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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114

여수 묘도에서 이순신의 자취를 보다 여수에서 내 마음에 고이 남은 곳은 유명한 여수 밤바다도, 주차할 곳을 찾느라 애먹었던 돌산공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줄을 길게 서서 올라갔던 오동도 전망대도 아니었다. 관광지 여수가 아닌, 여수가 본래 지닌 호젓한 정취를 가감 없이 느껴본 곳은 작은 섬, 묘도에서였다. 과거엔 배가 다녔겠지만 이제는 이순신대교가 묘도를 사이에 두고 여수와 광양을 잇고 있다. 이순신대교를 시원하게 달려서 묘도에 도착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묘도의 정상,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던 봉화산이었다. 봉화산은 산 중턱까지만 차가 갈 수 있어서 정상까지는 한적한 산길을 30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했다. 264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놀라웠다. 묘도의 오래된 다랭이논과 주변 다도해의 풍경도 절경이었지만 남으로는.. 2017. 1. 19.
제주가 간직해온 말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어떤 특정한 장소의 아름다움보다는 제주가 오랫동안 품어오고 키워온 말들이 내게 선물로 다가왔다. 사라오름, 아라오름, 사려니숲길, 가시리, 곶자왈, 다랑쉬오름, 따라비오름, 쇠소깍... 제주땅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이 정겹고 고운 이름들을 가만히 음미하면서 이 이름들을 지은 옛사람들의 마음씨도 이만큼 곱고 다정했으리란 생각을 해보고, 우리 삶의 자리가 좀 더 어여쁜 이름들로 가득차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육지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우리 옛이름들을 변방의 작은 섬이 간직하고 있음이 반갑고 신기했다. 2017. 1. 2017. 1. 16.
두 개의 풍경, 여수 만성리 때로는 하나의 광경 혹은 이미지가 그 도시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 여수 만성리의 바닷가 풍경이 내게는 그러했다. 일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서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는 을 통과하면 도로 오른편으로는, 폐선을 활용한 레일바이크 길과 그 너머 푸른 바다가 시야에 들어오고 도로 왼편으로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작은 표지판과 함께 만성리 학살 유적지가 자리해 있다. 여수순천 사건 직후 1949년 죄없는 민간인 250명이 인근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총살당하고 불태워져 이곳에 암매장되었다.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는 곳은 물론이고 그 근처에 있는 형제묘 또한 누군가 두고간 꽃이 그 마음을 말해줄 뿐 아직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아 거의 방치되다시피 버려져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안내 표지판에는 .. 2016. 10. 24.
아직 오지 않은 말들 - 광주 답사 여행 가을비가 살짝 흩뿌리는 날,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9월 초순, 대기가 아직 여름의 더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 날씨는 온화했고 내리는 비도 부드러웠다. 가는 동안 구름과 안개가 산과 마을을 휘감고 있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비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하늘이 트이기 시작했다. 3시간 반을 달려 광주 유스퀘어에 도착해서 마중나온 친구를 만났다. 5. 18 관련 사적을 돌아보고 싶다는 내 이야기에 그는 광주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며 고맙게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세세하게 짜놓았다. 맨 처음 간 곳은 5. 18 자유공원이다. 당시 교직에 계셨다가 이제 은퇴하신 문화해설사 선생님으로부터 열흘간의 항쟁 일지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설명 도중 그분의 목소리가 간간이 떨렸다. 그 목소리의 떨림에서 그 시간이 그분의 마음에 어.. 2014. 4. 13.
그 이름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에 관하여 - 광주에서 친구의 안내로 공원 지하 추모공간으로 향하는 길을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벽면 가득히 새겨진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들의 이름. 아이, 소녀, 청년, 어른의 이름. 그들의 몸은 사라지고 벽에 이름으로만 남은 이들... 80년 광주의 이름들이었습니다. 한나절 동안 광주 여러 곳을 둘러봤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이미지로 남은 건 5. 18 기념공원에서 만난 이 이름들이이었어요. 뒤에 들른 5. 18민주묘지에서 이 이름들 각각의 얼굴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름들이 더 애틋했습니다. 그리고 이 낯모를 이름들로부터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의 정체를 알지 못해 더듬거렸어요. 이 이름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눈을 아프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름들 .. 2013. 9. 10.
사람을 꿈꾸는 곳 - 봉하마을에서 4년만에 다시 봉하를 찾았습니다. 대통령이 잠드신 너럭바위 앞에 도착했을 때, 제 마음에 차오른 것은 평온함이었어요. 봉분을 높이 세운 왕의 무덤과 달리 평평한 대지, 그만큼 낮게 펼쳐져 있는 무덤. 한참을 서 있었는데 마음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그 평온함은 그분의 치열한 삶이 남긴 여백이자 자취 같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능과 능력과 사랑을 다 쓰고 간 삶이 남기는 그런 평온함이예요. 삶에 대한 평가는 어떤 정책을 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성공이나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으로 살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평온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우리의 재능을 다 쓰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삶을 소진시키며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일 거.. 2013. 8. 18.
표지를 따라 걸으며 - 운봉/인월 구간 2코스 시작해서도 둑방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띄우며 람천에서 한동안 놀았다. 나는 둑방길 위에서 쉬느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시 길을 나설 즈음에야 물에 다들 빠트렸으면 시원해졌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학생들이다보니, 남자 선생님이 왔으면 애들이 더 재밌었겠다 싶었다. 지리산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둘레길 표지판이 잘 갖추어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표지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누군가가 만든 길을 따라 걷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구나. 길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 길을 따라가보는 것도 괜찮았다. 어떤 길을 만들지, 혹은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갈 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또한 같은 길을 가더라도 길에서 본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삶은 우리가 길에서 목격한 .. 2011. 9. 24.
이 길에 특별한 게 있다면 - 주천/운봉 구간 지리산 둘레길은 제주 올레만큼 예쁘진 않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절경이 길마다 속속 숨어 있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풍광을 지닌 올레길에 비한다면 지리산 둘레길은 다소 밋밋하게 여겨질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이 좋았다. 올레만큼, 아니 올레보다 더 좋기도 했다. 내륙을 지나면서 마을과 마을로 끝모르게 이어져 있는 길은 화려하진 않으나 오래 묵은 술처럼 깊은 맛이 있다. 경치는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우뚝한 지리산이 그곳에 있는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위엄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행정마을에서 1구간의 끝 운봉마을까지는 둑방길과 농로가 번갈아 나왔다. 둑방길 옆으론 내가 흐르는데 손을 댄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하다. 길은 .. 2011. 8. 31.
구룡치 세 글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 주천/운봉 구간 지리산 둘레길 1~2구간을 걸었다. 주천에서 인월까지 약 26km다. 몇 년 전 길이 처음 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가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초창기엔 게시판에 잡음이 많았다. 외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마을 주민들도 있었고(땀흘려 농사 짓는 옆으로 한가하게 구경하며 걷는 사람들), 도시의 소음이 싫어서 귀농했는데 자기 집 앞으로 수백 명이 지나간다며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지리산은 관광지 제주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길을 내는 것이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오지 마을마저 훼손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중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세 군데서나. 각 지자체가 돈에 눈이 멀어 벌인 짓이었다. 찬반 논쟁이 뜨거울 무렵, 한 다큐 프로를 보았다. 주.. 2011. 8. 18.
"고통을 즐기는 거지"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2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얗게 쌓인 눈 때문에 칠흙같이 어둔 밤인데도 산이 밝다. 우리들 마음도 그 무엇보다 밝았다. 12월 31일 내내 폭설로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밤 10시를 기해서 정상까지 등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고요한 산속, 쌓인 눈이 그 침묵의 깊이를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눈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산행을 위해 일박 이일의 시간을 내어 공항에서 날아온 아저씨는 요즘 경기가 하도 안 좋고 힘들어서 무언가 희망을 하나 건져보려고 한라산에 왔다고 했다. 동행한 또 한 분의 할아버지는 지금 이 나이에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도 싶고, 자녀들 잘 되라는 기원도 하려고, 산행에 나섰다고 하셨다. 이 분들께 일출을 보기 위한.. 2010. 6. 26.
우여곡절 끝에 관음사에 도착하다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1 서귀포 일대의 온화한 기후 때문에 날씨 걱정을 잊고 있었다. 한라산 성판악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볼 때부터 문제가 터졌다. 민박집 할머니가 가르쳐준 버스 회사에 전화하니 5.16 도로에 사고가 나서 오늘은 더 이상 운행을 못 한다는 것이다. 택시를 알아보니 5.16 도로로는 위험해서 십만원을 줘도 못 간다고 했다. 뉴스에는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고 나오고, 한라산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니, 정상까지는 못 올라가고 성판악 코스는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관음사 코스는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사정이 좋아지면 정상 가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민박집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뭐 하러 힘들게 그까지 가? 요 옆의 제지기오름에서도 일출 잘 보여. 올.. 2010. 6. 26.
한 해 마지막 날, 서귀포엔 눈발이 날리고 - 제주올레 6코스 마라도를 떠나 서귀포로 넘어오니 날씨가 한결 따뜻했다. 서귀포와 고산 지역은 체감 온도가 5도는 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서귀포 사람들이 느릿느릿하단다. 이 작은 섬에서도 이런 기질적 차이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제주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서귀포는 그래서 눈 구경하기도 어렵다. 밤에 한라산에 갈 예정이라 낮에 올레 6코스길을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6코스 시작점 쇠소깍으로 가지 않고 그냥 숙소가 있는 보목리에서 출발했다. 바닷길, 겨울인데도 꽃이 만발한 마을길, 아름드리 숲길을 지났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길동무가 있다. 1코스는 성산일출봉, 7코스는 범섬, 10코스는 형제섬을 내내 바라보며 길을 간다. 몇 시간 동안 함께 걷다보면 진짜 친구가 된 기분이다. 6코스의 길동무는 섶섬, 문섬, 그리.. 2010. 2. 7.
하루에 단 한 차례 뜬 배 - 겨울 마라도에서 마라도에서 신년 일출을 볼 계획이었는데, 제주 전해상에 주의보가 내려서 30일부터 31일까지 배가 전혀 뜰 수 없단다. 송악산에서 봐야 하나 하던 차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대학생 K가 자기는 한라산 야간산행을 하고 한라산에서 일출을 볼 거란다.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어떤 열정 때문이었을까, 계속 한라산이 마음에 맴돌았다. 그 제안에 솔깃해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곶자왈 입구에서 만났던 김밥 청년을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버스 타고 가면서 내내 한라산 생각하다가 핸드폰까지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둘이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12월 31일 밤, 성판악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한라산으로 갈까. 아니야, 거기서 일출 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쟤가 아직 어려서 산에서.. 2010. 1. 21.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닷길 - 제주올레 12코스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로 구분된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코스, 서귀포에서 중문, 송악산까지의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올레 11코스부터는 서부 지역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서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코스 길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예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 2010. 1. 16.
산 자를 위한 밭과 죽은 이의 무덤이 함께 - 제주올레 12코스 생태학교를 나서서 12코스로 출발했다. 어깨가 조금 무겁다. 봄가을에는 배낭을 매고 다녀도 별 문제 없었는데 겨울짐은 꽤 무겁다. 생태학교에 그냥 짐을 두고, 거기서 하루 더 묵을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잔치도 구경하고. 내가 무릉리에 도착한 날은 그곳 무릉리와 그 옆 도원리가 ‘무릉도원’이라는 컨셉으로 정부 지원 무슨 관광 사업에 선정된 날이라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오늘 밤 돼지 두 마리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고기 꼭 먹고 가라고 주위에서 권했는데, 밤새 벌어질 잔치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다. 촌장님 말씀으론 내년 봄에 12코스에 오면 온 동네가 복숭아꽃으로 가들할 거라고 한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기예보가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날씨는 맑다. .. 2010.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