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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93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전 역사를 통해서 전쟁이 늘 이런 식으로만 여겨진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전쟁이 표준적인 상황이었으며 평화가 예외적인 것이었다. pp114 ##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러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 2018. 11. 20.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 동성결혼을 많이 주재한 한 장로교 목사는 내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뒤,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동성 커플들을 만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들의 관계에는 오래된 가부장적 기본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건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 보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전통적 결혼을 보존하는 것, 실은 그보다도, 전통적 성 역할을 보존하는 것이다. pp95-97 ##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5년 1월 18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당시는 그녀가 서른세살이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례없는 규모의 파국적 살육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몇 년 동안.. 2018. 11. 20.
둥글이의 유랑투쟁기/ 박성수 아무리 유명 작가라 해도(김영하, 김연수, 성석제 등) 타인의 여행기를 꼼꼼이 읽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만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잘 쓴 글이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여행기를 관통하는 철학이랄까 관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개중에 그래도 괜찮았던 건 정여울의 에세이. 장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어린 시선 때문이었다). 이 책은 예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저자는 이 시대의 수도승, 순례자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약 9년을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게다가 매일 도심이나 마을에서 텐트를 치면서.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우리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수행의 삶을 산.. 2018. 11. 19.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 캄보디아의 한 스님이 쓴 책을 읽다가 불교의 팔정도를 설명하면서 '바를 정'을 흔히 해석하듯이 '올바르게'나 '똑바르게'가 아니라 '능숙하게'로 해석하는 걸 보고 동감했다. 예를 들어, 정견을 '올바르게 보기'라고 옮기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릇되게 보는' 게 된다. 반면에 이를 '능숙하게 보기'로 옮긴다면, 그러지 못한 이는 '서투르게 본다'는 의미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릇되게 보는 사람보다는 서투르게 보는 사람이 낫겠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20대란 뭘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일에 오래 매달리지 못하는 나이, 즉 서툴러서 쉬 싫증 내는 나이다. pp38 ## 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 2018. 11. 18.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 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며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남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을 다룬 영화 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보라.) (...)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부르주아는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단지 초라할 뿐이다.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 2018. 9. 25.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유명 작가들의 독서 경험을 쓴 책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잘 읽히지는 않았다. 타인의 독서 경험이 내가 푹 빠져 읽을 만큼 공감의 여지가 많지 않아서이다. 끝까지 다 읽은 책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정도다. 이 책 '정희진처럼 읽기'는 예외다. 그냥 한번 훑어보려고 집어들었다가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다 읽고 말았다. 저자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 책이 자신에게 준 화두를 붙들고 그녀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든 몸은 '사회적 몸'이듯이 그녀가 통과하고 겪은 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영혼을 울린 책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개성적인 글쓰기의 모범 사례다. ## 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 2018. 9. 15.
낯선 시선/ 정희진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주의는 이 과정에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모델로 하는 메타젠더이다. pp17 ##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 2018. 8. 29.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 우치다 타츠루 ㅡ 자기 안의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 인간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소명은 노동하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실재하는 객관적인 소산'을 이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능력이나 적성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견된다. 어떤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그 일을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본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 대개의 경우 외부의 능력 평가가 본인의 가치평가보다 객관성이 높다. 예술창조보다는 노동 쪽이 완성도에 대한 판정 기준이 훨씬 '녹록하다.' 예술은 어느 정도 고도의 기술이나 숙련, 노력의 성과가 있다고 해도, 만들어낸 작품이 '다른 사람과 똑같다'면 가차 없이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노동은 .. 2018. 8. 19.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현경, 김수진 우리나라 1세대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현경 선생의 책은 그간 다 읽었는데, 이 책이 가장 좋았다. 현경 선생이 이제 60대에 접어들면서 자기 삶을 아우르는 가장 완숙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현경이 아니라 30대 여성 김수진이라는 점이다. 30대 수진과 60대 현경이 4년간 만나고 여행한 결과인 이 책은, 김수진이 바라보고 느끼고 대화한 현경이기에 일반 독자가 공감할 만한 여지가 더 많은 것 같다. 현경이 굉장히 진보적인 신학자로 남다르게 용감무쌍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 '센 언니'의 언어가 바로 접수되지 않는 지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김수진이 현경을 가까이에서 만나면서 자신이 질문하고 답을 찾고,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소화한' 현경의 모습이.. 2018. 8. 9.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이용마 ## 노무현 정부가 검찰에서 손을 뗀 소극적인 개혁은 당장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아슬아슬하게 과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과반은 얼마 안 되어 무너졌다. 선거법 위법 재판에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는 선거법이 혹독하게 적용되어 벌금 100만원 이상의 선고가 내려진 반면, 야당 의원들에게는 벌금 80만원 선고가 많았다. 벌금 100만원은 의원직 상실의 기준선이다. 당시 진보적 성향을 보인 여당에게 선거사범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 공안부와 법원의 잣대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된 것이다. 이것은 단적인 예일 뿐이다. pp273 ## 미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직과 관련된 문제였다. 사실 미국에 사는 동안 이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가 넘.. 2018. 4. 16.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아주 장중한 스케일의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다. 몽골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을 이 책보다 잘 그린 작품은 잘 없을 것 같다. 저자는 오랑카이족 유목민 비지아와의 이십년의 우정을 바탕으로 유목민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복원해내었다. 유목민으로 살아가던 비지아의 어린 시절과 그가 도시에서 맞닥뜨린 문명과의 충돌, 징기스칸의 이야기와 고려조 몽골과 우리 역사와의 만남까지,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어우러져서 유목민에 대한 훌륭한 초상화를 그려낸다. 다큐적 가치도 충분하지만, 문학적인 성취에서도 성공을 거둔 책이다. 저자의 묘사를 따라가며 알타이 산맥 부근 몽골의 평원 속을 내가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정착민의 서사와 초원의 서사는 종류가 완전히 다름을 알려준다. 저자가 유목민에 매혹된.. 2018. 4. 14.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 피에르 신부 — 삶은 자유로운 시간을 조금 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알라딘에 중고로 팔 책들을 정리하면서 눈에 띈 책. 2000년 발행이니 약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처음 읽었을 때는 피에르 신부가 이런 가치관으로 이렇게 행동하며 살아온 분이었구나, 정도였는데, 지금 읽어보니 그가 싸우고 있는 프랑스 사회의 모든 문제점(빈부 격차, 실업으로 인한 고통, 고독사, 노숙자,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소외' 등)이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애'를 설파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예전에는 그분의 이상이나 가치관 정도로 여겨졌다면, 우리 사회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니, 그분이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나눔의 정신을 설파했는지 공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프랑스가 이미 겪었던(혹은 겪고 있는) 고통은 지금 우리 사회.. 2018. 3. 27.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 우치다 타츠루 ㅡ 실없이 웃으며 수준 높게 일하기 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가벼운 에세이라도 항상 뭔가 건질 것이 있다. 일본 사회의 변화 양상, 특히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작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에서는 저자의 인생관이 어느 시점에서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소개되어 있어 재미있었다. 그는 사춘기가 접어들자마자 부모와 자신은 뭔가 다르다고 느껴서 바로 집을 얻어서 나왔다고 한다. 물론 몇 달 후 다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경험은 이후 그의 삶을 좌우한다. 그는 '참고 견디는' 삶을 거부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들을 계속 참을 때 흔히 말하는, 감정적으로 둔감한, 존재의 외피를 두꺼운 껍질이 둘러싼 것 같은, '꼰대'가 양산된다는 것이다. 사춘기 때 그가 참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이후 그는 부.. 2017. 11. 26.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담백한 문장, 연륜에서 우러난 깊이, 진부하지 않은 성찰. ##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ㅈ럼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금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 2017. 9. 27.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김형중 여행지에서의 스쳐가는 감상은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없을 때가 많다. 광주 출신의 평론가가 자신을 K로 객관화하여 광주곳곳을 산책하며 쓴 이 에세이는 한 장소의 진정한 의미는 그곳과 마주한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정리와 금남로, 양림동에서 망월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장소를 K는 온전히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바타유는 여러 고상한 정의들(가령 생각하는 동물, 노는 동물, 도구적 동물 등등)을 제쳐두고, '소모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가장 적당한 정의라고 주장한 자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소모와 탕진에 매혹당하는 생명체다. (...)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문화 혹은 문명 일반이 실은 과잉 소모의 산물들이라고 프로이트주의자이자 바타유주의자인 K는 믿고 .. 2017.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