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길고 무덥던 여름이라 이 여름이 영원히 계속되는 기분이었다.
다른 계절은 다 망각해버리고, 여름만 줄곧 있었던 듯한...
태풍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루만에 대기가 식고 가을 바람이 서늘하다.
여름내 천을산을 쨍하고 울리던 매미 소리도 지난 주부터 시들하더니
오늘은 아예 조용했다. 그 많은 매미들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
방학하고 일주일 시체처럼 지내다가 그 담주부터 매일
천을산 산책을 시작했다. 집에서 출발하면 왕복 한 시간 반 코스.
엄마 왈, 니가 운동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 첨 본다.
그랬다. 지난 한 달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에 산에 갔다. 더위가 너무 심해서 새벽이 아니고서는
산에 가거나 운동할 엄두도 못 낼 만한 날씨였다, 그간.
아침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는 걸 젤 싫어하는데
매일 6시 10분 집을 나섰다. 그때 공기는 그래도 숨이 막히진 않기에
곧이어 그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축복 같은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광복절 지나서 드디어 하혈이 멈췄다.
5월 초부터 3개월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출혈이었다.
집 앞 병원에서는 자궁근종이 갑자기 자라면서 생긴 출혈이라고
당장 근종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렵게 예약하여 두 달만에 찾아간 종합병원에서는
암 검사 결과가 깨끗하니 조금만 더 관찰하자고 하였다.
이건 뭐, 생리를 세 달째 하는 거랑 똑같아서
계속 관찰해도 되나, 세 달이 가까울 땐 불안감이 엄습했는데
그게 기적 같이 딱 멈추었다.
방학 때 쉬어서일까, 아니면 날마다 올랐던 등산의 효과일까.
아무튼 난 '천을산의 기적'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인생의 행복이란 게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가 다시 생각했다.
생리 같던 하혈이 멈춘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뿐하고 개운하고 맑고 행복할 수 있다니...
깨끗한 속옷을 보는 게 진짜 세 달만이다.
덥기도 하고 체력도 안 되어 아무 데로도 떠나지 않은 여름방학이었다.
매일 새벽에 가는 천을산이 나의 여행이었다.
지리산 같은 큰 산만 좋아했는데 108미터 이 쬐끄만 산이
내게 얼마나 깊은 위로와 쉼을 주었는지...
예전 가끔 낮에 올라갔을 땐 오르막이 있다고도 생각 안 하고
단숨에 올라가곤 했는데, 매일 보니
이 산에도 오르막 내리막 굽이굽이 다른 길과 풍경이 놓여 있다.
내 감각이 섬세하지 못해서 그간 놓쳤을 뿐...
흙 밟는 것도 평안과 위안이 되었고
나무의 질감도 참 좋았다.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대로 편안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은 만개한 무궁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많이 졌지만... 푸른 산을 꽃이 환히 밝히고 있었다.
천을산의 기적이 가을에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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