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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114

비밀의 숲, 곶자왈 - 제주올레 11코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새 눈으로 바뀐다. 이런 날씨에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레 11코스 곶자왈 입구, 신평리에 내렸다. 당분간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 곶자왈 입구 편의점에서 라면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청년이 자신이 시킨 김밥을 절반 잘라 준다. 사양해도 계속 권해서 감사히 먹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눈보라가 그새 물러나고 햇볕이 환하다. 연말은 대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올해(아니 작년)엔 왠지 일출을 꼭 보고 싶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마라도였다. 먼 길 운전할 필요 없이 바로 앞에서 한 해의 지는 해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곳. 인파로 붐비지도 않을 테고. 새해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 2010. 1. 13.
역사를 초월한 진리는 없다 - 제주올레 11코스, 정난주 마리아묘에서 모슬봉을 내려와 길은 다시 마을과 마을, 밭과 밭 사이로 한참을 이어진다. 그 길 끝에 정난주 마리아묘가 나타났다. 십년 전쯤 제주 성지순례 때 와본 적이 있다. 그땐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걸은 끝에 지친 다리로 도착하니, 글귀 하나 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그 몇 시간의 걸음이 내 귀를 열어준 것 같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순례가 필요한 걸까.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의 아내다. 그녀의 어머니는 신앙의 선조 이벽의 누이였고 정약용 형제들이 그녀의 숙부였다. 신유박해 때 남편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황사영 백서의 내용이 과연 정당한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1801년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어린 아들과 함께 귀양길에 오른다. 그녀는 제주도에, 아.. 2010. 1. 8.
섯알오름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 제주올레 11코스 세월이 흘러도,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은 홀로코스트, 대학살. 수십만을 죽음으로 몰고간 킬링필드, 나찌의 육백만 유태인 학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죽게 한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다만 조직의 명령에 아무 생각 없이 복종했을 뿐. 제주올레 11코스는 제주민의 삶과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들판 사이를 두 시간쯤 정처없이 걷다가 만난 양민 학살의 현장 '섯알오름'은 충격이었다. 4. 3 항쟁의 비극도 알고 있고 이승만 정권 때의 보도연맹 사건 등을 알고 있었지만,.. 2010. 1. 8.
송악산에 오르며 - 제주올레 10코스 송악산은 화산 폭발로 생긴 104미터의 나즈막한 오름입니다. 높진 않아도 반도처럼 솟아서 동쪽 남쪽 서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동으로는 산방산과 형제섬, 남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송악산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그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저 역시 한참을 머물었답니다. 한 잔 술이 없어도, 바다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해지는 쪽으로 무리지어 핀 야생 들국화에 취하고, 지는 햇살에 취하고, 이 모든 세계 앞에서 말없이 감동하게 되는 곳. 그래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끝이 없습니다. 수만년 전 폭발한 작은 분화구는 지금도 야생의 꿈틀거림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의연히 서 있었습니다. ... 그대가 만일 이곳에 온다면, 동서남북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절.. 2009. 11. 29.
외로움이라는 선물, 마라도에서, 제주올레 10코스 올레 10코스, 사계리 해안 도로를 걷다보면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이 나온다.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시월인데도 여름처럼 뜨거운 날이어서 유람선에서 맞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승선한지 30분만에 국토 최남단의 섬, 마라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죽 늘어선 전동차와 호객꾼의 행렬에.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자 나타난 건 시장통 같이 북적대는 상가들. 전부 다 짜장면집이었다. 유람선이 한 번에 몇 백명씩 사람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이리 된 것 같았다. 산도 높다란 언덕도 없는 이 자그마한 섬을 가득 채운 음식점과 소음 때문에 굉장히 실망했다. 빈 모습 그대로 두면 더 좋을 것을. 자연은 꾸미지 않은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마라도의 맑은 얼굴 위로 덕지덕지 칠해진 .. 2009. 11. 14.
우리는 '바다'로 간다 - 제주올레 10코스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한 적은 별로 없다. 차를 몰며 가끔 이 길 끝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거나, 갑갑할 때 바다를 떠올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실체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막연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가까운 감포나 포항에 회 먹으러 더러 들렀고 부산에도 자주 갔지만, 그 바다가 내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저 북쪽의 강원도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만난 맑은 물과 백사장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바다는 상상 속의 풍경 한 컷 정도일 뿐, 독립적인 대상으로 내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롬복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은 황홀했으나, 그것 역시 잠깐의 마주침이었을 뿐, '바다' 그 자체가 내게 어떤 의미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바다의 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 2009. 11. 4.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 ㅡ 도라산역 & 임진각 "잠시 후 이 쳘차는 종착역, 서울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서울역에서 내리시는 손님들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역에 도착할 때면 늘 나오는 방송. 내 기억 속의 서울역은 그렇게 언제나 모든 길의 끝이었다. 더는 갈 수 없는 곳. 하지만 이 날의 여행은 서울역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북쪽을 향해 달렸다. 목적지는 임진각역 다음에 있는 도라산역. 친구가 '통일열차음악회'에 함께 가자고 초대해서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이 행사 때문에 특별 관광열차가 편성되어 한 무리의 관광객들을 태운 기차가 도라산역을 향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기차는 민통선 안에 들어섰고 간간이 보이는 철망이 이곳이 군사지역임을 말해주었다. 나즈막한 야산, 남한강 물줄기, 여느 곳과 다를 바 없는 산하였지만 내게는 보이는.. 2009. 11. 1.
한여름에도 그리움은 깊고 - 봉하마을 대통령님 서거 이후 약 두 달만에 다시 봉하를 찾았다. 한 번 가야지 했는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분의 이름이 내게 상처였으므로. 슬픔은 허락받았지만, 죽음의 원인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이 사회에선 아직 '금기'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듯이. 우리는 권력과 맞서 싸워서 한 번도 이긴 역사가 없다고 생전에 노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무수한 저항이 있었지만 혁명 세력이 권력을 쟁취한 역사는 없었다. 4/19도 6월 항쟁도 미완의 혁명이었다. 시민 권력이 탄생시킨 대통령, 그래서 참여정부는 참으로 값진 승리였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조중동과 온국민의 쏟아지는 인신공격을 보면서 그 속에서도 흔들리지 .. 2009. 8. 1.
낯선 곳의 아침 - 제주올레 10코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시간의 다른 차원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다르게 지각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 피부에 닿는 공기의 질감이 다르고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강도가 다르고 차창을 열면 만나는 풍경의 색감이 다르다. 아침 밥맛이 다르고 식후에 마시는 차맛의 깊이가 다르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단 일박일지라도,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이 주지 못하는 시간의 깊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모든 아침은 그래서 '세상의 첫 아침'이다. 이 아침의 신성한 기운이 좋아서 가끔 누구도 이 공간에 들여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에 누구와 여행할 때도 문득 스쳐가는 생각에 나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상대방이 알면 섭섭하겠지만 이 아침을 홀로 만끽하.. 2009. 7. 7.
안덕계곡에서 화순해수욕장까지 - 제주올레 9코스 다정한 숲길, 안덕계곡 박수기정을 지난 길은 들판과 마을을 거쳐 안덕계곡으로 이어진다. 안덕계곡 숲길은 9코스의 하일라이트였다. 거칠고 험한 자연이 아니라, 누군가 귓전에 속삭이는 것 같은 다정한 숲길. 전설에 따르면 태초에 7일 동안 안개가 끼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태산이 솟아날 때, 암벽 사이에 물이 흘러 계곡을 이루며 치안치덕(治安治德)하는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던 곳으로 김정희, 정온 등도 이곳에 유배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절경을 즐겼다고.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는 않겠지만(귤밭 등으로 훼손되었다 함), 나는 뭍에서 만나기 어려운 고요한 계곡길의 정취에 반했다. 그 길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만, 부드럽고 나직하고 맑고 가벼운 .. 2009. 6. 29.
박수기정 넘는 길 - 제주올레 9코스 제주 올레길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 그 길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산과 오름과 계곡,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바람, 파도, 바위, 갈대, 들꽃, 뭍 생명들이다. 지리산과 같은 장중함은 없지만, 화산섬이라 그런지 작은 섬 안에 다채로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빈 해변이 이토록 아름답구나 하고 느낀 곳이 제주이다. 자연 그대로의 길이 아주 길지는 않다. 이 길이 30분만 계속되면 좋겠다 싶지만 야생적인 해변이나 숲길은 때로는 5분, 10분만에 끝이 난다. 그리고 인가와 사람들이 만든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것은 올레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만나는 길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처음 걷기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2009. 6. 10.
존재는 가슴으로 말한다 - 제주올레 8코스  자연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다. 그것을 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흘려보내고 또 새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비도 바람도 한겨울 추위도 자연의 피부에 흔적을 남길 뿐, 자연은 고통을 자기 안에 쌓아두지 않는다. 그들 존재의 중심은 언제나 변함없는 생명력일 뿐... 그들에게도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피부에 쌓이는 주름일 뿐... 우리의 모든 경험도 우리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피부에 켜켜이 지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발레리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피부야말로 가장 깊은 것이다... 라고. 피부 아래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오직 있는 것은 그 모든 지층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슴이다. 하늘만큼 넓은 가슴, 빈 가슴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 가슴은 언제나 .. 2009. 6. 8.
바람과 함께, 파도와 함께 - 제주올레 8코스 다시 존모살을 찾은 날은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도 세차게 일렁거렸다. 모래 카펫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해안으로는 파도가 쉼없이 밀려오고, 물결이 솟았다가 허물어지고, 구름이 움직이고,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춤을 추고, 지구가 한 바퀴 돌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들이 움직이고... 내 몸속에도 파도가 밀려오고, 바람이 불고, 별들이 속삭이고.. 지구가 돌고... *걸은 날. 2009. 4. 25. 2009. 6. 6.
존모살을 마음에 남기고 - 제주올레 8코스  오후 1시 비행기여서 8코스 중반 무렵 올레길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침 나절, 중문 해수욕장 부근길을 빙빙 돌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 존모살이다. 주상절리 절벽, 하얀 백사장, 청정한 바다... 자연이 빚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갑자기 나타난 낙원. 떠나기 전에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올레길은 존모살을 지나 절벽 아랫길, 바닷가 바로 옆을 따라 나 있다. 파도와 절벽 사이를 지나는 길. 그 야생적인 길을 걸으며 얼마나 행복한지, 그 길이 너무 짧게 끝나서 얼마나 아쉬운지... 존모살의 비경을 마음에 담고 올레길을 떠났다. * 걸은 날. 2009. 3. 22. # 여행 팁 : 존모살은 제주 하이야트 호텔 산책로 끝에 나옵니다. 하이야트 호텔 테이크아웃 커피가 3300원인데 맛이 .. 2009. 5. 16.
세계와 나 - 제주올레 8코스 제주올레 8코스, 주상절리 직전의 빈 해변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다. 이 바닷가의 바위들은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여기 있었으리라. 그 숱한 바람과 파도 끝에 이렇게 부드럽고 둥글어졌다. 속은 단단하면서도 겉은 둥글다. 세계와 나의 관계. 나 역시 이 바윗돌의 하나. 이들보다 더 짧은 생을 살아가는 모래알 하나이다. 이름없는 모래알...... 나는 내가 이 세계 속의 작은 모래알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모래알은 세계를 그 안에 품고 있고 바다의 향취와 느낌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