 재미가 없습니다.
이때 자기 자신을 오로지 자기 자신이게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들과는 공유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어떤 힘일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나인가?"라는 질문을 달리 표현한다면 아마 "나는 내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밖으로만 향해 있는 눈을 자기 내부를 향하도록 돌려놓고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p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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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라는 것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구조로만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라는 것은 사실 '나'들의 총합일 뿐이에요. '나'들이 합해져서 '우리'가 되었는데, 이성적인 구조 속에서는 '우리'의 실재성을 강조하다 보니, '나'의 존재성은 경시해야 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실선으로 그려지고, 오히려 '나'는 점선이나 그림자로 그려져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사실상 실재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데도 말이지요.
'나'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우리'가 되기 이전의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이 주도권을 가지고 행위 과정에서 최초의 동기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이성적이기 이전에 내적 충동성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지요. 나의 내적인 충동성이 외적이고 이성적인 계산법으로 제어되기 이전의 감각에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비정형성의 감각 등을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욕망은 차라리 의식 이전의 무의식 덩어리일 수도 있습니다. 비율에 맞게 계산되기 이전의 종잡을 수 없는 충동 같은 것입니다. 역사화 되기 이전의 야만성 같은 것이죠. 거친 황무지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힘입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알아듣기 힘든 상태로서 아직 언어도 아닌 야생의 어떤 소리일 뿐입니다. 개보다는 늑대에 가까운 것입니다.
욕망은 '이곳'에 있는 자기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힘이고 의지이며 충동이고 생명력이에요. 욕망이 거세된 인간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인간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를 '우리'라는 우리에 가두지 마세요! 그것이 인문적 태도가 여러분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p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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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가 없기 때문이에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겁니까? '내'가 느끼는 겁니까?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누구인가요? 나예요. 우리는 느낌을 함께하지는 못해요. 집단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집단은 이성이 지배합니다. 비율과 계산이 지배하지요.
제가 앞에서 '버릇'이라고 이야기했듯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의 이념입니다. 이념은 원심력이 있습니다. 이념은 계속 높아지고 높아져요. 그러니까 순수를 지향해요. 선명성 경쟁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순교자적 경지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누가 더 순수한가? 누가 더 맹목적인가? 누가 더 철저한가? 이념은, 믿음은, 신념은, 즉 믿음의 대상은 원심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높아지려 합니다. 멀어지고 높아질수록 진짜같이 보여요. 그래서 누가 더 저 먼 곳까지 도달하는가? 이것만 사명으로 남기 때문이 광신도가 나와요. 맹목적 수호자들이 나오죠. 그렇게 이념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하고는 거리가 멀어지요. 자기의 구체적인 삶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요. pp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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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주체의 확립 없이 창의성은 불가능합니다. 창의성은 주체가 대상을 외압 없이 독립적으로 대면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적 주체가 확립되었을 때만이 창의성과 같은 차원에서 작동되는 인격적 성숙, 미학적 삶, 행복, 자유 등도 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이 아니라 '개별'로서의 자아에게만 확인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존재할 때만 자기가 자기로 존재합니다. 일반의 구속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라는 고유명사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p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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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보 보죠. '개槪'라는 글자를 봅시다. 쌀가게에 쌀을 한 되 사러 갑니다. 쌀가게 주인은 한 되를 재는 됫박을 가녀와 거기에 쌀을 수북이 붓습니다. 그럼 고봉이 되잖아요. 근데 그대로 주면 손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싹 깎아냅니다. 정확히 한 되가 되도록 깎아 낼 때 쓰는 이 도구를 평미레라고 하는데, 한자로 '개槪'라고 쓰는 거예요. 그리니까 '개'라는 말은 뭐냐 하면, 공통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여분의 것을 깎아 버리는 도구입니다. 그럼, 개념이라는 말은 어떤 뜻이 될까요? 공통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여분의 것이나 사적인 것, 특수한 것은 제외하고 공통의 것, 일반적인 것만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개념'입니다. oo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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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한다는 것은 뭡니까?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부드러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하는 거지요. 점점 굳어가면서 명사화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바로 예술이 필요한 겁니다! 예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를 미학적 삶이랄지 예술적 경지랄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문적 통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예요. (...)
개념이라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미가 똑같습니다. 영어로는 뭐죠? 콘셉트concept라고 하지요. concept란 단어 뒤에 붙는 접미사 -ept 자체가 '가지다/잡다catch/take'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합니다. to take, hold in이라는 의미가 들어가는 단어에 붙이는 모양이에ㅛ. 동사형은 컨시브conceive지요. conceive는 '잡다'라는 의미예요. 또 개념을 독일어로 하면 베그리프Befriff가 되는데, 동사형은 베그라이펜begreifen입니다. 역시 '(손으로)잡다'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을 뭐 한다고 하죠? 파악한다고 하지요. 파악把握, 즉 손으로 잡아 꽉 쥐는 거지요. 동양의 개념도, 영어의 콘셉트도, 독일어의 베그리프도 모두 다 이 세계를 자기가 잡고 싶은 만큼, 잡을 수 있는 만큼 잡아서 손에 남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만큼 잡고 빠져 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손에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바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개념은 출발부터 세계를 전면적으로 반영하기에 부족한 것이고, 출발부터 소유적 상태이고, 출발부터 제한된 상태이고, 출발부터 딱딱한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개념의 구조로 되어 있는 지식이 우리의 구체적 실생활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틀인 이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확신 체계인 신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개념'에 스스로 굴복당한 형국입니다. 마름을 주인으로 착각한 거지요. 마름은 개념이고, 주인은 실재하는 세계이자 바로 '나'입니다. 개념은 실재하는 세계와 살아 움직이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마름 같은 것인데, 이 마름이 오히려 실재하는 세계를 제어하거나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가 주인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념이나 개념의 정체를 정확히 보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pp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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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 인문학은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 공부하는 것이 고시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인문적 지식이 마치 법조문 외우듯이 하나의 지적 체계로 흡수되어 있으면 거기에서 무슨 지혜의 빛이 발광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문적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인문적 활동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자유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유롭지 못할까? 자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나는데도 왜 우리는 더 유연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이제 이 질문에 답해 봅시다. 저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한테는 지식을 지혜로 숙성시키거나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유연함, 행복, 창의성 등과 같은 인격적 단계로 밀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 지혜로 넘어가고, 이미 있는 경험의 기억이나 지적 체계들이 삶의 동심원을 더 활발하게 펼쳐줄 수 있는 활동의 힘이 갖춰져야 합니다. 체계가 아니라 힘입니다! 그 힘을 저는 '주체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인문력'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pp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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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일상의 힘과 가치를 무시하고, 거대하고 보편적인 이념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는 쉽게 독재의 틀이 형성됩니다. 왜? 행복을 거대 이념이 책임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이념적으로 정해 놓고, 그 이념적인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니까요. 즉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놓고, 백성들을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재 아니겠어요?
정상적인 나라는 행복한 국가에서 백성들의 행복한 삶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백성들이 모여서 행복한 국가로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나라는 행복한 개인들이 모여 있는 나라예요. 행복한 개인들의 집단이 나라를 만든 것이 행복한 나라예요. 거듭 강조하건대, 개인들이 행복하면서 그것이 나라를 이루는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입니다.
행복한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일치합니다. 자기가 사는 공간은 일상의 구체적 터전이지요. 이 일상의 터전에서 삶의 역동성이 발휘되다는 것은 '덕'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념에 주도권을 넘기지 않은 것이지요.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하면서 자기 욕망을 정면으로 대면하지요. 욕망은 우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지요. 내가 사는 것은 일상인가요? 아니면 이념인가요? 일상이지요.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 발휘되는 공간은, 사실은 보편적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일상의 세계예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때 자기 눈에 자기의 일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거기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결국 진실한 태도로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pp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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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사고를 시작한다고 하거나 철학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낯설게 할 줄 안다는 말이에요. 낯설게 한 다음에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 낯섦의 발생이나 집요함의 유지가 모두 주체의 활동력, 즉 덕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욕망의 작동이라는 것이죠. 이 관찰의 집요함 속에서 새로 등장한 세계, 그것이 바로 자기의 세계이지요. 그것을 글로 써 놓으면 시가 되고,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노래가 되고, 명증한 범주의 틀로 구성하면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죠. 익숙한 세계가 아니에요. p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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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주체가 되는 일은 육체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육체를 통해서만 인간은 타인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구별되니까요. 글쓰기, 낭송, 운동을 주체의 자각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글쓰기, 낭송 그리고 운동은 모두 육체성을 발휘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하고 자주 시간을 내어 낭송을 하며 운동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듣기만 해도 얼마나 윤기 나는 사람입니까? p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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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논증'이나 '웅변'이나 '주장'이 횡행하는 시대를 살아왔지,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어요. 안타깝지만 사실이에요. 그럼, 왜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을까요? '내'가 아닌 '우리'의 시대, 집단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이야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할머니가 계시던 아랫목에 있고, 조그만 샛길에 잇고, 저잣거리에 있고, 공원 벤치에 있지요. 학교과 광장과 조직 속에는 이야기 대신 논증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
이제 미래는 집단 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 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 대신에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p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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