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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아프리카를 문명다운 문명이 없었던 미개한 곳으로 생각하지만 아프리카는 결코 미개한 지역이 아니다. 이집트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도 불가사의하게 생각되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문명을 창설했다. 나일 델타 지역에 자리잡은 이집트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남쪽으로부터 금, 상아, 목재, 가죽, 노예 등과 같은 물자의 공급을 필요로 했다. 특히 이집트는 나일 강 상류에 거주하는 누비아족과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이집트 문명이 사하라 이남으로 전파되지는 않았다. 이집트 문명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끝났을 뿐이다. 만일 이집트 문명이 사하라 이남으로 확장되었더라면 아프리카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후와 지리적인 여건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북부 아프리카에 살던 함족의 일부인 투치는 남쪽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내려와 현재의 르완다와 브룬디에 살고 있다. 그러나 원거리로부터 이동해온 이방민족이 원주민과 섞여서 살아온 체제는 굴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결국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을 불러온 것이다. 투치가 르완다와 부룬디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면 왜 이집트 문명은 남쪽으로 전파되지 않았을까? 이는 비단 기후와 지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짐작컨대 전파자와 수입자 모두에게 의지가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문명 세계를 주도했던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모험을 무릅쓰고 질병과 독충이 우글거리는 이방세례로 자신의 우월한 문명을 전파할 생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돌 다루는 기술을 근본으로 하는 이집트 문명은 수입국의 여건과는 잘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건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이를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당시 사하라 이남 국가들에게 있었을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아프리카가 세계역사에서 고립된 적은 없다. 이들은 계속 외부 세계와 소통했다. 아프리카는 옥수수, 카사바, 얌과 같은 곡물을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로부터 수입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은 중동으로부터 들여왔다. 서기 1세기경에는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 반도,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과 활발하게 교역했으며 통로는 주로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들이었다. 마사와, 제일라, 라무, 말린디, 몸바사, 잔지바르, 소팔라, 킬와 등이 이 당시 대표적인 무역항이다. 아프리카인은 상아, 금 등 귀중품과 다른 일상용품을 사하라 사막을 건너 유럽으로 수출했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교역로가 개발되면서 사막의 남쪽 언저리에는 거대한 제국들이 생겼고 이들이 교역을 주도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상품은 소금, 상아, 동물가죽, 노예 등이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는 상품은 도자기, 유리, 철제품 등 공산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1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이러한 무역관계는 15세기에 대량의 물건을 실은 포르투갈 선박들이 아프리카에 들어오면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낙타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것보다 배로 운송하는 것이 훨씬 값이 싸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사막을 횡단하는 무역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이후 16세기에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간의 관계가 점차 긴밀해졌다. 최소 1000만 명 이상의 노예가 북미, 카리브 제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로 끌려갔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므로 흑인 노예사냥꾼과 백인 노예상인 모두 재산을 축적했다. 따라서 노옘역을 전적으로 백인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미국과 카리브해 그리고 브라질에서 계속적으로 노예에 대한 수요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노예를 잡아가는 데 필요한 총기를 백인이 공급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막대한 규모의 노예무역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노예무역 시대가 종식된 후에도 아프리카에 대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이로 인한 폭발적인 경제 규모 확대로 인해 아프리카의 원자재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아프리카는 팜 오일, 왁스, 고무, 코코아, 커피, 차, 설탕 등과 같은 원자재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변모했다. 이로써 아프리카 식민화를 위한 기반이 굳어졌다. pp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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