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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약령시의 근대건축물, 교남 YMCA에서

by 릴라~ 2023. 9. 17.

1.

 

대구 중심가 반월당 현대백화점 뒤에는 3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약령시가 있다. 대구 역령시가 번창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대구가 경상감영 소재지일 뿐 아니라 낙동강과 금호강에 접해 있어 약재 수송에 매우 유리했다 한다. 인접한 군현에 한약재의 명산지가 많았고, 대동법 실시 이후 원칙적으로 약재는 시장을 통해서만 조달해야 한 점도 이유의 하나라고 한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대구 역령시는 효종 연간에 생겨서 300년간 번창하였다

내 어릴 적 약령시는 진짜 한약방만 잔뜩 늘어선 거리였다. 길을 걸으면 한약 냄새가 자욱했다. 지금 이곳은 시내 중심가라 레스토랑과 카페, 가게가 더 많다. 염매시장 자리에 현대백화점이 들어선 이후 그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젠 거리의 한약방은 명맥만 남은 모습이지만, 대구한의약박물관이 옛 전통을 증명하고 있다.

약령시엔 한약방만 있는 게 아니다. 대구 근대유산을 간직한 근대골목이 약령시와 겹쳐진다. 계산성당, 구 제일교회, 대구근대역사관 등 대구근대건축물 중에서 이 지역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곳이 교남 YMCA 회관이다. 1914년 선교사 블레어가 지은 2층의 서양식 건물로 붉은 벽돌과 세로로 긴 격자 모양 창문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당시 대구 청년들은 여기서 모였다. 초기엔 학생 교육과 야학 장소였는데 뒤이어 3.1운동 지도자들의 회합 장소이자 신간회 대구 지부의 활동 거점으로 쓰였다.

신간회가 무엇인가. 좌우 합작의 독립운동 단체다.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그런 이념의 차이를 넘어 독립운동을 위해 뭉친 게 신간회다.

1945년 해방 이전, 19세기에서 20세기의 가장 큰 시대적 소명은 제국주의 극복이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경쟁과 착취가 극에 달해 제국주의 세력과 반제국주의 세력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뒤이어 2차대전 무렵엔 히틀러, 무솔리니 등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반 전체주의 세력의 동맹도 이루어진다. 스페인 내전 때 무솔리니에 저항한 인민전선을 후방에서 지원한 건 소련이었다. 조지 오웰, 헤밍웨이 등 후일 쟁쟁한 작가가 된 사람들이 인민전선 편에 섰는데 그럼 그들도 공산주의자인가, 전혀 아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장개석과 모택동도 국공합작을 했으며 미국과 소련도 같은 편이 되어 이차대전에 참전한다.

 

이런 세계사적 맥락을 깡그리 무시하고 참으로 무식하고 천박하게도 1943년 돌아가신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라 매도하는 진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사를 지우거나 최대한 축소시키고 싶다는 욕망 외엔 다른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그럼 그들은 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를 폄훼하고자 할까. 그 배후에 있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일본이 그걸 원한다, 말고는 모르겠다. 그러니 친일파 소리를 들을 만 한 것. 그리고 6.25 전쟁영웅 중에도 독립군 출신 훌륭한 분이 있는데 독립군 잡는 간도특설대 출신에다 윤봉길 의사가 죽인 시라가와로 창씨개명을 한 기회주의자, 백선엽을 저토록 추대하는 이유는 또 뭔가. 

 

2.

 

백년 전 3.1운동의 함성이 서린 교남 YMCA에서 이동순 선생님을 거의 20년만에 뵈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로 대구 일정 연수에 강의 오신 적이 있다. 한 달간 만난 무수한 강사들은 대개 잊혀졌지만 재미난 입담으로 내 기억에 확실히 남은 분이었다. 당시는 백석을 이야기하셨다. 백발이 성성하지만 여전히 정정하신 이동순 선생은 홍범도 장군에 개인적으로 꽂힌 이유에서 강의를 시작하셨다. 선생의 조부께서 독립운동가로 1920년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한다.

 

1950년생인 이동순 선생은 직접 조부를 뵌 적은 없지만 집안에서 바람처럼 귓전에 들려오던 조부에 관한 이야기에 신비로움을 느꼈고 살면서 마치 '유촉'처럼 조부의 음성이 길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하셨다. 그래서 문학도이면서도 대학원에서부터 독립운동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대개 식자층인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 무학의 '포수'라는 점에 깊이 이끌려 홍범도 장군을 연구하게 되셨다 한다. 하지만 자료가 너무 없어서 연구를 중단하고 있던 차에  미국 연수 중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수많은 남한과 북한, 연변을 포함한 중국 쪽 사료를 접하고 감동과 충격을 받으셨단다. 다시금 조부의 유촉을 느끼며 작업을 재개하여 서사시 '홍범도'를 완성한다. 그리고 올해 '홍범도 평전'을 출간하셨다.

 

토론자로 나온 나인호 교수의 추가 설명도 흥미로웠다. 이분은 세계사 전공이시라 한다. 60대 친구 분들이 미국이 해방시켜 줬지 독립운동가들이 뭐 한 게 제대로 있냐 할 때마다 돌으시겠단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는 일본 땅으로 종전을 맞게 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냥 일본 땅인 거고 이후 일본 사람으로, 그것도 오키나와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이등시민 삼등시민으로 살게 되었을 터. 독립운동은 우리가 일본이 아님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고 그래서 카이로 회담에서 열강들이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한 거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 사람으로 살게 되었을 거라고 열변을 토하신다.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 분야를 깊게 연구한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흐릿했던 것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지점들이 등장한다. 내 몸을 어딘가로 옮겨서 그 시간을 보낸 체험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 불가한 또렷한 감촉과 인상을 남긴다.

 

민족의 분열이 식민지가 낳은 상처라는 이 또렷한 사실을 한국이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어느 세월에, 식민지의 상처가 아물고 제대로 된 세상에 살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며 익숙한 약령시 골목길을 지나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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