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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을 적다

간디 - 박홍규 선생의 자유공부

by 릴라~ 2009. 9. 27.




간디와 물레. 간디가 추구했던 운동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영국의 옷 대신 스스로 옷을 지어입고 영국의 소금 대신 스스로 소금을 만들어먹자고 했던 간디. 그의 고향에서 뭄바이까지 걸어서 수십일이 걸린 '소금 행진'은 인도 독립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간디를 세계적 인물로 만들었다. 육십이 다 된 노인이 벗은 몸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행진하는 모습은 세계 지식인들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고 한다.

지난 주 박홍규 선생님의 자유공부 주제는 간디였다. 먼저 인상적이었던 점은 간디가 참으로 '느리게' 변화해간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어릴 때 특출난 점이 전혀 없었으며, 영국 유학 시절에도 영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거의 없었다. 남아연방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기찻간에서 1등석 표를 가지고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차별받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그는 신분증을 불태우는 사건 등 비폭력/무저항 방식으로 남아연방에서 인도인의 권리 운동을 했다. 남아연방에서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고 아쉬람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자기 나름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공부해간다. 재미있는 점은 그 와중에도 보아전쟁 및 1,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편에 참전한다. 간호병이므로 직접 총을 들지는 않았으나. 이런 독립운동의 모습을 우리 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박홍규 선생이 말씀하셨다.

서서히 명성이 높아지던 간디는 40대 후반에 인도로 약 이십년만에 귀국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독립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며 영국과 잘 타협해서 인도인도 평등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과격한 면이 전혀 없었으며 늘 조용한 어조로 채식, 기도, 진리 이런 이야기만 소근소근 했다고 한다.

간디를 일약 세계적 인물로 만든 것은 유명한 소금 행진이다. 영국이 식민지를 통치하던 방식은 프랑스와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철저히 프랑스 언어, 정신, 문화를 보급하고자 했다. 이는 식민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반면에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뭐든 네 맘대로 하라고 허용하고, 대신 세금만 걷어갔다. 예컨대 프랑스 식민지에선 원주민들이 사람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프랑스식 인권을 강요했다면, 영국은 인도가 과부를 불태워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고.

간디는 이러한 영국의 세금 정책에 근본적 제동을 건다. 인도의 면화로 영국은 옷을 만들어 다시 인도에 팔았는데, 물레 운동으로 그것에 저항했으며, 영국이 식료품 중에서 유일하게 독점권을 갖고 있던 소금을 사먹지 않고 만들어먹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세계의 3분의 2를 지배하던 대제국 영국에 한 자그마한 벗은 사람이 대드는 모습은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 어떤 정치인도 간디처럼 벗고 설친 적은 없다고 선생이 말씀하셔서 다들 웃었다. 팬티 비슷한 것만 입은 간디의 옷은 당시 해방과 진보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이후 인도 독립의 결과는 박홍규 선생에 따르면 신화가 만들어낸 측면이 많다고 한다.

영국왕 조지 1세와의 일화가 재미있는데, 그는 당시 영국 수상에게 간디가 옷만 입고 오면 만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간디는 왕을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그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다. 박홍규 선생은 간디가 매스컴과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한 교활한 정치인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로맹 롤랑은 간디가 살아있을 때 그의 평전을 쓴다.

박홍규 선생은 간디가 당시 영국의 지배라는 상황에 알맞는 아주 실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보았다. 비폭력 무저항이 본질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가장 알맞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방식은 이후 마틴 루터 킹이나 만델라 등으로 이어진다. 약자들의 인권 신장에 굉장한 영감을 준 점이 간디가 기여한 바라는 것.

생전에 간디를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단 '안 베드칼'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는 천민 중의 천민이었으며 카스트를 비판하고 불교로 돌아선 유명한 독립운동가다. 박홍규 선생은 안 베드칼 입장에서는 그의 견해가 일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간디는 크샤트리아 출신이고 생전에 카스트 제도를 없앤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카스트가 부당하지만 없앨 수 없다고 본 것이 간디의 관점이라고. 그 밖에도 자신의 자녀들을 전혀 돌보지 않은 점, 금욕의 선언, 십대 소녀들과 늘 함께 지냈던 점(강요는 아니었으나)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간디급의 인물이 없냐고 질문한 사람이 있었는데, 일본과 영국의 통치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영리하고 꾀많은 인물은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세계에 영감을 준 인물이 없는 것은 맞는 말씀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 대한 세계인의 지극한 관심과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 대한 관심은 비교 자체가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간디의 삶과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삶만을 단순 비교한다면, 솔직히 김구, 이회영, 신채호, 안중근, 안창호, 정화암, 이육사.... 이 분들이 나는 더 멋있다. 개인적 취향이긴 하지만, 힌두교 문화권의 간디보다 이분들한테서 더 묵직한 인격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분들이 더 멋있고 더 지적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를 말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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