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삶과 비본질적인 삶을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는 없지만, 좀 더, more, 본질적인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삶일까. 그것은 그냥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삶이 아니라 삶의 엑기스가 담긴, 보다 강도 높은 삶이 될 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와 목적에 충실한 삶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이유와 목적이란 것이 미리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아니고, 전생으로부터 내려온 업보 같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 생을 살면서 자기 삶의 부서진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기 고유의 욕망과 꿈을 맞닥뜨려 가는 과정 같은 것일 것이다. 개개인에겐 저마다 유니크한 목적과 이유들이 존재하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인류가 가고 있는 큰 방향 속에 우리들 각자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났지만 그 길에서 수많은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 너와 나의 차이를 넘은 깊은 연대감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본질적인 삶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 목적에 충실한 삶이라고 했는데, 이 이유와 목적은 자신의 현실적 자아가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세상의 부름에 응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소리라고 할 것이고, 불교도들은 참나의 소리, 불성을 깨닫는 삶이라고 할 것이고, 융은 자신의 깊은 무의식의 소리라고 할 것이다. 이 소리를 따르는 삶, 사랑에 이끌리는 삶, 사랑으로 채워가는 삶이다.
이것은 도덕적인 삶이라기보다는 미학적 삶,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그것을 향유하는 삶에 가까울 것이다. 누군가는 산에, 누군가는 그림에, 누군가는 학문에 매혹되어 그 속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하나로부터 모든 것을 보는 삶. 그 하나는 세상의 어떤 정수를 담고 있는 하나이므로.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상을 보고, 한 떨기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삶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충분히 음미하는 삶. 양보다는 질적 깊이를 추구하는 삶.
본질을 살고 싶다면 탐욕 대신에 사랑이 필요하다. 열 개의 사금파리 대신 한 개의 진짜 보석을 찾아나서는 사랑,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랑.
궁극적으로 그 보석은 자기 자신이다. 신영복 선생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자신의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말했듯이, 자신을 아는 것은 저 머나먼 별들의 운행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깊이를 체험했을 때, 우리는 생의 의미를 충실히 느끼게 된다. 가진 것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깊이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므로. 그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놓게 하므로.
* 천안호 장병들이 하루빨리 무사히 구출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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