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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99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 이보다 더 쓸쓸하고 아플 수는 없다 새해 첫날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1월 1일 저녁, 이 책을 펼쳐둔 이유는 빌려놓은 새 책이 이것 뿐이어서였어요. 학교도서관에서 약 한 달쯤 전에 빌렸는데 그때는 두 꼭지를 읽고는 큰 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무거워서 단숨에 읽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책상 위에 한 달간 놓여 있다가 다시 집어든 책입니다. 저자는 특별한 종류의 청소 서비스를 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홀로 자살하고 뒤늦게 발견되어 방치된 집을 그 모든 냄새와 흔적을 지우고 새집처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인데요. 그래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그늘진 삶의 마지막 흔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닥의 핏자국을 지우고 벽을 닦고 온갖 물건을 치우며 가족보다 더 세세히 죽은 이의 삶의 마지막 조각들을 보게 되죠.. 2021. 1. 2.
[당신이 나의 백신입니다 / 김동은] __ 의사가 쓰는 코로나 현장 이야기 저자가 의대에 진학할 때 고3 담임교사가 "인간미 있는 의사가 되라"고 하셨다고 한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정말 한 인간의 깊은 향기가 여운으로 남았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문체, 문제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올바른 해법을 고민하는 겸허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더없이 따스한 눈길과 손길. 이런 분이 우리 곁에 살고 있었구나 싶다. 부담 없이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글 속에 그런 문장과 닮은 평온하면서도 올곧은 한 의사의 삶이 전해지는 책이다. 1부, 대구 코로나 사태 중에 일한 경험을 읽으며, 의료진은 물론 폐기물을 처리하는 청소노동자까지 수많은 분들이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게 되었고, 나머지 4부까지 읽으며 이분의 삶의 풍경 속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병과 노쇠, 죽음,.. 2020. 9. 6.
[완벽하지 않을 용기 / 우치다 타츠루] __ 교사는 부모와 다른 말을 해주는 사람 우치다 타츠루의 신간이 나왔다. 일본 사회의 변화 과정이 우리와 닮은 꼴이기에, 그리고 그 변화를 관찰하는 안목, 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경험과 지성과 연륜에서 우러난, 다른 곳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견해를 들려주기에, 이 작가의 책은 꼭 챙겨보게 된다. 이 책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 짐작컨대, 양국의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학교교육을 시장원리에 기초해서 말하고 사고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합니다. '학교교육을 시장원리에 기초해서 말하고 사고한다'는 것은, 교육을 이야기할 때 시장이라든지 수요, 비용 대비 효과와 조직관리, 공정관리와 같은 공학적, 시장적인 용어를 반복해서 입에 담는다는 의미입니다. p7-8 ## 학교의 인류학적 기능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 2020. 6. 18.
[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느 드 보부아르] __ 죽음의 폭력성에 대하여 아빠가 투병하시기 전에 나는 생각했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자연에서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 거라고.  하지만 실제 가족의 죽음을 겪고 나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그것이 어떤 나이에 찾아오든 엄청난 '폭력'이었다.  ## 나에게도, 더구나 엄마에게도, 종교가 죽음 뒤에 오는 행복에 대한 희망일 수는 없었다. 영원불멸이라는 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든 지상에서 이루어지든,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 영원불멸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p190 ##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 가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엄마에 대해 이런 상투적인 말들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 2018. 11. 28.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 호시노 미치오] __ 알래스카가 들려주는 이야기 내가 넘 사랑하는 작가. 자연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작가 중에서 호시노 미치오의 글을 제일 좋아한다. ## 이 여행은 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이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던 곳에도 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인간의 삶, 살아가는 모습의 다양성에 매혹되었다. 어떤 민족이든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살든 인간은 한 가지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세계는 그런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쉬스마레프 마을에서 보낸 석 달은 그 후 세월이 흐를수록 나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었다. 열아홉살(정확하게는 스무 살) 시절의 여름이었다. pp13 ## 카리부의 주요 식량인 지의류는 환경오염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간주될 만큼 대기오염에 .. 2018. 11. 26.
어둠 속의 희망/ 리베카 솔닛 리베카 솔닛의 문장은 좋다. 그러나 이 책 내용 대부분이 미국의 정치적이고 시사적인 이슈를 배경에 깔고 그 사회를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내겐 일정 부분 '추상적으로' 다가오고 글의 정확한 메시지가 읽히지 않는다. 그러면서 든 생각. 솔닛의 책은 번역되고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중대한 과도기에 있고, 얼마나 복잡다단한 이슈가 많은데, 이를 제대로 성찰하는 글은 보기 어려운 것일까. 소설가들의 소설 외 글쓰기의 경우에도 신변잡기적인 에세이나 여행기는 보았지만 사회를 깊이 성찰하는 글은 잘 못 본 듯하다. 다시 말해 저널리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그런 글을 만나기가 어렵다. 한국 지식인들이 글을 쓰지 않는 것인가? 출판이 되지 않는 것인가? ## 좌파의 절망은 많은.. 2018. 11. 21.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전 역사를 통해서 전쟁이 늘 이런 식으로만 여겨진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전쟁이 표준적인 상황이었으며 평화가 예외적인 것이었다. pp114 ##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러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 2018. 11. 20.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 동성결혼을 많이 주재한 한 장로교 목사는 내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뒤,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동성 커플들을 만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들의 관계에는 오래된 가부장적 기본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건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 보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전통적 결혼을 보존하는 것, 실은 그보다도, 전통적 성 역할을 보존하는 것이다. pp95-97 ##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5년 1월 18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당시는 그녀가 서른세살이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례없는 규모의 파국적 살육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몇 년 동안.. 2018. 11. 20.
둥글이의 유랑투쟁기/ 박성수 아무리 유명 작가라 해도(김영하, 김연수, 성석제 등) 타인의 여행기를 꼼꼼이 읽지 못하는 편이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만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잘 쓴 글이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여행기를 관통하는 철학이랄까 관점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개중에 그래도 괜찮았던 건 정여울의 에세이. 장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어린 시선 때문이었다). 이 책은 예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저자는 이 시대의 수도승, 순례자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약 9년을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게다가 매일 도심이나 마을에서 텐트를 치면서.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우리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수행의 삶을 산.. 2018. 11. 19.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 캄보디아의 한 스님이 쓴 책을 읽다가 불교의 팔정도를 설명하면서 '바를 정'을 흔히 해석하듯이 '올바르게'나 '똑바르게'가 아니라 '능숙하게'로 해석하는 걸 보고 동감했다. 예를 들어, 정견을 '올바르게 보기'라고 옮기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릇되게 보는' 게 된다. 반면에 이를 '능숙하게 보기'로 옮긴다면, 그러지 못한 이는 '서투르게 본다'는 의미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릇되게 보는 사람보다는 서투르게 보는 사람이 낫겠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20대란 뭘 해도 능숙하게 할 수 없고, 그래서 어떤 일에 오래 매달리지 못하는 나이, 즉 서툴러서 쉬 싫증 내는 나이다. pp38 ## 젊었을 때 많이 여행하라는 흔한 말을 뒤집으면,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라는 말이 된다. 나이가 젊.. 2018. 11. 18.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 일탈 욕망은 젊은/부잣집/도련님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성 해방이며 인간의 성장과 창조를 촉진한다. 자기 세계를 넓히기 위한 남자의 모험이다. 그러나 힘없는 자의 욕망은 역겹거나 최소한 심한 불편함을 준다.(노인의 성과 사랑의 '욕망'을 다룬 영화 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을 보라.) (...)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부르주아는 히피요 문화적 전위지만, 가난한 자가 그렇게 한다면 단지 초라할 뿐이다.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 2018. 9. 25.
정희진처럼 읽기/ 정희진 유명 작가들의 독서 경험을 쓴 책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잘 읽히지는 않았다. 타인의 독서 경험이 내가 푹 빠져 읽을 만큼 공감의 여지가 많지 않아서이다. 끝까지 다 읽은 책은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정도다. 이 책 '정희진처럼 읽기'는 예외다. 그냥 한번 훑어보려고 집어들었다가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다 읽고 말았다. 저자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 책이 자신에게 준 화두를 붙들고 그녀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든 몸은 '사회적 몸'이듯이 그녀가 통과하고 겪은 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영혼을 울린 책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개성적인 글쓰기의 모범 사례다. ## 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 2018. 9. 15.
낯선 시선/ 정희진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다르게 생각하기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식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사유의 힘이 중대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돈이나 물리력이 없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여성주의는 이 과정에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모델로 하는 메타젠더이다. pp17 ##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 2018. 8. 29.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 우치다 타츠루 ㅡ 자기 안의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 인간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소명은 노동하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실재하는 객관적인 소산'을 이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능력이나 적성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발견된다. 어떤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그 일을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본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 대개의 경우 외부의 능력 평가가 본인의 가치평가보다 객관성이 높다. 예술창조보다는 노동 쪽이 완성도에 대한 판정 기준이 훨씬 '녹록하다.' 예술은 어느 정도 고도의 기술이나 숙련, 노력의 성과가 있다고 해도, 만들어낸 작품이 '다른 사람과 똑같다'면 가차 없이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노동은 .. 2018. 8. 19.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현경, 김수진 우리나라 1세대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현경 선생의 책은 그간 다 읽었는데, 이 책이 가장 좋았다. 현경 선생이 이제 60대에 접어들면서 자기 삶을 아우르는 가장 완숙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현경이 아니라 30대 여성 김수진이라는 점이다. 30대 수진과 60대 현경이 4년간 만나고 여행한 결과인 이 책은, 김수진이 바라보고 느끼고 대화한 현경이기에 일반 독자가 공감할 만한 여지가 더 많은 것 같다. 현경이 굉장히 진보적인 신학자로 남다르게 용감무쌍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 '센 언니'의 언어가 바로 접수되지 않는 지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김수진이 현경을 가까이에서 만나면서 자신이 질문하고 답을 찾고,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소화한' 현경의 모습이.. 2018.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