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에 있는 버질의 시라고 한다.
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소설의 주제를 한 마디로 압축한 구절이라 하겠다.
공지영의 '먼 바다'는 약 환갑에 이른 주인공이 40년 전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교수단의 뉴욕 연수길에, 마침 연락이 닿은 스무살 시절의 옛사랑과 만날 약속을 하고 여행(연수)을 나선다.
여행 도중에 과거의 이야기들이 회상을 통해 하나둘씩 떠오르고
그래서 첫사랑 이야기지만 가볍고 담담하게 읽힌다.
회상 부분에서 문득문득 비수 같은 아픔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로는 맑고 담담한 소설이다.
제목 '먼 바다'처럼 기억 저편에서 아슬하게 떠오르는 첫사랑.
그런데 작가는 40년만에 재회한 주인공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발레에서 멈춰 있는 동작 또한 춤의 연속이듯이
서로 만나지 않고 멈춰 있었던 그 시간 또한 사랑한 시간이라고.
마음속에 간직한 시간 또한 사랑이라고.
그래서 진짜 사랑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게 이 구절은 우리 아빠에게만 해당하기에(D는 지금 같이 사니깐 제외),
젊은 날 스쳐 지나갔던 사랑은 그 정도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암 선고로부터 돌아가시기까지 약 7개월, 그 7개월이 너무나 짧고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너무나 어설프게, 어리석게, 우왕좌왕 정신 못차리며, 그러나 너무나 강렬하게 사랑한 시간이기에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가장 뜨겁게 사랑한 시간이기에 이것에 비하면
다른 사랑은 다 빛을 잃는다.
아마도 주인공은 스무살에 이런 사랑을 했던가보다.
그렇다면 4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잘 읽힐 때도 있고, 전혀 관심 없을 때도 있어서 안 읽은 것도 많다.
이번 소설도 학교도서관에 다른 책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들었는데,
저녁 먹고 슬쩍 펼쳤다가 잘 읽혀서 금세 다 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40년간의 기억 사이를 여행기처럼 편안하게 넘겨볼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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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발 끝으로 춤을 추는 건 힘든 게 아니야. 제일 힘든 건 무대에서 다른 아이들이 춤출 때 뒤에서 멈춰 서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 발레 선생님이 그랬어. 그 멈춰 서 있는 것도 춤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멈춰 서 있는 것도 춤이라면 멈추어 있던 통증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것, 어쩌면 숙성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도 그리움도 그랬다. 숙성된 그리움과 아픔이 이제 뚜껑을 열고 나와 그녀의 주인 행세를 하는 듯했다. p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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