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발표 준비를 하며 함민복 시인의 ‘사과를 먹으며’를 선택했다. 교과서 외 작품이지만 한번은 다뤄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가 십 년도 더 전인데 당시엔 참고자료로 쓰고 주 텍스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동료 교사들에게 공개하는 수업이다 보니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었다. 예전엔 이 작품으로 어떻게 수업안을 짤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번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교과서 대단원 주제는 ‘어떻게 읽을까’였다.
어떻게 읽을까. 이는 한 단원의 주제가 아니라 실은 국어교육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읽기교육, 즉 텍스트와의 소통은 국어교육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학원을 그렇게 많이들 다니는데 아이들의 읽기 실력은 왜 점점 낮아지는 것일까. 좋은 책을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전교에 몇몇은 아주 뛰어나다. 하지만 평균 이하의 학생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이 문제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대학생들의 일본어 실력이 점점 낮아지는 현상을 두고 영어 조기교육과 상관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이를 실증해줄 구체적인 연구성과는 없다. 좀 더 확실한 물증은 스마트폰이다. 요즘 아이들에겐 유투브가 가장 친숙한 매체다. 말 그대로 ‘읽는’ 세대가 아니라 ‘보는’ 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보는 것은 쉽지만 휘발성이 강해서 머릿속에서 그냥 휙 스쳐 지나간다. 보고 난 이후의 효과 역시 읽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보는 행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아요, 싫어요’ 등의 단순한 반응을 유도하는 데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서 문제해결 능력이나 고차원적 사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본들 정보의 소비자에 머물 뿐 지식의 창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읽는 것은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일단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가는 행위 자체에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문장과 문단이 모여 이루어진 한 편의 글에서 스스로 의미 덩어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읽기 주체가 자신의 지성을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읽기는 단순히 문자의 의미를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글의 배후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겪은 삶의 시간과 그가 헤쳐 간 시대의 풍경이 가로놓여 있다.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충분히 말하지 않은 행간까지 고려하면서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그가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과 상상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읽기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에 독자가 참여하는 고도의 지적인 활동이다. 왜 작가의 글을 읽는가. 그가 우리 혹은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 세상을 더 예리하고 섬세한 눈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며 독자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간다. 이 과정에서 어휘력이 늘어나고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 즉 쓰기 능력의 신장을 덤으로 얻는다. 그간 잘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현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우리 국어교육의 문제는 텍스트에 이렇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글을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작품으로 여기지 않고 교육과정이 정한 특정 ‘기능’을 익히기 위한 수단으로 접근한다. 한 편의 글은 텍스트와의 만남이 낳는 풍성한 즐거움을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예측하며 읽기, 요약하며 읽기, 표현방식 이해하기, 인물의 심리 파악하기' 등의 기능적 목표를 익히는 재료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행동주의적 목표는 사회적 맥락과 유리된 단편적인 지적 기능일 뿐이다. 현재 중등교육에서 사회와 과학 과목은 ‘내용교과’로 분류한 반면 국어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기능을 익히는 ‘도구교과’로만 인식한 탓이다.
또한 이 기능들은 따로따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 홀트는 어떤 활동을 가르치기 위해 그것을 여러 개의 분리된 기능으로 쪼개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활동과 기능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아기는 걷기 기능을 배운 후에 걷는 것이 아니라 당장 걷고 싶은 욕망에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즉 아기는 걸으면서 동시에 걷기를 배운다. 말하기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기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로서 그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아이는 말하기 기능을 익힌 후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대상이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기능과 행위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을 분리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파멸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말하기는 하나의 기능도, 기능의 집합체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행위이거나 '하기'이다. 그 행위의 뒤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두 살짜리 아기이건 92세 노인이건 마찬가지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영향을 끼치고 싶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다.” (존 홀트)
읽기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읽기 기능을 익힌 후에 읽기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글에 담긴 내용이 궁금해서 읽고, 읽으면서 읽기 기능이 향상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와 관련되는 것들을 ‘읽기 시작함으로써’ 읽기를 배워나간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쓰고 싶은 것을 쓸 때 배움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언어 ‘기능’이 아니라 텍스트의 소재와 내용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오는 원천이다. 텍스트의 내용이 아이들의 마음 한 부분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을 때 배움이 시작된다.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일레인 이야기’이다. 일레인의 입양아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깊은 마음이 나를 조금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체성의 확립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접하게 되었다. (이상민)
각각의 작품들이 나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강렬한 시들이 많아서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특히 ‘껍데기는 가라’는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을 생각해보고 말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2학기 때도 이런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안은지)
개인적으로 ‘운수 좋은 날’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일제 당시의 도시 하층민의 생활이 절실하게 다가왔고 비단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현 시대는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덜 절망적이고 기회가 많지만 도시 하층민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은 여전하다. (이지현)
‘원미동 사람들’은 딱히 인상 깊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작가의 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 멀고도 아름다운 마을 원미동을 사랑한다고 했던 작가가 너무 멋져 보였다. (김민정)
국어책에 많은 좋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나한테 가장 좋은 작품은 프린트에서 본 박노해의 ‘손무덤’이라고 생각한다. 그 리얼하게 표현한 글이 내 마음에 정말 와닿았다. 이런 리얼한 작품을 또 읽고 싶다. (박동현)
대체로 이번 1학기 작품 중에서는 시 작품들이 나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청포도’라는 시가 나에게 깨끗하고도 맑고 순수한, 또 일제강점기의 슬픔이 이 시에 녹아들어 큰 감명을 주었다. (이도현)
이번 학기에는 무엇보다 시를 많이 접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 중 나는 ‘낙화’, ‘가는 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왠지 이별할 때나 헤어짐을 맞이할 절망적인 순간에 이 시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여러 시를 통해서 정신적인 거라든가 영혼이 많이 성숙된 걸 느꼈다. (허수진)
중등학교 수준의 아이들이 자기 ‘마음’과 동떨어진 ‘기능’만을 학습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교육적이지도 않다. 또한 텍스트의 ‘내용’이야말로 다양한 논쟁이 가능한 부분이다. 텍스트의 내용에 주목하지 않고 읽기 기능을 향상시키는 차원에서 텍스트를 바라보는 한 사회적, 윤리적 고민과 논의는 불가능하다. 깊이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점검하는 것이지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텍스트 읽기는 텍스트 내용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여전히 ‘요약하며 읽기, 예측하며 읽기, 판단하며 읽기’ 등의 기능적인 목표를 먼저 제시하고 그 속에 글을 배치해 놓는다. 글의 내용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논쟁보다는 글을 교육과정의 잘게 세분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방식을 고수하는 한 국어교육에서 토론이 활성화되기란 어렵다. 기능주의적 읽기는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있을 뿐,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질문을 제기하지는 못한다.
최진석 교수는 “대답은 기능이며 질문은 인격”이라고 이야기한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질문하는 것이고 질문은 인격적 주체의 활동이다. 오지선다형 문항에 답하는 데 집중하는 읽기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주체’가 사라진 교육이다.
질문이 가능하려면 읽기가 텍스트의 표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텍스트가 생산된 공간, 작가와 그 시대는 물론 지금 우리 시대까지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텍스트가 속해 있는 ‘담론의 공간’ 전체를 들여다볼 때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가 포착된다. 텍스트 안과 밖을 다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텍스트 안의 내용과 관련된 질문에서 더 나아가 텍스트가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을 찾는 읽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텍스트를 다면적으로 뜯어보고 최종적으로 나의 생각과 관점을 재정립하는 것이 주체적인 읽기 과정이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실천은 ‘글 읽기’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계 읽기’와 ‘맥락 읽기’를 포함해야 한다고. 읽기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다. 내 세계가 넓어지는 철학적, 인문학적 사유가 동반되는 과정이다.
교과서는 '어떻게 읽을까' 단원에서 두 편의 설명문을 ‘읽기 전 활동(예측하기) - 읽기 중 활동(메모하기 및 질문하기) - 읽기 후 활동(주제 파악하기 및 현실에 적용하기)’의 단계에 따라 읽도록 안내하고 있었는데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첫째, 학생들이 자신이 평소 관심이 없는 글을 놓고 이에 대해 내용을 예측하고 질문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내적 자발성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둘째, 제대로 된 질문은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했을 때 나올 수 있는데 교과서 글처럼 전체에서 발췌된 일부분으로는 작가의 세계관을 검토하는 ‘깊게 읽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교과서 텍스트 대신에 선택한 것이 ‘사과를 먹으며’라는 함민복의 시였다. 시는 길이는 짧지만 작가의 사유가 시작되고 완결되는 전과정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과라는 소재에 접근하는 시인의 참신한 발상이 흥미를 불러오고 상상과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여지도 있었다. ‘어떻게 읽을까’라는 대단원 주제에 맞춘 수업주제는 ‘질문하며 읽기’로 잡았다.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하는 것이고 질문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 텍스트에서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발견할 때 텍스트를 제대로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텍스트와의 소통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핵심이 되는 것은 질문이다. 그래서 텍스트 안과 밖에서 좀 더 섬세하고 다양한 질문을 단계별로 시도해보고자 했다.
사과를 먹으며 /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시를 읽을 땐 작품에 대한 자신의 첫느낌이 중요하다. 자기 느낌이 없으면 질문도 없기 때문이다. 공감하거나 거부감이 들거나 하는 다양한 감정 속에 질문의 씨앗이 들어 있다. 그래서 철학자 들뢰즈는 예술을 ‘기호’의 집합이라 했다. 이때의 기호는 소쉬르적 의미의 기호가 아니라 예술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측면에서 작용하는 감성적 구성물로 다가가면서 그 감각과 감성이야말로 채굴할 가치가 있는 의미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내 느낌 읽기’는 작품이 우리 삶에 던지는 화두를 찾는 ‘주제 읽기’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주관적 감상에서 시작해서 객관적 감상으로 점점 의미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느낌을 말하라면 ‘좋아요, 싫어요’에서 끝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느낌 읽기 단계에서는 자신의 느낌을 더 섬세하고 풍부하게 포착하기 위해 표현의 예시가 되는 단어들을 제시했다.
<공감하는 부분 (잘 수용/이해되는 내용)>
재미있다, 의미 있다, 반갑다, 새롭다, 멋있다, 근사하다,
인상적이다, 훌륭하다, 뭉클하다, 감동적이다,
놀랍다, 신기하다, 신비롭다, 연상되다, 생각나다,
만족스럽다, 후련하다, 통쾌하다, 기쁘다, 황홀하다,
슬프다, 안타깝다, 마음 아프다
<낯설게 다가오는 부분 (잘 수용/이해되지 않는 내용)>
낯설다, 어렵다, 난해하다, 뜻밖이다,
애매하다, 헛갈리다, 모르겠다, 궁금하다, 고민스럽다,
아쉽다, 허탈하다, 불쾌하다, 실망스럽다, 불만스럽다
혼란스럽다, 당황스럽다, 문제가 있다, 한계가 있다
제시된 단어를 활용하니 아이들은 평소보다 좀 더 우아하게 자기 느낌을 표현했다. 공감하는 부분에 대해 아이들은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는 게 새롭다, ‘사과나물의 세월을 먹는다’에 뭉클한 느낌이 있다,‘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에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사과를 중심으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의미 있다, 사과를 이렇게 표현한 작가의 창의력이 멋있다, 사과 한 알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느껴져서 감동적이다, 사과가 장맛비를 맞는 모습이 연상된다,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는 부분이 재미있다, 사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먹는다는 게 신기하다, 사과에 이렇게 많은 것이 얽혀 있어서 놀랍다, 마지막 구절의 발상 전환이 신기하다, ‘사과나무를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가 감동적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시에서 낯설거나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비슷했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가 어렵고 뭔가 혼란스러운 느낌이다”가 가장 많았다. 그밖에‘벌레의 기억을 먹는다’는 부분이 당황스럽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오고 마는’이 난해하다” 등의 반응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텍스트 안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질문이 쉽게 나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오고 마는”, “사과가 나를 먹는다” 이 두 구절을 택해서 모둠별로 해석을 시도했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오고 마는”에 대해 아이들은 중력 상식을 동원한 해석을 했다. 사과가 태어나 영글어가는 과정이 중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사과가 다시 떨어지는 것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읽었다. 마침 참관 중인 다른 선생님께서 의견을 보탰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나이 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연륜에서 우러난 해석이었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는 마지막 구절은 이 시의 주제가 압축된 문장이자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는 구절이다. 사과에 대한 시인의 다면적인 관찰과 사색이 한 문장의 깨달음으로 응축되어 나타난 문장이다. 한 모둠은 어려워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고 나머지 다섯 모둠은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했다. “시인은 처음에는 자신이 사과를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사과에 얽힌 수많은 존재와 우주를 인식하면서 사과가 자기보다 더 위대하다고 느꼈다, 사과에게 압도당한 느낌을 ‘사과가 나를 먹는다’고 표현했다, 사람 또한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니 사람도 사과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등의 해석이 나왔다. “시인이 사과를 골똘히 들여다보다보니 사과에 자기 얼굴이 비쳤고, 그래서 사과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고 느껴서 ‘사과가 나를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라고 대답한 귀여운 녀석도 있었다. 사과가 우주처럼 큰 존재로 다가온 느낌을 포착했으므로 다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텍스트 안에서 질문을 찾아 해결하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시험 문제는 텍스트 안에서 끝나며 그 이상의 상상, 논쟁거리를 불러오는 질문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의 진정한 역할은 바로 텍스트 밖 질문, 즉 텍스트가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이다. 서사적 화두가 담긴 질문으로 탐구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지닌 어떤 문제의식을 표현하고 있는가. 삶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가. 작품에서 받은 느낌을 질문으로 번역하되, 질문은 작가에게, 그리고 다시 우리 자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조금 어려운 감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질문을 시도했다. 작가에게 하는 질문 중 모두의 웃음을 불러왔던 건 ‘작가는 사과농장을 경영하고 있는가?’이다. 아이들은 ‘작가는 왜 많은 사물 중에서 사과를 선택했을까, 작가는 사과를 통해 왜 이 많은 것을 연상하고 있는가? ‘나는 우리 주위의 사물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사과 하나를 이렇게 바라볼 여유가 있는가’, ‘나도 혹시 사과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나는 사과처럼 일상적인 것에서 위대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나는 사과를 먹으며 사과에 대해 작가처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등의 질문을 제시했다.
한 시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다음 차시 활동은 자신이 택한 서사적 화두에 대한 답을 스스로 탐구하는 글쓰기이다.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이 시의 주제이자 아이들이 형성하는 최종적인 자기 개념이다. 주제는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탐구를 통해 찾아가는 것이고 질문이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쓰기는 읽기와 연결된다. 수업을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아이들의 글이 좋아진다.
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좀 더 섬세한 수업 디자인이 필요하지만 시는 길이가 짧고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해서 수업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참관 교사 중에는 다른 과목 교사도 있었는데, 시 감상의 본질에 충실해서 인상적이었다는 의견을 주셨다. 결국 읽기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 상상, 논쟁거리들이 발생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목소리, 즉 자기 개념에 이르게 된다.
해석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더 나은 해석’은 존재한다.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는 방식은 객관성이 아니라 ‘상호 주관성’이다. 각자의 주관이 모여 일종의 객관을 확보하는 과정, 이때 교실은 가다머가 말한 해석의 공동체가 된다. 과학은 정답이 있지만 인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더 나은 해석이다.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표현의 가능성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잠재된 언어능력이 일깨워진다.
모국어 교육은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어 교육과 지향점이 다르다. 우리는 객관적인 의미 정보를 파악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읽기교육이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며 읽는‘주체적 해석자’이고, 이때 읽기는 ‘나’의 고유성, 독립성, 정체성을 표현하는 자기 탐구의 길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읽기는 쓰기로 이어진다. 현행 고교 교육과정에서처럼 작문 과목과 독서 과목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 읽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쓰기 즉 자기표현이다.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를 창조하는 능력,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는 힘은 나의 주체성 및 정체성과 분리되어 익힐 수 있는 기능이 아니다. 나의 사람됨을 구성하는 가장 상위의 윤리적 실천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