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을 향해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의 사물함이 놓인 모퉁이를 별 생각 없이 지나칠 무렵, 마침 그 앞에 있던 남학생 한 녀석이 인사를 하더니 말을 붙인다.
“선생님,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남학생들이야 복도에서 마주쳐도 대개는 고개만 끄덕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의외의 다정한 인삿말이 바깥 날씨만큼이나 서늘해지던 마음을 순간 온화하게 녹여주었다. 속으로는 ‘오늘 정말 피곤한 날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오늘 꽤 괜찮은 날인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러자 그 녀석이 이렇게 대답한다.
“선생님이 늘 저희에게 오늘은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셔서요.”
“아, 그랬니?”
그 녀석과의 짧은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오늘 기분은 좀 괜찮니?’ 생각해보니 내가 교실이나 복도에서 학생들과 마주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공부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에 대한 안쓰러움에서 나온 말이지만 조금은 의례적인 인삿말이어서 그 말에 딱히 주의를 기울인 적은 없었다. 같은 말을 덩치 큰 고등학교 남학생의 입으로부터 다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말에 담긴 배려와 존중의 힘을 알아차린다. 아마 그 남학생도 어느 날인가 내가 별 뜻 없이 던졌던 그 말이 마음에 따스하게 박힌 순간이 있었던가 보다.
학교에 있으면 해가 갈수록 학생들의 말이 거칠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세상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말’만 보면 확실히 나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초임교사 시절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욕설을 목격할까 말까였는데, 요새는 하루에도 수십 번 육두문자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온다. 교육은 계급적인 의미에서나, 시민적 덕성 함양의 측면에서나, 한 인간의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데 학생들에게 문화의 ‘하류화’는 뚜렷이 감지된다.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면 이 모든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날마다 국어수업을 하는 교사로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 교육의 방향이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국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낱낱의 말 속에는 그 말을 만들어온 겨레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삶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건축물이나 유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말’이야말로 조상이 물려준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말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만들어져 왔고 지금도 창조되고 있으며 우리는 24시간 그 말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단지 물리적인 환경 속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언어는 우리 ‘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말이 좋아지면 이 세상도 좋아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입에 발린 좋은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진심이 담긴 말, 뜻이 왜곡되지 않고 핵심을 보여주는 정직한 말, 품위 있고 아름다운 말을 쓰자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뉴스, TV 인기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우리 삶이 어떤 위기에 놓여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언어 속에서 우리 존재가 온전하게 버틸 수가 없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각박하게 여겨지는 이유 중의 하나로 언어문화의 수준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싼 언어환경, 특히 언론매체의 언어가 너무 거칠고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개인의 삶과 인간관계에도 정말 중요하다.
그렇지 않아도 사춘기 학생들은 저속한 말에 사로잡히기 쉬운 나이다. 닐 포스트먼은 자기표현을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 학생들은 어휘력의 부족으로 욕설이나 음란한 말이 진심을 전하고 정직하며 허심탄회한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저속한 말은 학자들의 잘난 체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욕설과 같은 ‘센’ 말이 진심을 전한다고 느끼고 그 말을 일삼다보면 정작 전달해야 하는 내용에는 주목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센 말에 길들여질수록 어휘력은 빈곤해지고 미련함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선생님,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고등학교 남학생의 수수한 한 마디 인삿말이 오래 마음에 남아 생각의 여지를 주었다. 말들이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거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배운 하루였다. 내가 듣고 싶은 말들, 세상에 유통시키고 싶은 말들을 좀 더 많이 하며 살고 싶어지기도 했고, 삶이란 것이 우리의 행위와 말이 의외의 곳에서 자라 되돌아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그대로 기쁨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 각종 대중매체의 영향력에 비하면 교실은 힘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운 말을 전하고 유통시키는 장소로서 우리에게 교실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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