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104 러빙 빈센트 ― 8년 동안 800점의 그림을 남기고 떠나다 8년 동안 800점의 그림을 그린 남자. 일 년에 약 100점을 그린 셈이고 그러면 사흘에 하나씩 그림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다. 800점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얼마나 그림을 사랑했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다. 영화 '러빙 빈센트'는 그렇게 그림에 열중했고, 그 가치가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시점에 가까워온 고흐가 왜 갑자기 자살했는지 그 동기를 추적하고 있다. 한 예술가의 예술혼의 정수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못한 스토리였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유화풍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이 영화에는 고흐의 그림 백여 점이 영화의 주요 무대 및 소재로 등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고흐가 얼마나 자기 주변 세계를, 일상의 작은 것들과 주위 사람들.. 2018. 1. 8. 택시운전사 ― 지적 캐릭터를 구현하지 못한 아쉬움 2003년 KBS 스페셜의 라는 다큐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택시운전사'에 진한 아쉬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큐의 주인공은 독일 기자 힌트 페터이다. 다큐에는 그가 동아시아 정세에 해박했으며 광주에서 만난 사람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평생 가슴에 간직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독일로 테잎을 보내 독일공영방송에서 광주 소식을 보도한 뒤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 촬영할 만큼 진정한 '기자 정신'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영화 의 주인공은 택시운전사 김사복이다. 김사복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는 만큼 이 인물이 어떤 과정으로 기자와 동행하여 광주에 내려갔고 어떤 심리적 변화를 거쳤는지는 작가/감독이 상상으로 구축해야 한다. 감.. 2017. 10. 22. 군함도 ― 스펙타클의 대상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소재 보는 동안에는 재미있었지만 아쉬움이 많은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작가/감독의 의도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처절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행태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예컨대 '지옥'이라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그러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다면 그 무대는 '군함도'가 아니라 새롭게 설정되거나 상상으로 구축한 어떤 장소여야 했다. 군함도는 지금도 생생하게 눈앞에 있는 너무나 역사적이고 리얼한 장소이고 거기에는 일본제국주의라는 구체적이고 잔혹한 범죄와 그로 인한 희생과 비극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군함도'를 배경으로 선과 악이 중첩하는 그런 인간 존재의, 혹은 우리 삶의 실존적인 비극을 그려낼 생각을 감독이 했다면 그것은 오류이자 오만이.. 2017. 10. 22. 일대일 | 김기덕 감독 ― 우리 시대의 정의로움에 대한 집요한 탐구 김기덕의 '일대일'.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영화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를 붙였다. 우리가 살면서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의 한복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여고생 오민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 그들은 그 질문에 대면했고, 윗사람이 시켜서 라고 변명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질문을 회피한다. 아니, 그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일 것이다. 그들에게 복수하는 그림자들 또한 같은 질문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들은 오민주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 응징하자는 마동석의 계획에 동참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회의에 빠져든다. 복수의 행위가 그들의 내적 결단에서.. 2014. 7. 6. 겨울왕국 — 타자를 만나러 가는 여정 엘사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 재능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해칠 수 있음을 알고는 사람들과 최소한의 접촉을 유지한 채 그 힘을 숨기며 살아간다. 더이상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엘사는 인간 세상을 떠나 자기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 성에서 엘사는 자유롭다. 자신의 재능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발휘하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외로움이다. 엘사가 만든 얼음의 성은 타자의 방문이 없는 고립된 공간이다. 나와 다른 타자와의 만남은 이처럼 그 다름이 서로를 억압하고 해칠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이 경우 타인은 지옥인 것이다. 엘사를 제거함으로써 도시에 휘몰아친 겨울이 사라지고 다시 평화가 올 수.. 2014. 3. 15. 인사이드 르윈 — 삶의 모든 환상이 사라진 자리 이렇게 정직해도 좋은 것일까. 너무 리얼해서 황당하기까지 한 영화. 그 어떤 초월도 비상도 없다. 가난한 무명음악가 르윈의 일상은 어쩜 이리도 풀리지 않나 싶을 만큼 찌질하고 궁상 맞다. 어릴 땐 청어떼의 소리를 녹음할 만큼 재치 있는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추운 겨울에 코트 한 장 없이 친구 집 소파를 전전한다. 때때로 등장하는 고양이가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찌질한 르윈의 일상에 한편으론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했다. 이 영화가 그 어떤 환상도 공급하지 않은 채 르윈의 일상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결말이 다소 허무하기까지 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허무의 감정을 남기지는 않고 오히려 둔탁한 울림을 남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르윈이.. 2014. 2. 25. 변호인 — 예술이 현실을 변혁하는 방식 이 영화가 정치적인 영화인가 아닌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무의미한 질문이다. 모든 (진정한) 예술은 그것이 보여주는 '다른 세상'의 풍경으로 인해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은 80년대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어떤 것을 환기시킬 뿐 아니라 그 잃어버린 것들을 현재에 다시 소환하는 행위이다. 죽은 자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살려내고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사회적 소통의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누군가(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해리포터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존재하면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단지 작품이 아니고 작가 자신의 .. 2014. 2. 7. 소원 — 한 소녀의 용기가 우리에게 남긴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때로 너무 처참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나라함을 목격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러한 현실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하여 우리 앞에 다시 드러내준다. 그것은 현실을 단순히 미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의 겉면을 싸고 있는 비극성 때문에 그 현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우리가 충실히 보지 못할 때, 예술은 현실을 다시, 한 차원 높은 관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 영화 . 나영이 사건을 다루었다 해서 처음엔 보지 않으려 했다. 8살 소녀에게 가해진 끔찍한 폭력을 차마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인이 성폭행 사건 자체가 아니라 치유의 과정에 관한 이야.. 2013. 12. 15. 그래비티 — 우주에서 느끼는 우리 삶의 경이로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풍부한 의미를 올올이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두 항 사이의 차이를 통해서이다. 밤과 낮, 남과 여, 기쁨과 슬픔, 여기와 저기 사이에 놓인 차이와 간극을 통해서만 우리는 각각의 항이 어떤 의미인지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때로 길고 먼 여행이 필요하다. 영화 는 가장 먼 종류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라이언과 멧. 그들은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전체적인 관점을 신의 관점이라 한다면 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이다. 거기에 근접한 인물이 지휘관 멧이며, 주인공은 정거장에 온 지 얼마 안 되.. 2013. 11. 17. 배우는 배우다 — 마네킹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날 배우들은 대본에 따라, 대본에 정해진 대로 맡은 역할을 연기한다. 대본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신출내기 배우 지망생 오영은 자꾸만 대본 이상을 표현하려 애쓰다가 감독과 동료 배우와 마찰을 빚는다.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오버액션을 하면서 극의 흐름을 함부로 끊어놓는 것이다. 오영의 잠재적 매력을 알아본 기획자에 의해 영화에 뛰어든 오영은 벼락 성공을 거두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성취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스타가 된 오영은 오만방자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타인을 자기 욕망의 도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성공은 위태위태한 길을 밟고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다시 추락한다. 친구가 없었다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나락에 빠졌겠지만 그는 간신히 살아.. 2013. 11. 6. 뫼비우스 | 김기덕 감독 — 시대에 대한 통렬한 은유 너무 불편하고 아프면서도 또한 너무 놀라운 영화였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이같은 수위의 비판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가장 통렬한 비판은 직설법이 아니라 이처럼 '은유'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 은유의 힘이 놀라웠다. (스포일러 있음)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내연의 여인. 이 한 가족의 이야기는 바로 세대가 얽혀 있는 우리 세상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아름답지 않은 욕망은 어머니에게 극심한 상처를 주고 어머니는 그 상처를 아들에게 고스란히 되갚는다(아버지 대신 아들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아들은 아무 잘못 없이 부모 세대의 고통을 상속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라진 성기를 다시 만들어주고자 분투하고 결국 자신의 성기를 이식해주지만 아들은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어.. 2013. 9. 11.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 — Everybody Stop! Stop, Everybody stop!!! 메이슨 총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열차 안을 가득 메웁니다. 부조리한 것들을 멈추기 위한 외침이 아니에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순간에야 그녀는 학살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Stop, Everybody stop!!!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복면을 쓴 이들의 동작이 순간 정지합니다. 이는 비극적인 순간이자 희극적인 순간이었어요. 그 일순간의 정적이 우리 모두가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스스로 중단하는 법을 잊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틸다 스윈튼의 이 한 마디가 입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우리가 멈추어야 할 것들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 가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윌포드의 감언이.. 2013. 8. 9. 비포 미드나잇 — 세 번째 사랑의 시간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영화였어요. 1995년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보고 2004년 '비포 선셋(Before sunset)'을 다시 만났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포 선셋'을 보면서 십 년후에 이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소망이 올해 실현될 줄은 몰랐답니다. 결국 이 영화들은 9년마다 하나씩 개봉하게 된 셈인데요. 운 좋게도 저는 이 영화들을 모두 개봉관에서 봤고, 그 사이에 20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이 비포 시리즈는 '사랑의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예요.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인류의 시간, 역사의 시간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비포 3부작은 개인의 각 삶의 단계에서 사랑의 시간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 2013. 6. 20. 클라우드 아틀라스 — 워쇼스키 세계관의 결정판 이렇게 쿨하고 재미있고, 다채롭고 풍성한 '느낌'을 허락하는 영화가 흥행 실패라니....!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보는 내내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어떤 면에선 레미제라블보다 좋았다. 레미제라블의 감동은 노래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 감정의 폭과 깊이에 기대는 면이 많다. 영화적 구성으로만 본다면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내 취향에 더 맞았다. 아직 2013년이 많이 남았지만 감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말해본다.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음악 같다. 6개의 스토리 하나하나가 음악의 선율처럼 서로 엮이고 엮이면서 하나의 큰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스토리를 이어붙이는 방식은 천재적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자적이지만 그것들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겹쳐지면서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 2013. 2. 2. 아무르 | 미카엘 하네케 감독 — 스러져가는 육체를 보듬는다는 것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담담하면서도 참혹한 영화다. 전직 음악 교사로서 교양 있게 살고있는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갑자기 닥친 비극. 아내 안느의 육체는 점점 스러져가고 어떤 경우에도 요양 병원에 보내지 말아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따라 조르주는 최선을 다해 아내를 돌본다. 카메라는 그 두 부부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를 그 공간에 가두어둔다. 결말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사를 지탱하는 영화가 아니다. 하네케의 카메라는 대담하게도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끝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 조르주는 담담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지만 그 또한 늙은 몸, 출장 간호사의 도움을 받지만 집에서 안느를 돌보는 일은 점점 힘겨워져만 간다. 안느의 병세는 .. 2013. 1. 19.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