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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86

알로하, 나의 엄마들 | 이금이 — 백 년 전 하와이 이주 여성들의 삶 겨우 40쪽을 넘어가고 있을 때부터 울컥, 눈시울이 찡해졌다. 아직 특별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일제강점기 그 시절 작은 마을의 어디에나 있었을 법한 평범한 여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계속 마음이 흔들거렸다. 아마도 그것은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는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저녁 나절에 단숨에 다 읽었다. 착하고 속깊은 버들이, 씩씩하고 대범한 홍주, 숫기 없는 여린 송화. 가난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순박한 여인들이 사진 한 장 보고 하와이에 시집가면서 벌어지는 삶의 역정. 도착 첫날부터 산산이 깨어진 꿈. 이민자로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가족 이상으로 끈끈한 자매애, 밑바닥 노동자지만 고향과 조국에 대해 품었던 애틋한 마음씨. 이 모든 것이 한 편.. 2020. 5. 29.
별을 스치는 바람 | 이정명 ㅡ 후쿠오카 감옥의 윤동주 시인을 만나는 반가움 재작년 후쿠오카 여행을 갔을 때 윤동주 시인을 생각한 적이 있다. 교토 릿쿄대에서 수학 중이던 윤동주 시인은 민족주의 학생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1944년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했다. 지금 감옥은 없어졌다고 들었지만 그 장소에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여행 준비 중에 들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라 직접 찾아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 을 읽는 내내 내가 가보지 못한 후쿠오카 감옥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났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후쿠오카 감옥 안에서 펼쳐진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을 넘나든다.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시선은 추리소설의 플롯이 아니라 딴 곳에 가 있었다. 내 관심은 그곳에서 윤동주 시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2019. 11. 10.
제7일 | 위화 — 노벨상 타셔도 될 것 같다 지하철에서 별 생각없이 첫 장을 펼쳐들었다가 순간 몰입하여 내려야 할 역도 놓치고 우왕좌왕. 집에 돌아와 엉엉 울면서 마저 읽었다. 망자들의 세계를 이처럼 따스하게 그린 작품이 있을까. 주인공 양페이의 죽음 뒤 7일간을 그린 소설. 그 이레 동안 양페이는 자신의 삶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을 그의 마음에서, 혹은 저승에서 소환하고 재회한다. 따스함과 유머, 어리석음과 비극이 점철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그 배경에 흐르는 중국 현대사회의 모습도 인상 깊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감동시키는 건 이십대에 철길에서 양페이를 주워 평생을 성실하게 길러낸 그의 아버지와 이웃들의 진한 인간미다. 책장을 펼치면 멈출 수 없는 소설. 대단한 필력. 작가 위화는 아직 중년인데 머잖아 노벨상 타셔도 될 것 같다. 2019. 10. 11.
세 여자(1~2) | 조선희 ㅡ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여성 혁명가들 이 책에 나오는 남자들은 거의 다 아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 곁에 있었던 여인들의 존재를. 단지 혁명가의 아내 혹은 내조자가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시대에 혁명을 꿈꾸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던 씩씩한 여인들의 존재를.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댕기머리를 싹둑 잘랐던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은 이후 그들의 삶을 역사의 가장 험하고 거친 굴곡 속으로 데리고 간다. 상해,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에 이르는 여정까지는 그런가보다 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여정이 조선의용군이 싸운 타이항산(태항산) 일대와 스탈린 치하 카자흐스탄 유형지에 이를 때에는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두 권의 소설을 가끔씩 멈추고 심호흡을 하며 읽었다.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2019. 3. 4.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 안재성 ㅡ 실화를 재구성한, 분단이 가져온 고통의 기록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으며 '무당의 공수' 같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 세대 여성들의 구비구비 굴곡진 처절한 삶을 무당의 공수처럼 토해낸 소설. 읽는 과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 여인들의 상처와 슬픔을 듣는 그 시간이 '치유'의 시작임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었다. 이미 모든 사건은 벌어졌고, 또 지나갔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 사건이 다시 우리 앞에 놓일 때, 우리 혼의 일부가 치유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이야기가 우리 내면의 메마르고 딱딱한 껍질을 부수어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넓은 맥락에서 그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안재성 작가가 신작 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후기에서 작가가 자신을 '글 무당'이라 소개해서 반가웠다. .. 2018. 11. 25.
영초 언니 | 서명숙 ㅡ 유신정권에 맨몸으로 맞선 청춘들의 이야기 한 시대의 진실한 기록 앞에서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이 소설은, 아니 사실을 기록한 넌픽션은 70년대 유신정권 말, 386 이전 세대가 마주친 세상의 이야기다.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들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마치 의병운동을 하듯 두려움에 떨면서도 목소리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 시대를 가장 아프고 치열하게 건너갔고 그 거센 물살의 흔적으로부터 내내 자유로울 수 없어서 이후에도 사회에서 결코 행복하고 안온하게 살아갈 수 없었던 그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 지금 영초 언니는 심각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자신에 대해 간단한 말밖에 하지 못하고 저자 서명숙은 영초 언니를 대신해서 그녀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먼 기억 속에서 불러와 우리 앞에 꺼내놓는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만나지 못한(남자주인공의 조연이나 성.. 2017. 11. 21.
얀과 카와카마스 | 미치다 준 — 이 책을 읽고나면 하루를 쉬어야 한다 ## 만약 그대가 카와스마스는 늘 꾸기만 하고, 게다가 꾸어 간 것들을 갚을 줄 몰라 교활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조금 지쳐 있다는 증거다. 오늘 하루는 우선 학교를 쉬어라. 학원도, 에비학교도 쉬어라. 회사도 쉬어라. 온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 보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혹여 카와스마스는 이름의 날을 구실로 삼은 사기꾼이라고 여긴다면, 장 주네처럼 가방 속에 칫솔 하나만 달랑 넣고서 지금 곧 회사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학교는 무단으로, 학원이나 예비학교는 지체없이 그만두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보라. 아득히 먼 이국의, 여행지의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면서 그냥 그대로 인생 최후의 날에 칫솔 하나 남기고 떠난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그대의 책임이다. 도저히 그런 일은 못하겠다, 나날의.. 2017. 9. 29.
백년의 고독 | 가브리엘 마르케스 —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한 가문의 이야기에 녹여넣은 걸작 대단한 작품이었다. 요샌 집중력이 약해져서 두 권을 한 호흡에 읽기가 쉽지 않은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우르술라, 아우렐리노, 부엔디아, 아르까디아, 레메니오스, 아마란따 등 1세대에서 6세대까지 같은 이름이 무한히 반복되어 누가 누군지 헛갈리는 중에서도 읽기를 지속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애잔하고 쓸쓸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마치 민담이나 판소리를 들려주듯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부엔디아 가문의 인물들의 탄생과 죽음, 그들이 비껴갈 수 없었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색색의 무늬로 펼쳐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고 나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고독'의 의미가 둔중하게 가슴을 울린다. 소설의 배경은 부엔디아 가문의 1세대인 우르술라와 아르까디아가 정착하여.. 2017. 4. 15.
거짓말이다 | 김탁환 ㅡ 세월호 아이들을 건져올린 진도 바다의 잠수사들을 만나다 많은 것이 거짓말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거짓말을 했다. 수백 명의 학생의 죽음과 유가족의 눈물 앞에서도. 그리고 그 거짓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아마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더한 후안무치를 목격하긴 어려우리라. 거짓이 뒤덮은, 거짓이 조금 익숙해지기까지 한 세상에서바르고 참된 말을 붙잡고 보존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예술가다.김탁환은 소설 에서 민간잠수사 김관홍의 목소리를 통해 세월호를 보여준다. 진도 바다의 잠수사들이 그 거칠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아이들 하나하나를 찾아 끌어올릴 때마다 묻혀 있던 진실이 하나둘 살아서 돌아온다. 진실은 객관적이지 않다. 진실은 그 현장을 직접 지키고 목격했던 사람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고 주관적인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나는 진실이 항상.. 2017. 1. 11.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주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그 날따라 제목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왔다. 책 제목이 누군가의 '슬픔'이라니........! '슬픔'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어 다시금 책장을 펼쳐들었고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며 젊은 베르테르가 보고 듣고 느낀 세계의 촉감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젊음이란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힘이라고. 세계로부터 받은 인상을 관습이라는 필터로 여과하지 않고 가장 정직하게 수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기쁨이건 슬픔이건 그 무엇이든간에 일백퍼센트 느끼고 그 감성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힘이라고. 우리의 노동과 일상은 그 힘을 조금씩 갉아먹는다고. 베르테르의 편지를 따라가면서, 그를 매혹시킨 자연과 그에게 혐오감을 준 가식적인 귀족사회와 그가 무엇보다도.. 2017. 1. 10.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 성장소설이라기엔 무언가 아쉬운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한 번 봐야지 하는 생각에 일부러 시간 내어 읽은 책. 이게 대체 언제적 소설인데 좀 심한 뒷북이긴 하다. 좋아서 읽은 작품이 아닌데다 두께감까지 있어서 중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다 읽느라 조금 힘들었다. 역시 하루키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 감각적인 문체, 세밀한 장면 묘사, 그리고 줄곧 느껴지는 어떤 공허감... 이 공허감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는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는 청춘의 방황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네 명의 청춘들, 기즈키, 나오코, 와타나베, 미도리 모두 현실을 겉도는 느낌이었다. 한 젊음이 처음 세상과 맞부딪혔을 때, 그들은 좌절하거나 그것을 뚫고 넘어서거나 실패하고 자기 안에 침잠하거나 한다. 그런데 이 하루키의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2016. 9. 26.
<꿈꾸는 식물> - 이외수 소설가는 자기가 목격하고 탐구하고 창조한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냅니다. 그래서 소설 읽기는 작가가 초대하는 어떤 세계로의 여행이에요. 그 세계는 굉장히 낯설어보여서 때로 읽기는 어떤 먼 나라나 다른 혹성으로의 여행 같습니다. 읽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야 우리는 그것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 우리들의 세계의 은유임을 깨닫게 되지요. 이외수의 소설 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장미촌'이예요. 이름은 예쁘지만 세상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곳. 그곳에서 창녀들의 포주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만큼이나 무식하고 폭력적인 '큰 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돈, 권력, 섹스만이 난무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면 장미촌은 그 대답이 될 듯합니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들이 드글거리는 세계랄까요... 2016. 9. 25.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사람은 누구나 비밀 한 두가지씩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비밀은 그것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만큼 마음 한 켠에 가만히 놓여 있지만 또 어떤 비밀은 한 사람의 마음을 꽁꽁 얽어매고 그의 삶 전부를 지배하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바로 그런 비밀을 간직한 남자다. 그는 학식이 있으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 사회와 일정 부분 격리되어 그 혼자만의 세계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요동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학생 '나'는 젊음에서 우러난 호기심과 정열로 '선생님'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고 그에게 점차 다가간다. 그의 순수한 마음에 선생님은 점차 마음을 열게 되고 죽기 전에 정성들여 쓴 편지에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럴.. 2016. 8. 10.
제인 에어 | 샬롯 브론테 — 150년 전에 지금보다 더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을 그려내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봄날, 친구가 재밌다고 빌려준 두툼한 두께의 책. 내가 처음으로 접한 본격적인 소설이었다. 분량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그간 보아온 어린이용 책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정신없이 이야기에 빨려들어갔고 마음 깊이 감동했다. 한 고아 소녀가 씩씩하게 이 세상을 헤쳐가며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영국과 전혀 다른 문화적, 시대적 배경의 소녀에게도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 첫만남으로부터 거의 삼십년이 지나서, 이 소설을 썼을 때의 작가의 나이를 몇 살 지난 시점에,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보다 작가가 그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끌어내어 창조한 한 여인의 인생관에 더 깊이 매혹되었다. 제인의 대사 .. 2016. 8. 8.
채식주의자 | 한강 — 그는 왜 식물이 되고자 했을까 세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 아니 오직 폭력만을 행사했을 때, 세계와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탈주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종류의 탈주가, 치유와 구원이 가능할까? 한강의 는 그러한 의문들에 대한 작가의 추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상 속에 켜켜이 쌓인, 콕 찝어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폭력, 그 누적된 폭력의 시간에 어느 날 저항하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광기'가 탐미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용하고 변화 없는 삶을 살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냉장고 속의 고기를 내다버리며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영혜를 둘러싼 이들의 평온해보이는 일상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식물이 되고자 시.. 2016.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