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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계'를 지키는 자유

by 릴라~ 2011. 4. 17.

아침에 뜻밖의 메일을 하나 읽었다. 안면은 없는데 아마도 홈페이지 회원들에게 메일을 발송한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우연히 알게 되어 두 세번 정도 메일을 번역해준 적이 있지만 내가 불자가 아니라서 곧 잊어버린 모임인데, 메일을 읽으면서 안타까움이 일었다. 쓴 분은 담담하게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숭산 스님의 제자 중 한 분이 유럽에 한국 절을 짓고 있는데, 그 분이 법문도 잘하고 인기가 있어서 한국에서 많은 후원을 받고 있었다. 메일을 쓴 분은 유럽에 거주하는 교포 분으로 그곳의 불사를 도와드리다가 스님의 다소 복잡한(?) 여자 관계를 알고 작년에 일을 그만두었는데, 한국의 후원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대처승으로도 얼마든지 사찰을 운영할 수 있고, 재가 신자의 신분으로도 충분히 명상을 지도할 수 있는데, 스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조계종에서 계를 받은 비구승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후원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비구승으로 비춰지려고 노력한다고.

수도승의 개인적 사생활 문제야 여기서도 더러 일어나지만 한국에선 천 육백 년의 전통이 있는지라 그것이 전체를 흔들지 않는 지엽적인 일이 되는데,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관음선종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앞으로 갈 길이 멀겠다 싶었다. 불교는 자기를 먼저 닦고 그 힘으로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종교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이가 얼마나 큰 뜻을 펼쳐갈 지도 의문스러웠다. 스탠스를 명확히 하여 결혼한 대처승으로 지내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돈 때문에 이중적 생활을 하는 이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유럽에서는 대처승, 비구승을 구분하지 않고 비구승에 대한 우대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문화 풍토 속에서 한국 불교의 정신이 제대로 전해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싶었다. 문화적 장벽이 의외로 굉장히 높아 보였다. 큰 진리 안에서 본다면 대처승/비구승을 구분하는 것 등이 큰 의미가 없겠으나, 적지 않은 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영적 카리스마를 세상을 살리는 데 쓰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데 쓰는지라 자신이 선택한 길에 따르는 '계'를 지키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뿐 아니라 아름답게 여겨졌다. 한때는 '계'가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이 인간을 '살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법륜 스님은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이 정말 바른 길, 정도인지 아닌지는, 그곳에 속한 사람들이 '계'를 지키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고 하신 적이 있다.  명확한 말씀인 것 같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인지라 한 가지를 포기하고 지키지 않게 되면 어느새 두 가지, 세 가지를 지키지 않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스멀스멀 낡아가고 타락한다. '계'를 지키는 것은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방어막이다. 지키는 것이 조금 더 어렵지만, 그것이 바른 길 곧 정도이다.

내가 조금 더 젊을 때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다. 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욕망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지닌 지적 카리스마에 눈이 가려서 그의 내적 본질을 통찰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다른 면에선 그렇지 않았지만, 인간에 관해서라면 어리석고 무지했다고 볼 수 있겠다. 불분명한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했다. 나 자신의 욕망과 의도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기에 타인의 내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리라.

자유란 무엇일까. '계'를 거뜬히 지킬 수 있고, 마음 먹은 것, 하기로 정한 것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정신적/물리적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가. 태양이 날마다 동쪽 하늘에서 솟아오르듯이 그렇게 날마다, 변함없이 내가 가기로 한 길을 따라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우연들에 열려 있고 그것을 즐기되, 그 우연적인 것들에 휩쓸려가지 않고 주체적인 의지에 의해 그것들을 삶의 또다른 자원으로 변환시켜가면서 미지의 땅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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