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에세이95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담백한 문장, 연륜에서 우러난 깊이, 진부하지 않은 성찰. ##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ㅈ럼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금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 2017. 9. 27.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김형중 여행지에서의 스쳐가는 감상은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없을 때가 많다. 광주 출신의 평론가가 자신을 K로 객관화하여 광주곳곳을 산책하며 쓴 이 에세이는 한 장소의 진정한 의미는 그곳과 마주한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정리와 금남로, 양림동에서 망월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장소를 K는 온전히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바타유는 여러 고상한 정의들(가령 생각하는 동물, 노는 동물, 도구적 동물 등등)을 제쳐두고, '소모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가장 적당한 정의라고 주장한 자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소모와 탕진에 매혹당하는 생명체다. (...)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문화 혹은 문명 일반이 실은 과잉 소모의 산물들이라고 프로이트주의자이자 바타유주의자인 K는 믿고 .. 2017. 2. 12. 시대를 뜨겁게 통과한 기록;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도종환 오랜만에 좋은 에세이를 읽었다. 시인, 소설가들의 에세이는 그들의 시, 소설에 비해 내용이 헐거워서 큰 매력을 못 느껴왔는데 이 에세이는 예외였다. 어린 시절부터 오십대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종한 시인이 아프고 뜨겁게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면서 한국말이 이렇게 맑고 차분하고 쉽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 삶을 제대로 '겪어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군더더기와 허세가 없는 맑고 단단한 문장이었다. 에세이가 진정한 '겪음'의 기록일 때, 에세이가 창작만큼 힘이 있을 수 있구나도 느꼈다. 훌륭한 에세이는 경험과 함께 훌륭한 사유를 담아내지만 에세이의 본질은 '겪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시인이 초창기 전교조 활동을 시작.. 2017. 1. 5.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 호시노 미치오의 유작. 그의 저작 중에서 가장 좋았다. 알래스카의 대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수천년 이어온 원주민의 문화와 영성에 매혹되어온 저자의 발걸음은 이 책에서 이제 '큰까마귀' 신화가 있던 시대, 유라시아와 알래스카가 연결되었던 시대의 흔적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그 여행의 한가운데에서 저자는 '밥 샘'이라는 특별한 인물을 만난다. 그는 알래스카가 현대문명에 노출되어 파괴되어가는 시기, 격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젊은이 중의 하나였다. 샘은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지나서 다시 고향에 돌아온다. 그리고 오래 전에 파괴된 클링깃족의 신성한 묘지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는 혼자 묵묵히 그 버려진 묘역을 돌보았고 그렇게 십년의 시간이 흐르자 그 땅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십년에 걸친 샘의 작업.. 2016. 8. 24. <교황 프란치스코 어록 303> 종교 안에는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는 매우 많은 규범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노인을 폐기처분하는 사회는 이 지상에서 가장 불량한 사회이며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회입니다. 고통을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깊은 회한과 사면과 보상으로 죄와 불의는 치유되고 복원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치는 고귀한 활동입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해 순교자와 같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소명감으로 정치는 실천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열정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열정과 희망을 가졌어도 그것만으로 모든 걸 이루기는 어렵지요.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이나 부족함도 성찰해봐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2014. 3. 9.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임인덕 신부 이야기> - 권은정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역만리 먼 곳에 와서 생전 처음 보는 타국 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평생 살아간 이들이 있다. 어떤 종류의 가르침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 이분들의 특별한 헌신을 가능하게 했을까.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한국명 임인덕 신부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임인덕 신부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평전이라기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이다. 그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좀 더 또렷이 살려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한 독일 청년이 우리 시대를 읽어냄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서 참 좋은 책이었다. 강남의 대형교회가 한국 종교의 현주소가 된 지금, 종교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 2013. 7. 11.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미지의 땅을 공간적으로, 지리적으로 정복하고 탐험하는 여행,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 가장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방랑으로서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저자의 여행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원시의 숲, 빙하, 사막, 바다가 존재하는 곳, '야생'의 세계가 그 자신의 충만함을 여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어요.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이미지는 문화의 지배를 강하게 받습니다. 이 이미지들은 상당 부분 '인간적' 관점에 의해 왜곡된 것들인데요. 저자의 여행은 이와 같은 관념들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된 자연 너머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만나고 싶다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우리 내면의 심층적인 부분과는 한층 가.. 2013. 1. 23. 노 피어 - 정진구 책장을 펼치고 잠시 놀랐다. 이 큰 글씨, 이토록 넓은 줄 간격....헉..! 이렇게 독자의 눈을 배려한(?) 책은 오랜만에 본다. 책 표지는 근사한데 속 편집은 조금 허접해 보인다. 하지만 어쩌랴, 로이스터 감독에 대한 책은 이 한 권 뿐인 걸. 사진은 꽤 괜찮다. 이 책은 로이스터 감독의 야구 철학과 그가 감독을 맡은 3년간의 롯데 팀의 성적과 명승부들을 그려나가고 있다. 말 그대로 가벼운 스케치 정도의 글이다. 본문도 그렇고 야구 선수들과의 인터뷰도 그렇고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이나 해설이 아쉽다. 아무래도 나는 평전 스타일의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로이스터의 선수 시절 이야기와 그가 감독으로서 왜 그런 야구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책의 내용은 소략한 편.. 2012. 4. 17. 말들의 풍경 - 고종석 제목 그대로 우리말의 풍경을 기록한 칼럼 모음집이다. 글쓴이의 격조 있는, 그러면서도 쉽고 고졸한 한국말 문장을 따라가는 즐거움, 자연 언어 현상에 대한 지적 이해가 있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언어 현상을 주제로 한 칼럼이라는 점이 좋았다. 이 글의 특징은 '풍경'이 뜻하는 바대로 저자가 관찰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지나치가 멀거나 가깝지 않으며 대상으로부터의 '온기'가 느껴질 딱 그만큼의 거리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학문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으며 대신에 우리를 둘러싼 언어 현상의 면면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우리 삶과 맞붙어서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 자연 언어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오고 그것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제.. 2012. 3. 27. 소금꽃나무 - 김진숙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동시대라 해도 각자가 살아가는 세계가 너무 다르기에. 세상은 조각조각 다른 색색의 천을 붙여 만든 패치워크처럼 저마다 다른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어붙인 건 아닐까. 그 조각들은 서로 붙어 있지만 조화롭지 않으며 어떤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한 시대의 풍경을 이루지만 우리는 우리와 이어져 있는 다른 조각들을 미처 보지 못한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은 60년생이다. 내가 74년생이니 14년 차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시차, 어찌 됐건 동시간대를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가슴을 한번 쓸어내렸다... 2012. 1. 22. 자기혁명 - 박경철 '태도'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반응하는 경향을, 백과사전에 의하면 '가치'나 '관심', '감정'보다는 범위가 좁고 '신념'이나 '견해' 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칭한다. 내면의 잠재적 경향을 가리키기도 하고 외부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있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 많은 경우 이 둘은 일치하지 않는데, 자신과 타인을 동일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태도'라는 것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갈고 닦은 사람일 것이다. 박경철 원장의 '자기혁명'을 읽고 내 마음에 남은 키워드는 'atitude'였다. 삶의 태도. 본문에서도 저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애티튜드가 몸으.. 2011. 12. 10. 운명이다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다시는 이같은 분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다시는 이같은 분이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수없이 흐른다 해도... 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 달라진 시대에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갈 것이므로... 노무현 대통령. 그의 개성과 열정과 투쟁과 분노, 번득이는 통찰은 모두 그 시대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 겪은 지독한 가난, 그로 인해 학창 시절 겪은 열등감, 청년기의 좌절과 방황, 그것을 넘어서 인권 변호사와 민주화 투사,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이 모든 드라마는 그의 환경과 성격과 시대와의 조합의 결과였다. 하여, 우리는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남.. 2011. 8. 28. 플래닛 워커 - 존 프란시스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이라는 부제에 홀려서 읽었다. 냥냥군이 마침 집에 와 있어서 읽고 나서 말했다. "아, 진짜 부러워." "누나도 학교 때려 치우고 가고 싶은 데 가면 되지." "내 노후는 어떡하고?" 잠시 둘 다 침묵에 잠겼다. 서로 비슷한 처지인지라. 대강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처럼 일찍이 어떤 내적 확신에 의해 남들이 이해 못하는 길을 두려움 없이 선택한 사람. 그렇게 약 이십 여년이 흐르고 그가 선택한 길이 메아리가 되어 세상에서도 반향을 일으키는 사람. 반면에 사회의 기준에 따라 이십 년쯤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회의와 공허감을 느껴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사는 사람. 물론 대부분은 이도 저도 아니겠지만. 후자의 경우도 훌륭하지만, 나는 .. 2011. 8. 9.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이태석 가톨릭 성가 중에 '묵상' 이란 곡이 있다. 세계 평화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담긴 노래인데 대학 시절에 간간이 듣고 불렀지만 작사/작곡자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작년에 KBS 스페셜의 를 보고 그 노래의 지은이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 수십 년의 내전으로 폐허가 된 땅 수단에서 의사이자 신부로 봉사했던 고 이태석 신부가 바로 그였다. KBS 스페셜은 그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뜨고 난 후 그 남은 자취를 추적하는 일종의 순례기이다. 그의 흔적이 담긴 톤즈 마을과 인근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생전에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함께 담았다. 의사가 없는 지역이라 환자가 하루 200-300명씩 들이닥칠 때도 많았다 한다. 맨 땅에서 병원을 짓고 학교를 짓고, 백신을 냉장고에 보관하려.. 2011. 7. 29. 히말라야 도서관 - 존 우드 히말라야도서관세계오지에3천개의도서관,백만권의희망을전한한사나?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존 우드 (세종서적, 2008년) 상세보기 지하철로 출퇴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근무지가 대구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바뀌었는데, 앞산순환도로가 아침에 많이 막히기 때문에 자가용으로 가는 시간이나 지하철로 가는 시간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2호선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는 것이 좀 번거롭긴 하지만, 대개 앉아서 가기 때문에 탈 만하다. 1시간 운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은 지하철을 타고 가며 즐겁게 본 책이다. 전직 마이크로소프트의 핵심 간부가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복지 사업을 시작한 계기와 사업 전개 과정을 에세이 형식으로 쉽게 풀어놓았다.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다가 모처.. 2011. 3. 27.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