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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수업 이야기

3월 첫수업 _ 모국어로 여는 세상

by 릴라~ 2020. 3. 23.

 

3월 첫 수업은 마음을 많이 쓴다. 한 해 국어수업의 첫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나는 주로 국어과목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이야기로 전달한다. 첫 시간은 아이들의 기억에 좀 더 오래 남을 것이기에 교과서에 나오지 않지만 모두가 공유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선택한다. 그간 여러 가지를 시도해오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정착한 이야기가 있다. 용산 국립박물관 옆에 있는 한글박물관에서 얻은 아이디어이다. 이 이야기는 다섯 개의 숫자에서 시작된다. 이 숫자는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연도이다.

1446        1926       1933      1942      1957

1446년은 모두가 알다시피 한글이 반포된 해다. 우리말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오랜 시간 전부터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지만 그 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었다. 한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언어이다. 중국말과 일본말과는 다른 한국말이 있기에 한국 민족도 그들과 구분된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기록할 문자가 없었기에 중세 이후로는 동북아시아에서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중국 문화의 힘에 오랜 기간 눌려왔다.

15세기에 드디어 우리 문자를, 그것도 매우 뛰어난 문자를 갖게 되었지만 문자 창제가 민족적 자각과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간송문화전에서 조선 전기 선비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내게는 신윤복의 미인도보다 더 충격을 준 그림이었는데 그들이 그린 소는 조선의 소가 아니었다. 뿔 모양이 달랐다. 중국의 소를 그린 것이다. 소는 그렇게 대단한 대상은 아니다. 그런 소조차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못하고 중국풍을 따른 사람들의 중화주의를 목격하니 그들이 한글을 어떻게 대접했을지 상상이 갔다.

 

구한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기록은 한문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도태시켰는지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조선의 문헌은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죽은 문자이며 선비들은 일생을 이만 자나 되는 끝이 없는 한자 꿰어 맞추기에 보내고 있다고. 그리고 이는 선비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배배 꼬아버리고 말았다고. 학자들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처럼 한자에 최고로 능한 관리들이 쓰는 글에도 콩글리쉬 같은 일종의 한국식 한문어법이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오백 년을 써도 한문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식민지 시대는 비극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자각의 시대였다. 문명국은 모두 자국의 문자가 있음을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지고 이때부터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주시경 선생을 필두로 한글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1926년, 선각자들은 먼저 가갸날(한글날)을 제정하고 사전 편찬과 문법 정리에 들어간다. 그리고 1933년 드디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진행되던 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물거품이 되지만 해방 후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어 사전 편찬 작업이 재개된다.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이 편찬되고 1957년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6권이 완간된다.

인류가 문법책과 사전을 만든 건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세계 최초의 문법책은 1492년, 스페인 카스티야어 문법책이며, 세계 최초의 사전은 역시 스페인에서 1611년에 편찬된다. 이어 1612년에 이탈리아어 사전이 편찬되고,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가 사전 편찬을 위해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한다. 처음 맡은 이가 A에 해당하는 단어를 정리하는데 9개월이 걸리고 회원들이 그리 열정을 보이지 않자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다음 담당자에게 연금을 책정해주는데 그는 I까지 작업하고 죽는다. 이후 사전 작업이 지지부진해지자 회의 참석자에게만 배당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꾼다. 이런저런 논란의 과정 끝에 프랑스어 사전은 1694년 60년만에 빛을 보게 된다. 사전 편찬은 이렇게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국가가 주도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사전 편찬도 60년이 걸렸는데, 식민지 시대, 그것도 지극히 열악한 재정 상황 속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지속하고 이십 년 만에 해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민족독립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식민지 시대 그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가치 있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분들의 열렬한 헌신이 있었기에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의 기초가 정리되었고, 이는 장차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한글 정립은 해방 후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말 큰사전 머리말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우리가 쓰는 낱낱의 말은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음어온 거룩한 보배이며,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다.” 사전 편찬의 감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명문을 읽으며 사전 편찬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기억한다. 33인의 조선어학회 회원들, 그 중 옥사하신 이윤재, 한징 두 분 선생님, 말을 모으는 일을 보탠 전국의 학생들, 조선어학회를 경제적으로 후원한 분들.....아직 이 글이 실린 교과서는 보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텍스트이다.

남북한 언어가 어휘가 다른 부분이 있지만 기본적인 문법이 비슷하고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는 이유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문법의 기본 틀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학회 회원 중 3분의 1 정도는 북으로 나머지는 남으로 왔고 이분들이 기초를 닦았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는 북한에서 바로 실행된 반면 남한에서는 8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져서 좀 늦은 감이 있다.

지금 한국어는 전세계 언어 중에서 사용 인구로만 봤을 때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등에 이어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강력한 언어이다. 남북한과 재외동포까지 7천 7백만 명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단지 한국어와 한국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국어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충분히 모르고 있다고. 우리 자신의 문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 때 제대로 살아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명은 언어로 이룩된다. 우리는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과 언어로 세상을 상대하는 수준은 아니다. 우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언어를 창조하지 않고 타인의 언어와 관점을 빌어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말이 겉도는 만큼 삶도 겉돈다. 말이 우리 삶의 표면에 맴돌지 않고 우리 존재의 튼튼한 버팀목이 될 때,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오롯이 비추고 그 현실을 올곧게 채우도록 이끌어주는 개념과 사상을 가질 때, 비로소 모국어의 힘과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과 글로 만들어가는 문명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 남북한이 함께 열어갈 새로운 세상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고민하고 창조하는 바탕에 우리말글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시작한 민족공동체의 자각의 여정은 남북한이 협력하여 새로운 문명을 개척해나갈 때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 앞에 놓인 도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쓸 때마다 이 쉽고 아름다운 말의 울림으로부터 표현의 기쁨과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느끼게 되기를 소망한다. 국어 공부의 끝에 학생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을 하나만 말하라면, 내게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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