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편지는 수업 시간에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텍스트다. 언젠가 한 번 시도하고 싶어서 갈무리해둔다.
'어린왕자'와 같은 고전뿐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현실을 들여다보는 텍스트도 읽을 가치가 있다. 게다가 전태일 열사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태어난 작가가 이상화, 현진건(서울에서 활동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음)이고, 이육사 시인은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대구가 활동의 근거지였다. 동요 '기러기'를 쓴 아동문학가 윤복진, 이상화 시인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백기만 시인, '봄은 고양이로다'의 이장희 시인도 있다. 이 중에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상화, 이육사, 현진건, 전태일, 이 네 명을 좀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현진건은 대구와 서울 어디에서도 안 챙겨서 서울에 남아 있던 한옥 생가가 헐려 이미 '집터'라는 표석만 있으며, 대구에 있던 이육사 시인의 청년기의 생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지금 철거 위기에 있다고 한다. 과거엔 가난해서 못 챙겼다지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어도 별 반 다를 게 없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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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 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여 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 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 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
근로감독관님께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 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월간조선, 『사료해방40년』『월간조선』1985년 신년호 별책부록 「전태일평전」, 조선일보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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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1970년 11월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이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근로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들을 요구하며 보낸 편지이다.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자이며 노동운동가로,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자살하였다.
전태일은 1965년 견습공으로 평화시장 ‘삼일사’에 입사했고, 1966년 ‘통일사’에 재봉공으로 전직을 했으며, 1967년 재단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착취당하는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을 돕다가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면서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조직하였다가 위험 분자로 몰려 해고당하였다. 바보회 역시도 와해되었다.
그 뒤 전태일은 서울시청과 노동청, 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호소하였고, 1970년 9월 16일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또 같은 해 10월 6일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에게 제출하였다. 노동청은 10월 17일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11월 13일 1시 30분경, 전태일과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근로기준법」을 고발하는 의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결의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평화시장 앞에 모였다. 이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때 경찰이 제지하며 해산을 종용하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붓고 성냥불을 그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뒤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제성장의 그늘과 노동조합의 유명무실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언론 매체는 노동문제를 다룬 기사와 보도를 연일 쏟아 냈다. 대학생들은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 추도식과 시위 등을 전개하였고, 종교계도 추도예배로 전태일을 추도하며 노동문제를 고발하였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 11월 17일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최초의 민주 노조를 탄생시켰다. 1971년도 노동자의 단결 투쟁은 1,600여 건에 달했는데, 이 수치는 전년도 투쟁 건수 165건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전태일의 죽음은 그 뒤 한국 사회 민주화의 주요한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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