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책 이야기/에세이

플래닛 워커 - 존 프란시스

by 릴라~ 2011. 8. 9.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이라는 부제에 홀려서 읽었다. 냥냥군이 마침 집에 와 있어서 읽고 나서 말했다.

"아, 진짜 부러워."
"누나도 학교 때려 치우고 가고 싶은 데 가면 되지."
"내 노후는 어떡하고?"
잠시 둘 다 침묵에 잠겼다. 서로 비슷한 처지인지라. 

대강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처럼 일찍이 어떤 내적 확신에 의해 남들이 이해 못하는 길을 두려움 없이 선택한 사람. 그렇게 약 이십 여년이 흐르고 그가 선택한 길이 메아리가 되어 세상에서도 반향을 일으키는 사람. 반면에 사회의 기준에 따라 이십 년쯤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회의와 공허감을 느껴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사는 사람. 물론 대부분은 이도 저도 아니겠지만.

후자의 경우도 훌륭하지만, 나는 전자의 사람들이 특히 부럽다. 후자의 사람들은 살아보고 길을 바꾼 경우지만 전자의 사람들은 자기 가슴의 소리를 믿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나갔기 때문이다.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게 바로 젊음의 특권이겠지. 젊음이 위대한 이유는 단 하나, 뛰어들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반대 경우도 있다. 젊을 때 빈민운동 하다가 '먹고사니즘'이 최고임을 깨닫고 반대 극으로 가버린 인물들. 김문수, 이재오 등등)

저자는 샌프란시스코의 기름 유출 사고를 보고 무언가 행동해야겠다고 느낀다. 자기 한 사람만이라도 무언가 실천해야겠다고. 그래서 차를 타지 않고 살기로 작정하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내적 이끌림에 의해 아예 침묵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던 어느날 도보여행을 시작한다. 매년 스스로 침묵 서약을 갱신하면서 그는 여행을 계속하고 여행 중에 만난 인연에 의해 두 도시에서 머물면서 환경학(특히 기름 유출 관련) 석사/박사 과정을 공부하기도 한다. 약 이십 년에 걸친 여행 끝에 그는 말문을 연다. 그동안 세상이 변하여 그가 홀로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장점이 있다면 그의 개인적 선택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존중했다는 점이다. 저자의 특별한 라이프 스타일이 그가 어떤 것을 배우고 행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대학을 다니고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를 고용하기로 한 직장은 그가 두 달 걸어서 그곳에 도착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기꺼이 수용했다.

이십 년간 걷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지만 저자가 부러운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째 순위 안에는 들어가지만. 이십대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좀 긴 순례여행을 하는 거였다. 일 년... 혹은 그 이상. 내가 충분하다 느낄 때까지. 도보도 좋지만 꼭 도보여행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내면의 작은 씨앗이 어떻게 자라고 꽃피우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서 침묵하며 한 일 년 살아보거나 인도에서 한 일 년 요가를 배우고도 싶었다(지금은 요가가 유행이지만 당시엔 요가 학원도 거의 없었다). 내 마음속 작은 기쁨이 어떻게 더 큰 기쁨으로 변화해가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내 내면의 순례가 일 년에 끝이 났을지 몇 년 더 이어졌을지. 한 마디로 말해 졸업하고 돈 벌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단 이야기다. 코이카에 원서를 내서 서류전형을 통과해놓고 면접 보러 안 간 것이 두 번이다. 임용시험에 떨어지면 하와이에 자원봉사하러 가야지 하기도 했었다. 야생 거북이를 보호하는 무슨 환경단체를 알아보곤 했었는데. 시험에 붙는 바람에 물 건너갔다.

다 지난 이야기다. 스물 아홉 적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는 바람에 몇 달에 한번씩 계속 병원에 씬지로이드 타러 가야 해서 장기간 외국 체류는 영영 멀어졌다. 얼마 전에 경대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이제 십 년이 다 되어 간다고 일 년에 한 번만 오면 된다고 했다. 약도 일 년치 한꺼번에 주겠다고. 아! 드디어 해방이구나 했는데 웬걸, 건강검진 받다가 다른 데 탈이 생겨서 다시 몇 달에 한 번 병원 가게 생겼다. 내가 생각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수영장 가면 수영 강사로 오해받을 만큼 겉보기는 튼튼하다. 아파트 13층까진 그냥 가볍게 걸어다니는데, 선천적으로 면역 체계가 약한 건지... 에휴...

나의 침묵여행은 길어야 며칠 정도였다. 정토회의 4박 5일 명상과 그보다 훨씬 전, 서강대에서 한 8일간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8일이 가장 긴 경험이다. 삼십년 넘는 삶에서 단 8일도 침묵 속에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당시 나를 놀라게 했다. 내 마음이 고요하니 온 세상이 함께 고요와 평화에 젖어든 특별한 나날이었다. 그 침묵 속에 한번 젖어들자 집에 돌아오기가 싫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주위 모든 것이 낯설고 참으로 생생했다. 소리도 칼라도 모두 특별하게 빛이 났다.

단 8일도 그랬었는데 17년간의 침묵은 대체 어떤 것일까. 저자는 길 가던 사람이 총구를 자기 앞에 들이밀었을 때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이대로 기쁘게 죽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총을 집어든 사람은 총을 발사하지 않고 떠나고 저자는 미소 지으며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삶과 죽음조차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 상태. 기꺼이 살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경지. 침묵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젊은 날 내가 발견한 작은 기쁨을 키워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광맥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캐기 위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있는 듯 했지만 캐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 빛은 잊혀지고 지워졌다. 어느 순간 보니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다. 마음의 빛을 잃어버렸으니 삶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지사다.

그 빛이 살아 있을 때는 아주 작은 일도 삶의 옷을 입고 내가 있는 곳을 밝혀주었지만, 그 빛을 잊고 나서는 어떤 일도 지속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지 못했다. 기쁨의 원천은 사라졌고 때때로 작은 행복을 맛보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이냐시오 피정 때 지도 수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허무와 무상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라고. 그것은 우리가 삶에 치이고 지쳤을 때 드는 느낌이라고.

서른 서넛쯤부터 시작된 방황이 좀 길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론 별일 없었으나 마음은 검은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넘치게 행복하던 때가 있었으나 다시 그런 날이 찾아올지 의심스러웠다. 봄날은 영영 멀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처럼 찬란한 때가 다시 올까. 머리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가슴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감히 기대치도 못했던 삶'을 꿈꾸었었다. 그 어떤 성공도 명예도, 눈부신 성취 같은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통짜로 온 마음과 영혼으로 느끼면서, 겉은 낡아가도 눈빛만은 끝끝내 살아있는 그런 삶. 우리 가슴이 욕심으로 물들지 않고 우리의 사랑과 열정이 타인의 희생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일 것. 평범한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삶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의연하게 살지 못했다. 그때그때 눈앞의 일에 치이면서, 눈앞을 가로막는 온갖 것들에 화를 쏟아내면서, 더 크게 멀리 보지 못했다. 마흔이 가까워오니 '그릇'이란 말의 의미를 알겠다. 내 그릇이 적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희망을 갖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일에도 약했고,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오늘의 어둠을 헤쳐가는 힘도 부족했다. 장기적인 전망은 사람을 낙관적으로 만든다. 그 어떤 현실의 조건도 우리의 한계로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것을 내일의 자원으로 변환시키는 힘을 갖게 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날 때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장기간 떠나는 건 어렵고(언젠가 그럴 기회가 또 오겠지)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일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제대로 된 거리를 확보할 때 시야가 열린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더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인격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직업인으로서 우리가 맡은 역할들은 갈아입는 옷과 같아서, 이 모든 것으로도 다 표현하고 나타낼 수 없는 '나'가 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진정한 가능성과 책임과 실존에 관한 문제이다.

한 달에 하루 정도 완전히 침묵하는 날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하루 속에, 일주일 속에, 한 달 중에, 일 년 가운데, 침묵의 시간이 점점 더 많이 흐르게 할 수 있으리라. 하루하루 침묵의 강을 따라 걷는 여행. 그 강변에서 우리는 세상의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될 지도. 우리의 하루가 그저 스쳐가는 하루가 아니라 영원에 닿아 있는 하루임을 알아볼 지도.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강변의 풍경이 우리를 변화로 이끌 것이다.

이 책, 번역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문장을 현재진행형 시제로 번역했는데, 원문이 그런지 아니면 다른 효과를 노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몇 백 페이지나 되는 내용이 다 현재 시제라서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그 점이 읽기를 방해했다.



공간을 이동하는 순례는 내면의 여행을 겉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이며,
내면의 여행은 외적인 순례에서 발견하는 의미와 신호를 토대로 내면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두 여행 중 하나만 해도 되지만 둘 다 하는 것이 제일 좋다.
- 토마스 머튼


우리는 탐험을 그만두지 않으리.
탐험의 끝은 우리가 시작했던 그곳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그곳을 난생 처음 보듯이 바라보는 것.
- T. S. 엘리엇


플래닛워커:아름다운지구인22년간의도보여행,17년간의침묵여행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존 프란시스 (살림, 2008년)
상세보기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