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문장, 연륜에서 우러난 깊이, 진부하지 않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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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ㅈ럼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금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p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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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김 감독의 마니아가 아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고 길지 않은 메모라도 남겨놓은 경우는 '수취인불명'과 '빈집'을 보았을 때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김 감독의 영화를 뒤늦게라도 빠짐없이 보려고 애썼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변변치 못한 학력으로 제일급의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존경해야 할 사람이었으며, 이런 경우에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을 그가 거의 모두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이 저 자신의 야만성을 다 끄집어내어 우리가 눈감은 채 떠받들고 있는 이 삶의 밑바닥을 휘저어 고발하려 하는데, 그 처절한 분투를 모른 체하며 최소한의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이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아보자는 속셈과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해내고 설득력 있는 영상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상상력의 튼튼함일 것이다. 잔인성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끌어내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체의 역량이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은 튼튼한 상상력을 지녔으며, 그 괴물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마음들과의 싸움에서도 우리 시대에 가장 높은 투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이 그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그가 찍은 열다섯 편의 영화가 그때마다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도 흥행에서는 모두 실패했기에 그는 희생자인 것이 분명하다.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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