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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결혼을 많이 주재한 한 장로교 목사는 내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뒤,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동성 커플들을 만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들의 관계에는 오래된 가부장적 기본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건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
보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전통적 결혼을 보존하는 것, 실은 그보다도, 전통적 성 역할을 보존하는 것이다. pp9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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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5년 1월 18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당시는 그녀가 서른세살이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례없는 규모의 파국적 살육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그렇게 지속될 것이었다. (...)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
우리는 타고난 낙천주의자들이다.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게 낙천주의라면 말이다. 그리고 계획의 영향 아래에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쉬운 법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선입견은 놓아두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 눈을 활짝 뜨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작가들과 탐험가들이 할 일이다. (...)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둠들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하다한데, 하물며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대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어둠의 가치는 무엇일까? 모르는 것을 찾아 모르는 곳으로 과감히 나서는 일의 가치는 무엇일까? (...)
손택은 자기 자신과도 논쟁한다. 자신이 이전에 기념비적 저서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람들은 잔혹한 이미지를 거듭 접하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던 것을 철회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 바라볼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왜냐하면 잔혹함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테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계속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
그녀는 전쟁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이때 '우리'는 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다--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하지 못한다. 전쟁이 얼마나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는지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한다."
손택 또한 우리에게 어둠을, 미지를, 불가지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다 이해한다고 믿어버리거나 스스로가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녀는 앎이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마비시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그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우리에게 계속 사진을 봐도 좋다고 허락하고, 사진 속 피사체들에게는 그들이 겪는 경험의 불가지성을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을 권리를 허락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한다. 우리가 비록 완전히 헤아리진 못해도 여전히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을.
한 가지 손택이 말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반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죽음과 잔혹행위를 고발하는 이메일이 매일같이 답지하고 아마추어들과 전문가들이 전쟁과 위기를 기록한 자료가 넘치는 시대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정권들은 갖은 애를 서서 시체와 죄수와 범죄와 부패를 숨긴다. 그럼에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신경을 쓸지도 모른다. pp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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