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가 중에 '묵상' 이란 곡이 있다. 세계 평화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담긴 노래인데 대학 시절에 간간이 듣고 불렀지만 작사/작곡자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작년에 KBS 스페셜의 <울지마 톤즈>를 보고 그 노래의 지은이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 수십 년의 내전으로 폐허가 된 땅 수단에서 의사이자 신부로 봉사했던 고 이태석 신부가 바로 그였다.
KBS 스페셜은 그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뜨고 난 후 그 남은 자취를 추적하는 일종의 순례기이다. 그의 흔적이 담긴 톤즈 마을과 인근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생전에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함께 담았다. 의사가 없는 지역이라 환자가 하루 200-300명씩 들이닥칠 때도 많았다 한다. 맨 땅에서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짓고, 백신을 냉장고에 보관하려면 전기가 필요해서 태양열 집열판을 직접 만들고, 좌우 발 크기가 다른 나환자들을 위해 신발을 지어주고, 전쟁으로 마음이 부서진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고 밴드부를 만들고......
가진 재능도 얼마나 많았는지 그 짧은 생애가 참으로 아까웠다. (어릴 때 돈이 없어 독학으로 오르간/피아노 등을 배운 걸 보면 음악적 재능은 천부적인 듯 싶다.) 열악한 환경에서 거친 음식을 먹고 1인 10역을 하며 분투했으니 암이 안 걸릴 수 없겠다 싶었다. 인터뷰에 나온 70대 외국 수사님이 이태석 신부 대신 자기가 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하셨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수단에서의 8년은 아쉬움이 너무 컸다. 하늘을 원망할 법도 한데 투병 중에도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울지마 톤즈> 극장판도 나왔지만 바빠서 챙겨보지 못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이태석 신부가 직접 쓴 단 한 권의 책이다. 2년에 걸친 투병 기간 동안 주위의 권유로 쓴 에세이였다. 그분의 내면 풍경이 잔잔하면서도 뜨겁게 드러나 있어 한 꼭지 한 꼭지마다 숨을 잠시 멈추어가며 읽었다. 그가 마음으로 이해하는 수단이라는 나라, 밤하늘 가득 별빛이 쏟아지는 곳이지만 처참한 가난과 비합리적 전통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곳을 만났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겪은 어려움과 슬프고 고단한 현실이 내용의 한 조각을 이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기적 같은 순간들과 넘치는 환희와 삶의 작은 아름다움들이 그의 나날을 수놓고 있었다. 한 조각의 분노와 열 조각의 사랑을 지닌 이였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이 세상에서 만난 '기쁨'의 기록이자 진한 '우정'의 기록이다. 제목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그대로. '어둠 속에서 친구를 얻으면 어둠도 어둠이 아니다'란 시구가 생각난다. 우정의 빛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랑하기에 부족한 곳은 없었다. 책장을 덮으며 그분이 참 행복한 삶을 살았음을 느꼈다.
그 우정은 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적인 것에 가까웠다. 톤즈 사람들은 이 세상 가난한 곳이 대개 그러하듯이 문화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미신과 억압적 관습 속에 살아가고 있었지만, 문명화된 사회가 잃어버린 인간성의 순수하고 고귀한 면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쫄리 신부님(이태석 신부의 애칭)과 톤즈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었다. 육체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비참함에서 헤어날 수 없지만-그래서 젊음(이라기보다는 어림)과 싱싱함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영혼의 눈으로 보면 달라진다. 그는 하느님의 눈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았다. 모든 아름다운 관계는 그래서 신적인 것이다.
KBS 스페셜을 보면서는 '천사가 따로 없네, 너무 고생했다, 어이구 나라면 절대 저런 곳에서는 못 살 거야, 짧은 생애가 너무 안타깝다' 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그분이 48년의 삶을 기쁘고 완전하게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100년을 시시하게 사는 것보다 짧은 생애를 삶답게 사는 것이 더 나으리라. 요새 나는 100년을 시시하게 사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는데-정신의 노화가 분명하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그 자체는 그저 목숨에 대한 집착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교적 어휘가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다큐나 영화를 본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영상이 아닌, 글로써만 전달할 수 있는 그의 소박한 내면과 그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또한 '멀리' 있는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기를.
KBS 스페셜은 그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뜨고 난 후 그 남은 자취를 추적하는 일종의 순례기이다. 그의 흔적이 담긴 톤즈 마을과 인근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생전에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함께 담았다. 의사가 없는 지역이라 환자가 하루 200-300명씩 들이닥칠 때도 많았다 한다. 맨 땅에서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짓고, 백신을 냉장고에 보관하려면 전기가 필요해서 태양열 집열판을 직접 만들고, 좌우 발 크기가 다른 나환자들을 위해 신발을 지어주고, 전쟁으로 마음이 부서진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고 밴드부를 만들고......
가진 재능도 얼마나 많았는지 그 짧은 생애가 참으로 아까웠다. (어릴 때 돈이 없어 독학으로 오르간/피아노 등을 배운 걸 보면 음악적 재능은 천부적인 듯 싶다.) 열악한 환경에서 거친 음식을 먹고 1인 10역을 하며 분투했으니 암이 안 걸릴 수 없겠다 싶었다. 인터뷰에 나온 70대 외국 수사님이 이태석 신부 대신 자기가 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하셨는데,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수단에서의 8년은 아쉬움이 너무 컸다. 하늘을 원망할 법도 한데 투병 중에도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울지마 톤즈> 극장판도 나왔지만 바빠서 챙겨보지 못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이태석 신부가 직접 쓴 단 한 권의 책이다. 2년에 걸친 투병 기간 동안 주위의 권유로 쓴 에세이였다. 그분의 내면 풍경이 잔잔하면서도 뜨겁게 드러나 있어 한 꼭지 한 꼭지마다 숨을 잠시 멈추어가며 읽었다. 그가 마음으로 이해하는 수단이라는 나라, 밤하늘 가득 별빛이 쏟아지는 곳이지만 처참한 가난과 비합리적 전통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곳을 만났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겪은 어려움과 슬프고 고단한 현실이 내용의 한 조각을 이루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기적 같은 순간들과 넘치는 환희와 삶의 작은 아름다움들이 그의 나날을 수놓고 있었다. 한 조각의 분노와 열 조각의 사랑을 지닌 이였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이 세상에서 만난 '기쁨'의 기록이자 진한 '우정'의 기록이다. 제목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그대로. '어둠 속에서 친구를 얻으면 어둠도 어둠이 아니다'란 시구가 생각난다. 우정의 빛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랑하기에 부족한 곳은 없었다. 책장을 덮으며 그분이 참 행복한 삶을 살았음을 느꼈다.
그 우정은 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적인 것에 가까웠다. 톤즈 사람들은 이 세상 가난한 곳이 대개 그러하듯이 문화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미신과 억압적 관습 속에 살아가고 있었지만, 문명화된 사회가 잃어버린 인간성의 순수하고 고귀한 면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쫄리 신부님(이태석 신부의 애칭)과 톤즈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었다. 육체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비참함에서 헤어날 수 없지만-그래서 젊음(이라기보다는 어림)과 싱싱함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영혼의 눈으로 보면 달라진다. 그는 하느님의 눈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았다. 모든 아름다운 관계는 그래서 신적인 것이다.
KBS 스페셜을 보면서는 '천사가 따로 없네, 너무 고생했다, 어이구 나라면 절대 저런 곳에서는 못 살 거야, 짧은 생애가 너무 안타깝다' 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그분이 48년의 삶을 기쁘고 완전하게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100년을 시시하게 사는 것보다 짧은 생애를 삶답게 사는 것이 더 나으리라. 요새 나는 100년을 시시하게 사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는데-정신의 노화가 분명하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그 자체는 그저 목숨에 대한 집착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교적 어휘가 군데군데 등장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다큐나 영화를 본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영상이 아닌, 글로써만 전달할 수 있는 그의 소박한 내면과 그속에 담긴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또한 '멀리' 있는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기를.
... 그래도 이런 골통들에게 왠지 은근히 정이 간다. 괜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장난을 걸고 싶고 시비를 걸어 반응을 보고 싶어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것을 보면 나도 혹시 골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의 인내심을 단련시켜 주고 나의 성소를 굳건히 지켜주는 아이들이 바로 골통들이기 때문이다. 골통들은 운동선수들이 다리에 차고 뛰는 모래주머니 같은 아이들이다. 매고 달릴 때 힘이 들긴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모래주머니가 종아리에 알통이 배게 하듯 우리의 인내심에 알통이 배게 하는 인물들이 바로 요놈들이다. 잘만 하면 이 알통 덕에 나도 골통도 천국이 있는 곳까지 끝까지 함께 뛰어 같이 천국 문으로 골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골통들의 심리는 엄청나게 복잡한 삼차방정식 같지만 알고 보면 답만은 간단하다. 'X=사랑', 즉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한 행동을 통해 어려운 방정식을 우리에게 던져 놓고 우리가 그것을 푸느라 고민하는 사이 골통들은 뒤에서 애처롭게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답이야 간단하지만 알고 있는 답이 전부는 아니다. 방정식 속에 꼬여 있는 그들의 삶을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걸릴 수도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기다림이요 인내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끝까지 우리의 골통들을 기다려 주다보면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pp56)
골통들의 심리는 엄청나게 복잡한 삼차방정식 같지만 알고 보면 답만은 간단하다. 'X=사랑', 즉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한 행동을 통해 어려운 방정식을 우리에게 던져 놓고 우리가 그것을 푸느라 고민하는 사이 골통들은 뒤에서 애처롭게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답이야 간단하지만 알고 있는 답이 전부는 아니다. 방정식 속에 꼬여 있는 그들의 삶을 인내심을 가지고 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걸릴 수도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기다림이요 인내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끝까지 우리의 골통들을 기다려 주다보면 작은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p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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