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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국내여행 단상89

겨울 한라산, 어리목~영실 코스 눈이 너무 보고 싶었다. 전국에 흔한 그 눈이 올겨울 대구엔 한 번도 안 왔다. 눈을 못 보고 봄을 맞으려니 겨울을 그냥 잃어버린 듯한, 시간이 증발된 듯한 느낌이었다. 오미크론 무서워 꼼짝 않고 있다가 3차 맞고 비행기를 탔다. 올겨울 딱 하루지만 눈을 실컷 봤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한라산에만 펑펑 내린 눈은 다음날 햇볕 좋은 날씨를 선물했고, 아침에 제설이 되어 산간도로에도 택시가 올라갔다. 백록담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2월말까지 예약 마감이라 내가 택한 길은 예약 필요 없는 어리목-영실 코스. 난 한국의 ‘큰 산’이 넘넘 좋다. 두세 시간만 오르면 도착하는 천국. 세속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곳. 어떤 여행지도 이만큼 빨리 모드 전환을 이뤄주진 않는다. 사람의 룰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 2022. 2. 9.
인상적인 로비,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식구가 전남대에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같이 갔다. 기다리면서 전남대 민주길을 산책했다. 5.18 흔적이 곳곳에 있었는데 사회과학대학의 윤상원홀이 눈에 띄어 들어가봤다. 그리 크지 않은 로비지만 윤상원의 방이 있고 중앙 통로가 윤상원길로 꾸며져 있어서 신선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열사는 5.18 때 전남도청에서 총상으로 돌아가셨고, 그의 사후 영혼결혼식에서 부른 노래가 잘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내가 가본 단과대학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 전남대 사회과학대학이었다. 중앙 통로인 윤상원길 벽엔 두 가지 질문이 쓰여 있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과학도가 늘 간직할 법한 물음이다. 중년에 이런 젊음의 기운이 가득한 물음을 마주하니 풋풋하고.. 2022. 2. 6.
건물 전체가 역사의 현장, 광주 전일빌딩 주말부부 3일차. 블로그, 페북을 갑자기 열심히 하고 있다. 짐 챙겨주려고 명절 직전에 광주에 갔다. 광주 명소는 거진 다 본 줄 알았는데 놓친 곳이 있었다. 전일빌딩. 내가 방문한 5.18 관련 어떤 장소보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80년 5월 27일, 도청 진압을 앞둔 시점, 헬기 사격 탄흔 245군데가 남아있는 곳. 철거될 뻔 하다가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한 지 얼마되지 않는다 한다. 건물 전체가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이고 전시도 충실하다. 옥상에서는 전남도청, 금남로, 양림동 등 주변이 환하게 들어와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광주에 갈 일 있는 분들은 한 번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린다. 2022. 2. 5.
"내가 사실은 바보야" / 군위 김수환 추기경 기념공원 며칠 전, 군위 천주교 묘지에 아빠 보러 갔다가 맨날 지나가면서 보고 들르지는 못했던 김수환 추기경 기념공원을 처음 구경했다. 아담한 전시관에 주변 공원이 산책하기에 넉넉하게 잘 조성되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애 말년의 보수적 발언이 약간 논란이 되긴 했지만 그건 흠이라 할 수도 없고 정말 훌륭하게 평생을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던 생애구나 했다. 사제 시절, 일찍이 독일 유학을 갔는데 그때 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해 또렷한 인식을 갖게 되신 것 같았다. 전시관을 훑어보며 이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사실은 바보야.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걸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그래서 기념관 스탬프에도 '바보야'라고 적혀있다. 요즘 주위에 그저 성실하게 살아온 많은 .. 2022. 1. 14.
여행의 본질은 __ 순천에서 대구, 무궁화호 기차에서 코로나 때문인지 덕분인지, 작년부터 국내여행을 꽤 했다. 코로나가 잠잠한 시기를 골라서. 방문한 장소는 참 좋은데, 여행이 짧아서 그런가, 뭔가 여행 같지 않고 잠깐 마실 다녀온 느낌이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무궁화호 기차를 타보고 알았다. 그간 국내여행이 왜 밋밋했던가를. 이유는 여정, 즉 이동 경로에 있었다. 직선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웬만한 곳은 한두 시간이면 닿는다. 너무 빨리 집에서 방문지에 닿으니 약간 순간이동한 느낌? 가장 빠른 길로 달려가는 것이 꼭 가장 많이 보는 건 아님을 다시금 느꼈다. 한 달 쯤 전, 순천에서 대구로 돌아올 땐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저녁 시간 버스가 있는 날이 퐁당퐁당 이틀에 한 번이고, 그날은 오후 3시가 마지막 버스였다. 3시까지 순천만을 다 볼 수 없어서 혹.. 2021. 7. 19.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 하동 악양면 평사리 1987년, 중딩 때 빠져들어 봤던 최수지 주연의 대하드라마 토지. 스무 살 때 책으로 본 ‘토지’는 기대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서희와 길상의 로맨스가 대강 마무리되자 더 읽지 못하고 4권쯤에서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펄벅의 ‘대지’에서 받은 민초들의 생명력을 ‘토지’의 다양한 군상들 속에선 별반 느끼지 못했다.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이 하동 평사리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기가 막힌 장소일 줄도 예상 못했다. 지리산 굵은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섬진강과 만나고 산자락이 병풍처럼 감싸안은 마을 앞으로는 폰으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시원하게 펼쳐진 너른 들판까지… 와~~ 지리산과 굽이치는 섬진강이 만나는 곳에 펼쳐진 드넓은 모래사장에 비옥한 악양평야까지..... 이 모든 게 한 자리에 모여 마을에서.. 2021. 6. 27.
뱀사골과 지리산 천년송 지리산, 그리고 뱀사골... 2005년 단풍이 절정일 때, 내 생애 최고의 '가을'을 만난 곳이다. 가을,,, 하면 언제나 지리산이 떠오르고 뱀사골이 어른거린다. 이후로 그처럼 아름다운 단풍은 보지 못했다. 날씨에 따라 해마다 단풍 빛깔이 다르다. D가 어디 갈래? 하고 묻자마자 내 입에서 '지리산'이 나왔다. 이 얼마만에 간 지리산인지,,, 산자락이 보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등산 대신 2박 3일 캠핑을 하고, 뱀사골 계곡을 가볍게 트레킹하는 일정이었다. 전날 내린 비 덕분인지 시야가 맑아 힘차게 뻗어간 지리산 줄기와 능선이 장관이었다. 여름숲의 푸름도 단풍 못지않게 좋았다. 길모퉁이마다 마주치는 초록빛 소의 아름다움에, 계곡을 감싸는 시원한 물소리에 눈과 귀를 헹구는 기분이었다. 이 숲과 계곡이 우리.. 2021. 6. 8.
[오디오북] 그대들 돌아오시니 ㅡ 종로 경교장 sheshe.tistory.com/882?category=874955 부크크를 통한 독립출판, "내게 특별한 여행지" 드디어 책을 받았다. 원고 정리에 시간이 좀 걸렸고 인쇄는 일주일만에 되었다. 전에 쓴 글을 정리하는 작업이라 일주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글에 비문도 많고 연도 같이 세세한 sheshe.tistory.com 2020. 4. 24.
[오디오북] 지리산을 품다 ㅡ 하동 이병주문학관 sheshe.tistory.com/882?category=874955 부크크를 통한 독립출판, "내게 특별한 여행지" 드디어 책을 받았다. 원고 정리에 시간이 좀 걸렸고 인쇄는 일주일만에 되었다. 전에 쓴 글을 정리하는 작업이라 일주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글에 비문도 많고 연도 같이 세세한 sheshe.tistory.com 2020. 4. 19.
이름 모를 민초들의 마음이 새겨진 장소, 최제우나무 / 대구 근대골목 대구 근대골목에 자리한 종로초등학교에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수령 사백 년이 되는 회화나무, 이 나무의 이름은 '최제우나무'다. 왜 나무에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이름이 붙었을까. 대구 종로초등학교는 옛 경상감영의 감옥이 있던 자리다. 바로 근처에 1601년 선조 때 세워진 경상감영이 있다. 경상감영은 경주, 안동 등을 옮겨다니다가 선조 때부터 대구에 완전히 정착했다. 종로초등학교의 회화나무 수령이 4백년쯤이니 이 나무도 경상감영이 자리잡을 즈음에 생겨났으리라 여겨진다. 이 경상감영에 1864년 경주에서 체포된 한 남자가 이송된다. 100일간의 고문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그 해 4월 봄날, 혹세무민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가 참형을 당한 장소는 경상감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2019. 9. 14.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종묘와 창덕궁 유홍준 선생은 한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유적과 유물을 이야기한다. 왕조사가 중심이 된 시대 구분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이 한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리가 있는데 나 또한 학교에서 역사를 왕들의 이름과 업적을 죽 나열하는 식으로 배웠고 그런 식의 역사 공부는 가슴에 스며들만한 무언가를 내게 전달하지 못했다. 유홍준 선생 말처럼 한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품은 물론 민중의 생활 도구 등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할 것 같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는 너무 멀다 쳐도 조선 시대는 바로 가까운 시대인데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조선이 어떤 나라였을까. 세종대왕의 업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각종 사화, 구한말의 세도정치와 국권침탈, .. 2018. 12. 18.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한 시대를 한 마디 말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시대의 다양한 표정을 한 마디로 포괄하기도 역부족이고 역사를 단순화해서 바라볼 위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논란을 넘어서 한 시대의 본질적인 부분을 슬쩍 통찰하게 하는 장소와 유물이 있다.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가 내겐 그런 곳이었다. 경찰청 인권센터에 가려고 서울역에서 남쪽으로 한 정거장 아래인 남영역에 내렸다. 인권센터는 남영역 바로 근처에 있었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이지만 원래 군사독재 시절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던 곳이다. 1987년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숨진 곳이자, 정지영 감독의 영화 의 무대가 되는 곳. 지금은 인권센터 바로 맞은 편에 호텔이 몇 채 들어서 있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입구 사무실에서 출입허가증을 받고 마당에 들어서니.. 2018. 10. 27.
시간이 '신'인 것일까 _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효창공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역에서 멀지 않았다. 남영역이나 숙대정문역으로 한 정거장 더 가야 하지만, 지하철로 가나 걸어가나 총 20분 정도여서 걸어가기로 했다. 박물관은 숙명여대 제1캠퍼스 인근에 있는 5층 빌딩이었다. 일반 빌딩을 리모델링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이라 처음엔 잘 찾지 못했다. 출입구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건물 벽에 붙어 있는 박물관 간판을 보고 알았다. 입구에는 성금을 낸 시민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민간에서 만든 박물관이기 때문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운 박물관이다. 올해 개관했는데,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에 맞춰 문을 열었다. 십여 년 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두 번째 큰 성과다. 박물관 설립 위원장.. 2018. 9. 22.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사람 _ 덕수궁 중명전에서 서울 답사 여행의 핵심은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길이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곳은 덕수궁에서 시작해서배재학당과 경교장을 지나 사대문 밖 서대문형무소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근세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특히 덕수궁 담장과 바로 붙어 있는 러시아 대사관, 역시 인접한 성공회 성당과 영국 대사관 등의 자리를 보면 아관파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감이 나고 당시 외세가 왕의 바로 곁에서 어떻게 내정에 간섭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래 덕수궁은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한다. 덕수궁 일대의 부속 건물을 다 허물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각국 대사관이었다. 덕수궁 바로 건너편에 미국 대사관이 있고 거기서 몇 블럭 더 가면 일본대사관이 있다. 덕수궁은 광해군 시대로부터 고종 .. 2017. 12. 11.
평화의 소녀 _ 광화문 일본대사관 일본대사관은 광화문에서 지척에 있었다. 교보빌딩을 지나 골목을 몇 개 지나니 대사관이 나타났다. 층을 올리는 공사중이어서 본관은 가림막을 쳐놓았다. 소녀를 찾아서 그 맞은편으로 눈길을 돌리자 대사관 건너편 인도에 '평화의 소녀'가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과 눈길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하는 감정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다 언론에서 사진으로 워낙 많이 접해온 터라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지나던 길에 한번 보자 해서 들른 참이었다. 평소 이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었기에 나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이미지와 실재는 그렇게 달랐다. 소녀는 열다섯 열여섯쯤으로 보이는 가녀린 몸으로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그 작고 가녀린 '몸'은 그 어.. 2017.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