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레리에서 고레파니 가는 길. 가이드가 가장 쉬운 날이 될 거라고 말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네 시간 반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고레파니'라는 입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뛴다. 7년 전 여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병풍처럼 늘어선 안나푸르나 연봉들을 보고 감격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 산이 바라다보이는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기대했던 풍광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개가 산 전체를 휘감아 버렸기 때문에. 숲과 계곡을 지나올 때는 조금씩 햇살이 비쳐서 기대를 좀 했는데 날씨는 쉬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가이드가 선택한 롯지는 예전에 묵었던 바로 그 집. 전에는 이 집이 제일 높은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로 집이 한 채 더 들어섰다. 식당으로 들어가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난로를 보자 얼마나 반갑던지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난롯가에는 먼저 도착한 두 명의 트레커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드니스와 그의 남자 친구.
따스한 장작불에 몸을 쪼이고 있는데 속이 조금씩 울렁거린다. 약한 고소 증상이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피곤이 쌓인 탓일 수도. 일어나서 심호흡하며 식당 안을 천천히 걸으니 조금 괜찮아졌다. 입맛이 없어서 저녁은 간신히 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니 트레커들 뿐 아니라 가이드, 포터, 롯지 주인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난롯가에 둘러앉는다. 날씨가 차가워서 모두들 난롯가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드니스 일행은 인도에서 몇 달을 보내고 네팔로 넘어온 참이었다. 내게 직업과 경력을 묻더니 이어서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너, 좋은 학교 나왔니?”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으니 자신들은 돌아가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드니스의 남자 친구가 설명을 보탰다. 경력이 있어야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데, 파트 타임은 아무리 일해도 경력으로 안 쳐주니 해결책이 안 보인다는 거였다. 비정규직이 처한 현실을 네팔 산골짝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처음 봤을 때 이십대 중반 치고는 착 가라앉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고민을 안고 떠나왔던 것이다.
여행이란 것이 그렇다. 처음 길을 나설 때는 모든 것이 새롭다. 늦은 밤에 도착한 도시의 불빛, 거리의 음악 소리, 저녁 노을, 볼을 스치는 한 줄기 바람조차도 ‘환희’로 다가온다.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나를 둘러싼 온갖 종류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자유와 낯선 사람들과도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는 '열림'을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그러나 여행이 반복될수록 상황은 달라진다. 일상적 현실이 여행의 시간과 공간을 침범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내 가슴을 떨리게 했던 낯선 타자들의 세계도 어느 순간 익숙한 광경이 되어 버린다. 무얼 봐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같은 생각, 같은 표정의 ‘나’가 내가 가는 모든 곳을 따라다닌다. 그럴 때면 떠나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남은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
그 즈음일 것이다. 산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의 매력, 힘겨운 오르막길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 두 다리로 걸으면서 만나는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자연이 주는 어떤 신비한 힘. 산길을 걸으면 일상의 두터운 껍질이 조금씩 해체됨을 느꼈다. 몇 달간 계속해서 걸을 수 있다면 내 몸의 에너지가 바뀔 것도 같았다. 그런 산행은 차라리 순례에 가까우리라.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나 자신 처음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같은 자리를 그저 맴돌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살면서 가슴이 무뎌져서 감동하는 힘이 줄어들어서일까. 아니면 삶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든 걸까.
분명한 건 외부 환경이 인간을 바꾸어놓는 데는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행보다는 수행이 좀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깨어나갈 필요성을 느낀다. 현실을 바꾸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내 발길은 점점 밖에서 안으로, 여행에서 산행으로 그리고 수행으로 향하고 있다. 세상의 규정과 시선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참 나가 되는 것, 본질을 사는 것, 예전에 여행에서 맛보았던 그것을 지금은 산에서 더욱 또렷하게 느낀다. 산행은 나의 관심을 여행에서 수행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하루의 수행은 작심삼일이라 실천하기 어렵지만 산행은 지루하고 힘든 길이라도 길 전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드니스는 한국과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 그리고 '옴 마니 밧메 훔'을 많이 들었다고 그 뜻을 아냐고했다. 문자 그대로는 '연꽃 속의 보석'이라고, 진리의 완성, 삶의 정수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드니스 일행이 스코틀랜드에 돌아가서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그들의 '젊음'이 현실의 장벽을 이겨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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