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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을 적다

윌리엄 모리스 - 박홍규 선생의 자유공부

by 릴라~ 2009. 9. 15.


1. 

9월부터 영남대 박홍규 선생의 '자유공부'를 듣고 있다. 학점도 시험도 아무 수강 조건도 없는 자유공부. 학벌과 취업의 노예가 된 대학 문화에 실망한 선생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강좌를 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 6시에 영남대 법정관 229호에서 열린다.

http://blog.naver.com/free_study/70051163761

미켈란젤로에 이어 지난 주의 주제는 윌리엄 모리스.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윌리엄 모리스는 현대 디자인/건축의 아버지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예술 사회주의자라고 평가받지만 박홍규 선생은 아나키스트로 본다고 했다.


맑스/엥겔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모리스는 그들의 혁명이 결국 지배자만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했다. 그가 꿈꾼 것은 자급자족의 공동체. 인간의 가장 고귀한 능력은 노동이고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인간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즉 예술로 만들 수 있는 노동을 긍정했고, 그밖의 노동은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는 그를 중세주의자라고 폄하했다. 당대 분위기에서는 그럴 법 했다고.


모리스는 대중예술을 경멸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작품만을 예술로 보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생활 예술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보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주변, 생활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그것을 펼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산업혁명이 기세를 떨치던 시대에 수공업을 예찬했고 스스로 벽지를 디자인하고 가구를 만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는 집과 마을을 스스로 만드는 삶, 생활 속에서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었다.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세상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많은 능력을 잃었다. 집을 짓고 옷을 지을 수 있는 능력, 자기 삶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 작은 새들이 둥지를 짓는 모습을 보면 정말 경이롭다. 우리가 모든 걸 다 제 손으로 할 수야 없겠지만, 돈으로 사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커질수록 삶을 향유하는 기쁨도 더 커질 것 같다.


2. 

누군가가 결국 모리스의 사상은 어느 정도의 부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가난이 인간의 창조성을 제한한다는 말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우리가 익히 아는 많은 예술가들이 가난한 삶을 살았다. 절대 빈곤은 예외가 되겠지만, 모든 것을 소비로 해결하는 것이 창조성을 더욱 제한하지 않을까. 글쎄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부를 마련해야 할까? 부유할수록 삶의 질이 더 높아질까? '삶의 질'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삶의 질, 질적으로 우수한 삶. 그것은 강도가 높은 삶이 아닐까. 강렬한 삶. 그것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은 삶, 주체적으로 관계 맺고 창조하는 영역이 많은 삶일 것이다.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부가 필요할까?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사회가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지나치게 사회화된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재에 만족하고 가난을 받아들이라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지만 가난=불행이라는 등식을 깰 필요는 있지 않을까. 적은 것으로도 자족하며 살아온 긍지 높은 자유인들이 과거엔 많이 존재했는데, 오늘날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부를 창출하고자 할 것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필요치는 줄어들 것이고,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지원이 있다면 그 필요치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3.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바람직할까? 자기 자신도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에게 바뀌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그 유토피아의 근거가 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틀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어떤 윤리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좌파는 세상에게  바뀌라고 요구하지만 자신은 달라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파는 세상에 단지 적응하려 하므로 논외다. 시야와 안목은 세계적으로, 실천은 나부터, 그렇게 가야할 것 같다.

우파의 상상력은 자본에 붙들려 있고 좌파의 상상력은 사회학의 테두리를 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서양의 사회주의가 집단적 구원의 다른 버전이라면(신 대신 복지사회가 구원하는 것이므로), 동양적 대승의 관점이 더 좋은 것 같다. 자신을 닦고 그 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 부딪힘 속에서 자기 삶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 자신과 세상을 구분하지 않는 것. 그 결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우리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우리라는 사실이다.

내게 결핍된 것은 더 많은 상상력, 자유로운 상상력인 것 같다. 현실화될 수 있는 것으로만 상상을 제한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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