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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인간 존재의 의미 / 에드워드 윌슨

by 릴라~ 2019.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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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나는 우리 종의 두 번째 의미, 즉 더 폭넓은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나는 인류가 오로지 진화하는 동안 일련의 사건이 누적됨으로써 생겨났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 어떤 목표에 도달하도록 예정된 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힘에 부등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심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토대를 둔 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저 위쪽 어딘가에서 속죄를 받거나 두 번째 기회를 얻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행성에만 거주하며 이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닌다. 우리 여행이 이 단계에 들어서려면, 즉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면 관습적으로 쓰는 역사의 정의보다 훨씬 더 폭넓은 정의가 필요하다. p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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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나긴 창조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대목은 200만 년 전 원시적인 호모 하빌리스와 함께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빌리스 이전의 선행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주로 초식성이었고,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했지만, 그들의 뇌 용량은 600cc 이하로서 침팬지와 비슷했다. 하빌리스가 출현하면서 뇌 용량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호모 하빌리스는 680cc까지 늘어났고, 호모 에렉투스는 900cc, 호모 사피엔스는 1400cc로 늘어났다. 인류 뇌의 팽창은 생명의 진화에서 복잡한 조직이 가장 급속하게 발달한 사례에 속한다.


하지만 영장류에게서 함께 모여서 협력하는 드문 일이 일어났다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커다란 뇌 용량이 제공한 현생 인류의 잠재력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고도의 사회적 지능을 지닌 이들의 수명을 늘리고 번식 성공률을 높인 힘들과 당시 환경의 조합이야말로 고도의 사회적 진화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여겨 왔다. 주된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지금까지 두 이론이 계속 논쟁을 벌여왔다. 첫 번째 진영은 혈연 선택을 제시한다. 개인이 방계 친족(자식 이외의 친척들)을 선호함으로써, 한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 이타주의가 진화하기가 수월해졌다고 본다. 복잡한 사회적 행동은 집단 구성원이 다른 모든 구성원들에게 유익한 행동을 하는 이타주의를 통해 잃는 손해의 총합보다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유전자의 수를 통해서 얻는 이익이 더 클 때 진화할 수 있다.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종합적인 효과를 포괄 적합도라고 하며, 그것을 토대로 진화를 설명하는 것을 포괄 적합도 이론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론은 더 최근에 나온 것으로서, (고백하자면, 내가 그 이론의 현대판을 제시한 이들 중 한 명이다.) 다수준 선택이야말로 원동력이라고 본다. 이 이론은 자연 선택이 두 수준에서 작동한다고 받아들인다. 한 집단 내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을 토대로 한 개체 선택과 집단 사이의 경쟁과 협력에서 비롯되는 집단 선택이 그것이다. 집단 선택은 집단들이 새로운 자원을 찾고 거두기 위해 경쟁하거나 서로 격렬하게 충돌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다. 다수준 선택은 진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점점 받아들여지고 있다. 혈연 선택이 거의 존재하기 어려운 특수한 조건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수학적 증거들이 최근에 나왔기 때문이다. 또 다수준 선택은 진사회성 진화가 실제로 일어난 모든 동물 사례들에 쉽게 들어맞는 반면에, 혈연 선택은 설령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사례에서도 잘 들어맞지 않거나 전혀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pp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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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단순할지도 모른다. 생명에는 예정된 목적도, 끝모를 수수께끼 같은 것도 없다. 우리의 믿음을 얻고자 다투는 악마와 신도 없다. 대신에 우리는 자수성가한 독립적이고 고독하고 허약한, 생물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적응한 생물 종이다. 장기 생존에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가장 발전한 민주 사회에서 용인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독립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는 지적인 자기 이해다. p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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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오해하지 말기를. 우리가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의 아주 먼 조상들까지 고려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가능한 한 먼 조상까지 최대한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만으로는 이 이해 수준에 도달할 수가 없다. 역사는 문자의 여명기에서 멈추며, 나머지 이야기는 고고학의 탐사 활동에 맡겨진다. 그리고 더 깊은 과거를 탐구하는 일은 고생물학의 영역이다. 진정한 인류 이야기를 하려면, 역사는 생물의 역사와 문화의 역사를 둘 다 포괄해야 한다. 생물학 쪽에서는 선행 인류의 사회적 행동을 인류 수준으로 밀어올린 힘이 무엇인가가 수수께끼의 열쇠가 된다. 그 힘의 유력한 후보자는 다수준 선택이다. 유전되는 사회적 행동이 집단 내의 개체만이 아니라 집단 자체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몇몇 대중 저술가들이 곡해해 왔지만, 생물 진화가 일어날 때 자연 선택의 단위는 개별 생물도 집단도 아니었다. 유전자(더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유전자의 서로 다른 형태인 대립 유전자)가 단위였다. 자연 선택의 표적은 유전자가 만드는 형질이다. 어떤 형질은 성격상 개별 개체 차원에 속한다. 그런 형질은 집단 안팎에서 개채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질 때 선택될 수 있다. 한편 집단의 다른 구성원드로가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한 형질도 있으며, 그런 형질은 집단끼리의 경쟁을 통해 선택될 수 있다. 개체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부족한 비협조적인 집단은 더 잘 조직된 경쟁 집단에 밀려날 것이다. p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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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만 년 전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은 채식을 했다.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열매, 덩이뿌리 등 먹을 수 있는 식물 부위를 찾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현생 침팬지보다 뇌가 아주 조금 컸을 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겨우 50만 년이 흘렀을 때, 우리의 조상종 집단인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다스리면서 야영지를 꾸리고 있었다. 일종의 둥우리였다. 그들은 야영지에서 출발해 식량을 구해서 돌아오고는 했으며, 그 식량 중에는 고기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그들은 뇌가 침팬지와 현생 호모 사피엔스의 중간 크기였다. 그 추세는 그보다 1만~200만 년 더 이전에 시작된 듯하다. 더 선행 인류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가 식단에 점점 더 고기를 추가하는 쪽으로 돌아섰을 무렵이었다. 집단들이 한 곳에 점점 더 많이 모이면서, 협력해 둥우리를 짓고 사냥을 하자, 한 가지 이점이 더 늘어났다. 바로 전두엽의 기억 중추와 추론 중추가 커지면서 사회적 지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하빌리스 시대인 이 시기에, 한 집단의 일원인 개인들 사이의 경쟁에서 비롯된 집단 수준 선택 사이에 계속 갈등이 빚어졌을 것이다. 후자는 모든 집단 구성원 사이의 이타성과 협력을 촉진한 힘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집단 차원의 도덕성과 양심 및 명예심을 타고나게 되었다. 두 힘 사이의 경쟁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을 이긴다.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더 단순화하면, 개체 선택은 죄악을 부추기는 반면,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인류는 다수준 선택이라는 선사 시대에 벌어진 일 때문에 영구히 갈등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류는 자신을 빚어낸 두 극단적인 힘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끊임없이 요동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어느 한쪽 힘을 사회적 및 정치적 불안의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삼을 가능성은 적다. 개체 선택에서 비롯된 본능적인 충동에 완전히 내맡긴다면, 사회는 해체될 것이다. 반대편 극단인 집단 선택에서 비롯된 충동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천사 같은 로봇이 될 것이다. 거대해진 개미와 다름없어질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갈등은 신이 인류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의 음모도 아니다. 그저 본래부터 그러했을 뿐이다. 이 갈등은 우주 전체에서 인간 수준의 지능과 사회 조직이 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다. 우리는 결국에는 타고난 불안을 지닌 채 살아가고, 아마도 그것을 창의성의 주된 원천으로 여기면서 기쁨을 얻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pp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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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기원을 살펴보았으며, 이 정보로부터 인간의 창의성이 대체로 자연 선택의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 사이의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갈등을 통해 나온다는 개념을 도출했다. 이 설명에 함축된 통일성이 내가 제시한 여행의 다음 단계로 우리를 이끈다. 바로 과학과 인문학이 같은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개념이다. 특히 물리적인 인과율이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양쪽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자는 아마 이 명제를 받아들일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이미 이쪽으로 여행한 바 있다. 그것을 계몽운동이라고 했다. 


17~18세기에 계몽이라는 개념은 서구의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다. 당시에 그 개념은 거대한 힘이었다. 더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는 그 운동이 인류 종의 운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학자들은 과학 법칙으로 우주와 인류의 의미를 둘 다 설명할 길을 찾은 듯했다. 당시 과학 법칙은 자연철학이라고 했다. 계몽사상가들은 거대한 학문 분야들을 원인과 결과의 연속된 연결망으로 통일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미신을 모조리 떨어내고 현실과 이성만으로 구축한다면, 모든 지식을 하나로 엮어서 계몽운동의 선구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620년에 "인간의 제국"이라고 부른 것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몽운동은 인간이 전적으로 스스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함으로써 전보다 더 현명하게 선택할 능력을 얻는다는 믿음을 토대로 했다.


그러나 1800년대 초 무렵 그 꿈은 흔들리고 있었고 베이컨의 제국은 후퇴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비록 과학자들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견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더 낙관적인 계몽사상가들의 기대치를 결코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둘째, 이 미흡함에 힘입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몇 명을 비롯한 낭만주의 문예 사조의 창시자들은 계몽 세계관의 억측을 거부하고 다른 더 내밀한 차원에서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었다. 과학은 사람들이 창작 예술을 통해서만 깊이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건드릴 방법이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은 과학적 지식에 의존할 때 인류의 잠재력이 훼손된다고 믿게 되었고, 오늘날 그들의 계승자들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그 뒤로 2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pp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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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작은 파란 점은 우주의 수천억 개에 이르는 은하 중 하나인 우리 은하수의 가장자리에 놓인 티끌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행성, 달, 행성형 천체들의 연속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주에서 우리의 지위를 말할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우주에서 볼 때 지구는 오늘 오후 몇 시간 동안 뉴저지 주 티넥의 한 정원에서 꽃잎 하나 위에 앉아 있는 진딧물 한 마리의 왼쪽 더듬이 두 번째 마디와 같다. p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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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밝혀낸 모든 연속체 중 인문학과 가장 관련 깊은 것은 감각이다. 우리 종의 감각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각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400~700나노미터 영역에 속한 극도로 좁은 에너지 영역을 감지하는 데 달려 있다. 우주에 충만한 그 스펙트럼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의 시세포가 감지하는 것보다 파장이 수조 배 더 짧은 감마선부터 수조 배 더 긴 전파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다. 동물들도 각자 그 연속체의 극히 좁은 영역에서만 살아간다. 한 예로 나비는 400나노미터 이하의 파장에서 꽃잎에 반사되는 자외선 패턴을 보고서 꽃의 꽃가루와 꿀을 찾는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색깔과 무늬다. 우리 눈에는 꽃이 노란 색과 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곤충에게는 흑백의 점들과 동심원들이 늘어선 형태로 보인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이 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직관적으로 믿는다. 하지만 우리 종은 20~2만 헤르츠의 소리만을 검출하도록 되어 있다. 밤에 날아다니는 박쥐는 그 범위 위쪽에서 초음파를 공중으로 쏘아서 장애물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를 듣고서 날아다니는 나방이나 곤충을 낚아챈다. 코끼리는 인간의 청력 범위 아래쪽에서 무리의 일원들과 복잡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뉴욕의 거리를 거의 아무런 해석을 할 수 없는 몇몇 진동만을 느끼면서 걷고 있는 귀가 먼 사람처럼, 자연을 돌아다니는 셈이다. 


인간은 지구의 모든 동물 가운데 후각이 가장 약한 축에 들며, 너무나 약하기에 후각을 표현하는 어휘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대신 "레몬 냄새 같다" "신 냄새가 난다" "썩은 냄새가 난다" 같은 직유법에 심하게 의존한다. 대조적으로 세균에서 뱀과 늑대에 이르기가지 다른 대다수의 생물들은 후각과 미각에 의존해 살아간다. 우리는 사람을 추적하거나, 폭발물 같은 위험한 화학 물질의 가장 미약한 흔적을 검출하고자 할 때, 후각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훈련된 개의 정교한 후각에 의존한다.


또 우리 종은 장치를 쓰지 않으면 특정한 종류의 자극들은 거의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따끔거림, 충격, 불빛을 통해서만  전기를 검출한다. 대조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탁한 물에 사는 여러 민물장어, 메기, 코끼리코고기는 전기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진화를 통해 유기물 전지로 변형된 몸통 근육 조직을 이용해 몸 주변에 전기장을 생성한다. 전기장이 방해를 받을 때 생기는 일종의 전기 음영을 토대로 이들은 장애물을 피하고, 먹이를 찾고, 같은 종의 일원끼리 의사소통한다. 인간의 감각 범위를 넘어선 또 하나의 환경 부분은 지구의 자기장이다. 일부 철새들은 이 자기장을 이용해 기나긴 여행 중 방향을 잡는다. pp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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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계몽운동은 과학과 인문학이 공생이 실현 가능해 보일 만치 초보적인 단계에 있던 400여년 전에 일어났다. 그 운동은 15세기 말부터 서유럽이 세계의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적인 교역로가 열리고 무력 정복이 이어졌다. 새롭게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자, 인류는 지식과 발명을 장려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돌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새로운 탐험의 주기에 들어섰다. 무한히 더 풍성하고 그에 상응해 도전거리가 더 많으며, 또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점점 더 인본주의적으로 나아가는 탐험이다. 그리고 그 탐험은 마침내 계몽운동의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우리 존재를 표현하게 될 진지한 창작 예술과 인문학이 이끌게 될 것이다. p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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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침내 우리는 더 열린 탐구심을 갖고 한 가지 핵심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출현시킨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프리카의 선행 인류는 더 하등한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고도의 사회적 조직화의 문턱까지 왔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문턱을 넘었다. 뇌 크기가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인류 집단은 대폭 향상된 기억을 토대로 한 지능을 이용했다. 원시적인 사회성 곤충에서는 유충과 성체, 보모와 먹이 조달자 같은 각 집단 내의 사회 조직화 범주들이 갖춘 협소한 본능들을 토대로 한 분업이 진화한 반면, 최초의 인류는 집단 구성원이 다른 모든 구성원들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활용하면서 본능에 기반을 둔 다양한 행동을 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사적이고 내밀한 상호 지식을 토대로 집단을 구축한 것은 인류만의 독특한 성취였다. 혈연관계에 따른 유전체의 유사성은 집단 형성의 불가피한 결과였지만, 혈연 선택이 그 유사성의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혈연 선택 개념과 포괄 적합도의 허깨비 같은 속성들은 인간뿐 아니라 진사회성 곤충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인간 조건의 기원은 자연 선택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선호했다는 개념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의사소통하고, 알아보고, 평가하고, 유대를 맺고, 협력하고, 경쟁하는 타고난 성향도, 자신의 특별한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깊고도 따스한 기쁨을 느끼는 성향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집단 선택을 통해 강화된 사회적 지능에 힘입어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지배종이 되었다.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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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이 자신이 사는 페로몬으로 포화된 세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는 진화론적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몸집이 너무 커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곤충과 세균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은 호모 사피엔스 수준으로 진화하기 위해 언어와 문명을 출현시킬 만큼 커질 수 있는 기억 은행을 담은 커다란 뇌를 갖추어야 했다. 게다가 직립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몸집과 직립보행이 결합되어 인간은 코끼리와 소수의 예외적인 대형 유제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머리가 더 높은 곳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눈과 귀는 다른 거의 모든 동물들에게서 멀어졌다. 종의 99퍼센트 이상은 크기가 아주 작고 우리의 감각이 닿지 않는 땅에 붙어 있어서 주목을 받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선조들은 페로몬이 아니라 시청각 채널을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페로몬을 비롯한 다른 모든 감각 채널은 우리에게 아주 느렸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를 다른 생물들보다 우위에 서게 해준 바로 그 진화적 혁신들은 우리를 감각 장애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물권의 거의 모든 생물들을 대체로 의식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생물권을 파괴해왔다. 인류가 처음 지구 전역으로 퍼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인류 역사 초기에는 그 점이 별 문제가 안 되었다. 당시의 인구는 아주 적었고, 육지와 바다의 풍부하면서 우리에게 냄새를 풍기지 않는 생물들로부터 얼마든지 에너지와 자원을 걷을 수 있었다. 넓은 오차 범위를 허용할 만큼 시간과 공간이 충분했다. 그 행복한 시절은 끝났다. 우리는 페로몬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없지만, 다른 생물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더 잘 파악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가 의지하는 환경의 대부분을 구하는 일을 더 잘 해내려면 말이다. pp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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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외계인은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우리의 몸이 매일 살아가는 필요한 공생 미생물들의 생태계에 상응하는 공생 미생물들의 생태계인 미생물총을 그들의 몸도 지니고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외계인 정복자들은 작물이나 그에 상응하는 조류, 혹은 다른 어떤 열량을 제공해 줄 생물, 혹은 적어도 식량을 제공할 합성 생물도 데려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지구의 모든 토착 동물, 식물, 균류, 미생물 종들이 자신과 자신의 공생체들에게 치명적이라고 올바로 가정할 것이다. 이유는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라는 두 생물 세계가 식민지화를 통해 한 곳에 모인 생명체들을 낳은 기원, 분자 기구, 무수한 진화 경로 측면에서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외계인 세계의 생태계와 종은 우리의 것과 아예 화합이 불가능할 것이다. (...)


이제 우리의 허약한 작은 행성이 외계인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해보자. 우주 탐사에 나설 정도의 외계인이라면 생물학적 식민화에 내재된 야만적이고 치명적인 위험도 확실히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고향 행성에서 일어날 멸종이나 견딜 수 없을 혹독한 조건의 형성을 피하려면 자기 행성계 너머로 여행하기 오래 전에 지속 가능성과 안정한 정치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침략하지 않고 로봇을 이용해 매우 신중하게 생명을 품은 다른 행성들을 탐사하는 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향 행성이 파괴되기 직전에 와 있지 않은 한, 다른 행성을 침략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행성계 사이를 여행할 능력을 발전시켰다면, 행성의 파괴를 피할 능력도 계발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중에도 인류가 지구를 다 소비한 뒤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우주 열광자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우리와 모든 외계 생명체를 위한 우주 원리라고 믿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각 종에게 맞는 서식 가능한 행성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따라서 불멸할 기회도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이다. pp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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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지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행성이다. 생물 다양성을 파악하는 속도도 여전히 느린 상태다. 전 세계의 연구실과 박물관들마다 신종들이 넘치지만, 연구가 되어 새 이름이 붙여지는 생물은 연간 약 2만 종에 불과하다. 이  속도라면, 500만 종이라는 적은 추정값을 채택한다고 해도 23세기 중반쯤에야 일이 마무리될 것이다. 그런 굼벵이 같은 속도라니 생물학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분류학이 완성된 상태이고 생물학의 낡은 분야라는 잘못된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 결과 여전히 대단히 중요한 이 분야는 대체로 학문의 전당에서 밀려나서 자연사 박물관에 처박힌 상태이며, 박물관들은 예산 부족에 시달려서 연구 과제를 줄일 수밖에 없다. p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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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살아 있는 환경을 이루는 종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종을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보전생물학자들은 아주 많은 종이 발견되기도 전에 멸종하고 있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순수한 경제적인 의미로 볼 때, 멸종의 기회비용은 엄청나다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다. 겨우 소수의 야생종들을 연구한 결과만으로도 인간의 삶의 질은 크게 향상되어 왔다. 다양한 의약품, 새로운 생명공학, 농업의 발전이 대표적이다. 적절한 균류 종이 전혀 없다면, 항생제도 없을 것이다. 선택적 교배에 이용할 먹을 수 있는 줄기, 열매, 씨를 지닌 야생 식물이 없다면, 도시도 문명도 없을 것이다. 늑대도 개도 없을 것이다. 야생 가금류도, 닭도 없을 것이다. 말도 낙타도 없을 것이고, 인력으로 끄는 운반 수단과 봇짐에 의존해 땅 위를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물을 정화해 서서히 흘려보내는 숲도 없고, 생산성이 낮은 메마른 땅에 자라는 작물 외에는 농사도 없을 것이다. 야생의 식생도 식물성 플랑크톤도 없을 것이고, 호흡할 공기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pp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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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인류가 점점 더 강하게 환경과 생물 다양성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병목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 나머지 생명을 가능한 한 많이 그 병목 지점 너머에 있는 지속가능한 세계로 데려갈 모든 책임을 안고 있다. 우리의 선택은 지극히 도덕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그 일에 성공할지 여부는 아직 부족한 지식과 아직 느끼지 못한 배려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모든 종 가운데 우리만이 생물 세계의 실상을 이해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개체에게 가치를 부여해 왔다. 우리만이 동족에게 향한 자비심의 질을 측정해 왔다. 이제 같은 자비심을 우리를 낳은 생명 세계로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p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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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능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본능과 동일하다. 하지만 대다수 동물 종이 드러내는 유전적으로 고정된 틀에 박힌 행동은 아니다. (...)
인간과 큰 뇌를 지닌 다른 포유동물들도 타고난 주요 자극과 본능의 인도를 받지만, 그것들이 하등동물의 것처럼 거의 경직되고 외골수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유달리 인간은 심리학자들이 준비된 학습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 인간이 타고나는 것은 가능한 많은 대안들 가운데 하나 또는 서너 가지의 행동을 학습할 가능성이다. 그 편향된 행동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모든 문화가 공유하는 것이다. 설령 비합리적으로 보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아 보일 때에도 그런 행동이 선택된다. pp15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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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그 감정이 관장하는 학습의 준비성으로 이루어진 전체다. 일부 저술가들은 인간 본성을 해체해 무로 만들려고 시도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고 명백하며, 뇌의 구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수십 년에 걸쳐 연구자들은 인간 본성이 감정과 학습 준비성을 규정하는 유전자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내 왔다. 유전자의 최종 산물인 보편적인 문화적 특징들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 본성은 문화적 진화를 다른 방향들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편향시키고,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의 뇌에서 유전자를 문화와 연결하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의 집합이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서식지를 선택할 때의 편향도 학습에서 매우 중효나 유전적 편향 중 하나다. 어른은 자신이 자라고 인격 형성기의 경험을 통해 기억에 새겨진 바로 그 유형의 환경에 배려된다. 그들에게 산, 해안, 평원, 심지어 사막도 가장 친숙함과 편안함을 주는 서식지가 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멕시코만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에,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비탈진 낮은 평원을 가장 좋아한다. p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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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에서 시골 인구가 미어터질 듯이 도시로 밀려들고 있다. 운이 좋다면, 그들은 시장, 학교, 병원을 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어 삶이 나아진다. 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기회도 커진다. 하지만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할 때, 정말로 도시와 교외를 거주지로 선호할까? 도시 생태의 강렬한 역동성과 인위적인 환경의 압박 때문에,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을 하도록 할 때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선호하고 획득할지를 알려면, 재산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살펴보는 편이 더 낫다. 경관 건축가들과 부호 전문 부동산 중개인들은 부자들이 물이 가까이 있고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사는 쪽을 선호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 경관 요소들 중에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전혀 없지만, 재산이 충분한 사람들은 어떤 가격을 치르고서라도 그런 곳을 구할 것이다. p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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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신의 본질이나 존재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생물학적 기원과 인간 마음의 특성에 있으며, 우리를 생물권 진화의 정점으로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자신을 악마와 부족 신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p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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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손들은 마치 신과 같은 기세로 지구의 많은 지역에 꽉꽉 들어찼고, 나머지 지역들도 많든 적든 변형시켜 왔다. 우리는 지구의 마음이 되었으며, 아마 은하수에서 우리가 속한 변방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지구를 파괴할지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댄다. 핵전쟁을 통해서, 기후 변화를 통해서, 성경에서 예견한 종말을 일으키는 재림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인류가 천성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구를 우리 자신과 우리를 낳은 생물권을 위한 낙원으로 바꿀 지능과 선의와 관용과 모험심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우리는 금세기 말까지 그 목표를 달성하거나 적어도 상당히 진척시킬 수 있다. 여태껏 그 모든 일의 걸림돌이 되어온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천성적으로 기능에 이상이 있는 종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석기 시대 저주에 걸려 있다. 수렵 채집인으로 살아가던 수백만 년 동안은 잘 작동했지만, 지구 전체가 도시화한 과학 기술 시대에는 점점 더 방해가 되고 있는 유전적 적응 형질들을 말한다. 우리는 마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회를 통치할 수단이나 경제 정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듯하다. 게다가 전 세계 사람들의 대다수는 신자들의 복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이끄는, 부족 수준에서 조직된 종교에 여전히 얽매여 있다. 우리는 부족적 갈등에 중독되어 있다. 그것은 팀 스포츠로 승화된다면 무해하고 즐겁지만, 현실 세계의 인종적, 종교적, 이념적 충돌 형태로 표출된다면 치명적이다. 다른 유전적 편향들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우리는 나머지 생명을 보호할 생각을 않고, 계속 자연환경을 찢어발기고 있다. 우리 종의 대체 불가능한 가장 소중한 유산을 말이다. 그리고 적정 인구 밀도, 지리적 분포, 연령 분포를 겨냥해 인구 정책을 펼치는 일은 여전히 금기시된다. 그런 생각은 "파시즘"처럼 들리며, 어쨌든 앞으로 한두 세대 동안은 미룰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종의 기능 이상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지만 거북함을 주는 유전적 근시안을 낳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민이나 국민이 아닌 이들에게는 관심을 덜 가지며, 같은 부족이나 국민이라고 해도 한두 세대 전의 사람이라면 관심이 멀어진다. 그러니 동물 종을 배려하기란 더욱 어렵다. 우리가 고분고분한 동료로서 길들인 개와 말을 비롯한 극소수의 동물을 빼고 말이다. pp19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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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창작예술과 그 비평을 포함하는 이 거대한 학문 분야는 여전히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는 감각 세계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심각한 한계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주로 시청각에 의지하며, 다른 수백만 종의 대다수가 살아가고 있는 미각과 후각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몇몇 동물들이 방향을 찾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쓰는 전기장과 자기장은 아예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시청각 세계에서도 우리는 상대적으로 눈과 귀가 먼 쪽에 가깝다. 전자기 스펙트럼의 아주 좁은 범위만 직접 지각할 수 있을 뿐이며, 땅, 공기, 물을 통해 굽이치면서 우리를 지나가는 진동수들은 아예 감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비록 창작 예술이 세세한 부분에서 무한해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원형과 본능은 사실상 극도로 적다. 그것들을 낳는 감정들의 집합은 설령 가장 강력하다고 해도 빈약하다. 비유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악기들보다 수가 적다. 창작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은 대체로 생물 부분과 무생물 부분 양쪽으로 지구의 방대한 시공간 연속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태양계와 그 너머 우주의 시공간 연속체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대단히 독특한 종이라는 사실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는 왜 그러한지를 탐구하는 일에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다.


과학과 인문학이 하는 말과 하는 일로 볼 때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원을 보면 둘은 서로 상보적이며, 인간 뇌의 동일한 창의적 과정들을 통해 나온다. 과학의 발견적이고 분석적인 힘이 인문학의 내성적 창의성과 결합된다면, 인간 존재는 무한히 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pp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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