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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114

어둠, 침묵, 신비에 잠겨드는 길 - 제주올레 8코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너무 애썼구나.” 7~8년만에 나를 본 수녀님의 첫마디였다. 그 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사오년 전. 당시 삶에 지치고 방향감 상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 즈음, 학창 시절 멘토셨던 마리아 수녀님을 뵈었다. 그 분의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았고 그 후로도 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 즈음 나는 내가 잃은 것이 충만한 관계와 사랑과 젊은 감각과 목적 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잃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어둠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신비도 사라졌다. 내 영혼의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닐 것이므로 다만 어둠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수용하는 능력, 신비, 직관, 예술 이런 것들도 함께.. 2009. 5. 10.
홀로 걷는 즐거움 - 제주올레 7코스 -> 외돌개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런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 자연 속을 걸을 때 나는 그런 관계에 가장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소로우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뭐 철학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딩에 불과한지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홀로 걷는 시간을 삶에서 빼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종일 걷고 싶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람과 늘상 부대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더욱 필요한 것.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2009. 5. 2.
그대 마음 잿빛일 때는 - 제주올레 7코스 제주 올레 7코스는 외돌개의 청색 물빛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마음이 꽃잎처럼 스르르 열리고 평온해지고 깊어지고 한결 부드러워지고 그러면서도 존재의 중심이 굳건해지는.. 그것이 자연이 지닌 힘 우리 영혼도 여기서는 푸름이 된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4. 27.
눈길 밟으며 백록담 가는 길 - 한라산에서 제주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다. 일기예보는 우리가 여행하는 4박 5일 내내 흐릴 거라고 했는데, 간간이 햇살을 보았고, 한라산에 입산하는 날은 기막히게 청명한 날씨였다. (산행 시작 지점인 성판악으로 가면서 5. 16 도로를 지났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기념해서 만든 도로라고 한다. 이젠 이름을 바꿀 때도 된 듯.-.-; ) 2월 중순, 제주에는 이른 봄이 찾아왔지만 성판악에서 진달래밭 지나 백록담 가는 길은 초입을 제외하고는 눈이 그대로다. 어떤 길은 1m도 넘게 쌓여 있다. 눈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꽤나 지루했으리라. 하지만 이 날은 폭신폭신한 눈길을 밟으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한라산의 둥근 능선은 물론이고 백록담까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 2009. 3. 30.
제주의 혼에 사로잡힌 남자 - 김영갑 갤러리에서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몇 년 전 이 책을 읽고부터 제주가, 더 정확히는 한 남자가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진작가 김영갑. 이십대 후반에 제주에 왔다가 그 야생적인 자연에 반해서 이십년 동안 쉴 새 없이 제주의 오름과 들판과 안개와 바다를 찍었던 남자. 밥값이 없어 굶으면서도 필름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남자. 가난 속에서도 매년 전시회를 개최했던 남자. 책에서 그가 유고처럼 펼쳐놓은 글과 사진들은 특별하다는 말만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그의 삶의 정수였다. 제주의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그가 온몸으로 느낀 ‘삽시간의 황홀’이 글과 사진 속에 밀밀히 배어 있었다. 나는 한 남자의 열정, 고독, 예술혼, 자연에 대한 사랑 앞에 깊이 감동했다. 보기 드문 구도의 정신이었.. 2009. 2. 27.
'한라산'을 가슴에 담다 - 성산일출봉과 우도에서 제주에 있으면서 성산항에서 이틀을 묵었다. 첫날은 올레 1코스를 걷고 나서. 둘째날은 우도를 보고 나서. 제주에서 가장 큰 바람을 맞았던 곳이지만 그곳의 고요한 정취와 밤의 적막함, 휘몰아치던 바람은 내 피부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 성산일출봉 못지않게 많이 바라본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한라산이다. 제주의 중심부에 자리한 한라산은 날이 맑으면 제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장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제주도가 지금은 개발로 많이 망가졌지만 (특히 요 몇 년 새 길에다 돈을 쳐발라서-.-;, 관통도로로 섬 곳곳을 헤집어놓았을 뿐 아니라 해안 일주 도로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성산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풍모는 신비로웠다.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서.. 2009. 2. 25.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의 절경 - 제주올레 1코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걸어서 만나는 세상에 중독되고 나면 차나 기차 등 탈 것에 앉아서 스쳐가며 바라본 그 어떤 풍경도 우리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두 발로 걷는 순간, 다리와 팔과 눈과 귀와 피부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입자들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피상적이던 우리의 존재감이 커지고 우리는 이 세계 안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세계를 느끼기를 원한다. 2월 15일, 제주 올레 1코스를 걸었다. 제주 여행은 세 번째지만 그 속살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지와 바다를.. 2009. 2. 23.
강원도 산골의 작은 낙원 - 화천 다목리 감성마을 & 김유정 문학촌 11월 마지막 주, 멀고 먼 화천 땅에서 이외수 선생을 만났다. 밤이면 한치 앞도 안보이는 강원도 깊디 깊은 산골에 자신만의 작은 낙원을 지어놓고 도시의 온갖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모월당의 모습. 그는 거인이었다. 매스컴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꼿꼿하고 강건한 목소리와 자세를 지녔다. 강의 내용은 저서 '글쓰기의 공중부양'의 핵심적인 내용이었고, 그밖에 선생님의 삶의 원칙과 깨달음, 교육에 대한 견해, 당부 말씀 등이 이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강원도 산골 분교에서 일할 때, 찬 겨울밤 무서운 혹한 속에서 꼿꼿이 겨울을 나는 나무들의 '숭고한' 모습을 보고 전율하셨다는 이야기. 다음 날 춘천의 김유정 문학촌에 들러 촌장님(전상국)을 만났다. 전상국 선생의 강의는 잘 차려진 밥상을 받는 것.. 2008. 12. 16.
5월에 내리는 눈 - 지리산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곳, 지리산. 몇 시간만 오르면 만나게 되는 다른 세상. 한신 계곡 지나 가파른 산길 끝에 도착하는 천국. 드넓은 평원과 겹겹이 늘어선 산자락이 깊은 평화를 주는 곳, 세석 대피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산에는 평일보다도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지리산 날씨는 그 날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연휴라서 택한 지리산행. 산에는 아직 철쭉이 다 지지 않았고 하늘은 흐렸지만 날씨는 온화했다. 힘겨운 걸음 끝에 닿은 세석대피소엔 열 몇 사람밖에 없다. 덕택에 대피소 2층 마루를 혼자 독차지하고, 별 다섯 개 호텔보다 더 편하고 넉넉하게 산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틑날 새벽, 눈부신 빛살에 잠을 깨었다. 대피소 작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하얗게 빛.. 2008. 5. 20.
충북 화양동 계곡(화양구곡) 어제 화양동 계곡에 다녀왔다. 화양구곡 경치 중 9곡에서 2곡까지 보았다. 이 일대는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 서원을 세운 곳으로 암서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 되었는데 괴산 군수가 복원을 하고 있었다. 복원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서원 터에는(원래는 절터인데 유생들이 빼앗았다고 한다.) 웅장한 축대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만 있더라면 더욱 고적한 분위기가 날 뻔 했 다. 새로 지은 서원은 유치한 느낌이 났으며, 전혀 멋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옛날에 명나라에 제사 지내던 만동묘까지 쓸 데 없이 복원해 놓았다. 우암은 정치에서 물러나 이곳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여기서도 조정에 간섭을 하며 정치를 했다고 한다. 화양서원 일대 70리 안에는 아무도 주막을 짓지 못하게 하고,.. 2005. 11. 28.
설화로 물든 지리산 연하선경 - 지리산의 가을 ③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은 쉬 그치지 않았다. 바람은 구름을 모두 흩어버릴 때까지 산을 향해 계속 달려올 모양이었다. 싱싱 불어대는 바람의 노래가 어찌나 신이 나던지 나는 단숨에 장터목 대피소까지 다시 올라갔다. 장터목에 서니 이리저리 오가는 구름 사이로 눈과 서리에 잠긴 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무리의 검은 새들이 떼지어 날아왔다가 저 편으로 사라져갔다. 날씨가 좋아질 걸 생각하니 마음은 길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막 출발하려는데, 어제 세석에서 헤어졌던 어린 친구가 대피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워 손짓을 하니 그이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다. "누나, 정말 아름다웠어요." 걸어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더란다. 경치가 얼마나 좋던지 자기가 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 2005. 11. 7.
구름이 흩어지자 눈부신 새아침이 - 지리산의 가을 ② 육체적 피로는 역시 가장 좋은 수면제 역할을 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몇 시간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새벽 여섯 시 반, 하늘에 붉은 기운이 잠시 비치는가 했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날이 밝기를 고대했는데 간밤에 몰려온 구름은 산을 송두리째 뒤덮고 말았다. 산은 어제의 찬란한 빛을 완전히 감춘 채 짙은 장막 속에 몸을 숨겼다. 오늘 걸을 길은 뱀사골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18.5km. 내 걸음으로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이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종주 코스라서 길이 그다지 험하진 않지만, 찌푸린 날씨는 산행의 즐거움을 반감 시키기 마련이다. 가을의 운무는 여름과 또 달랐다. 안개에 젖은 신비한 여름 숲속을 습한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시며 따라갈 때의 낭만과는 딴판으로 가을의 운무는 스.. 2005. 10. 31.
산도 붉고, 물도 붉고, 내 마음도 붉고 - 지리산의 가을 ①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더욱 그립다고 했던가. 가을이 바로 곁에 다가왔는데도 가을이 한층 더 그리워졌다. 이 가을을 온통 품에 안고 싶어서, 가을의 심장부로 뛰어들고 싶어서 산을 찾았다. 내 생애 최고의 가을, 그 가을이 지리산 속에 있었다. 태풍이 없어서인지 올 단풍은 유난히 고운 빛깔을 뽐냈다. 산에서 보낸 사흘 동안, 원없이 걸었고, 가을의 정수를 오롯이 들이키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쬘 무렵 뱀사골 계곡의 입구, 반선에 도착했다. 지난 여름 폭우가 쏟아졌을 때 이후 두 달만의 지리산행이다. 계곡길에 들어서자마자 원시림이 주는 광대한 기운이 나를 감동시킨다. 숲은 까마득하게 오래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막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해왔다. 이.. 2005. 10. 28.
너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 지리산의 여름 큰 산은 하산길도 만만치 않다. 1박 2일 산행의 막바지, 지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노라니 아직 멀었냐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그러자 마침 동행하던 대피소 직원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오고 싶을 텐데'라며 놀린다. 그래, 돌아가자마자 금세 보고 싶어지겠지. 그리워 몸살을 앓겠지. 대체 이 산의 무엇에 매료된 걸까. 단 한 차례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법이 없이, 구름과 바람과 빛과 시간과 함께 흐르는 산. 볼 때마다 새롭고 변화무쌍한 산. 한없이 깊고 넓은 그 품 안에 수많은 숲과 나무와 생령들을 담고 있는 산.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전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고, 그래서 사람을 홀린다. 미치게 한다. 근 한 달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이었다... 2005. 7. 28.
비 오는 날의 운문사 장마가 계속되는 날이면 한옥집이 생각난다. 대청 마루에 앉아서 처마 밑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운 벗과 차 한 잔 나누고 싶다. 아침부터 장맛비가 내리던 일요일, 먼 데서 손님이 찾아와서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운치가 있는 절, 운문사에 들렀다. 운문(雲門), 구름문.... 극락교,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어 더욱 아쉬웠을까.. 저 문 너머로 걸어가면 딴 세상과 마주칠지도... 만세루에 앉아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친구는 이제 '낙숫물'이란 말이 사라질 것 같다고 한다. 대웅보전 지붕 위의 이끼가 정답다. 안녕, 친구... 그대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맘에 드네.. 저 꽃문을 열면... 저녁 공양을 위해 아궁이에는 불이 타오르고... 불이문 안을 엿보며... 不二, 둘이 아니라 하나인 세.. 2005.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