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책 이야기/시와 소설86

<지리산 1~7> - 이병주 소설 초반의 집중도에 비해 후반이 흡입력이 약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시대인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근현대사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일제 강점기의 중학교 교실에서 시작해 일본 유학, 징용 거부, 해방 정국, 6.25 동란, 빨치산 투쟁의 와중에 주인공들이 자기 시대를 고민하고 시대와 맞서 싸우고 결국 시대의 파고에 휩쓸려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중 인물 대부분은 실존 인물로 저자의 지인이라고 한다. 저자는 공산당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공산주의를 '분열'의 사상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 2015. 3. 8.
소년이 온다 | 한강 — 참혹하게 아름다운 80년 광주에 대한 애도 아주 힘들게 읽었다. 특히 초반부, 전남도청 안으로 시신이 도착하는 장면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 넘어가는 것이 힘에 겨웠다. 마치 내가 그때 그 시간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작가는 놀라운 솜씨로 그 사라진 시간을 복원해낸다. 제목이 '소년이 온다'이다. 말 그대로 한 소년이 수십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 앞에 왔다. 죽은 자의 세계에 가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그 혼을 작가는 불러낸다. 그 혼의 소리를 들으며 감히 슬픔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저 감사했다. 지금 이 시간을 가져온 이들에게. 1980년, 우리의 아픔을 미리, 대신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대신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었다. 마치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어떤 숭고한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2015. 1. 31.
브리다 - 파울로 코엘료 알라딘 중고샵에 팔 책들을 정리하다가 코엘료의 를 발견했다. 예전에 읽고는 시시한 소설이라고 생각해서 팔 책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었는데, 책장을 몇 장 슥슥 넘기다가 이야기에 빠져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게 되었다. 역시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읽을 때의 상황과 감성이 그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새롭게 읽힌 건 어쩌면 지금이 가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군더더기 없는 소설이었다. 문체는 우아했고 삶과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스물 한 살 브리다와 지혜 깊은 마스터들의 대화가 맑고 청량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물음은 '소울메이트'는 존재하는가이다. 작가의 대답은 간명하다. 우리는 한 번의 생에서 한 명 이상의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된다고. 이 소울메이트는 내 마음에 드는 완벽한 이상형.. 2014. 11. 2.
<눈뜬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초반은 느린 호흡에 적응하지 못해 좀 힘들게 읽었지만 후반부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랄 만큼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며 읽었다. 황홀한 작품이었다. 이런 말들을 읽을 수 있어서, 이런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는 의 후속편 격이다. 가 보편적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주고 있다면 는 권력의 속성과 그것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을 아프게 펼쳐보여준다. 읽으면서 도 생각났다. 이 책이 언론이 한 인간을 죽이는 과정을 마치 신문 기사처럼 건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면, 는 사라마구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창조한 독특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 현실보다 더 진한 현실을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언론뿐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권력체.. 2014. 4. 6.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 공선옥 마치 무당의 공수 같은 소설이었다. 한 시절 가슴에 박힌 한을 토해내고 그 한서린 혼들을 불러모아 위무하는 일종의 씻김굿. 5. 18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정애와 묘자의 슬픈 얼굴이 곧 광주의 얼굴 같았다. 부모 잃은 약자인 두 소녀는 그들의 착함에도 불구하고 그 착함이 독이 되어 그 시대를 가장 힘겹게 통과한다. 세상은 그녀들의 목을 내리조르고, 그녀들은 함부로 겁탈당하고 살인죄를 쓰고 정신 이상을 앓는다. 이 삶들이 너무 신산스러워서, 너무 춥고 어둡고 아파서 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이 이야기들이 내 가슴의 한 부분을 치유하고 내가 사는 오늘을 비추어주는 힘이 있음에 깜짝 놀랐다. 짐승의 무리 속에서 삶이 부서진 그녀들이 그 부서짐을.. 2013. 9. 13.
<흑산> - 김훈 김훈의 문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가로서의 그의 재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감각적 문체의 끝이 허무로 잏닷아 있는 점이 내 취향이 아니다. 십 년도 더 전, '칼의 노래'를 접했을 땐 그 감각적 허무주의가 일순간 매력을 불려오기도 했지만, 이후 내가 살아온 시간은 김훈이 축조해낸 정서의 세계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책을 빌려준 친구의 권유가 아니었더라면 '흑산'을 집어들지 않았으리라. 18세기라는 공간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천주교 박해 과정을 중심으로, 특히 정약전과 황사영 두 인물이 역사적 격변을 헤쳐가는 방식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내 흥미를 끌었다. 후각과 미각을 강하게 환기시키며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묘사의 힘은 여전히 대단했다. 그 감각.. 2013. 8. 31.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 김려령 처음 몇 페이지를 설렁설렁 넘겼다. 단단하고 빡빡한 문장들을 보다가 오랜만에 손에 잡은 동화책의 문장들이 좀 헐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갈수록 나도 모르게 이야기속에 빠져들었고, 결말이 궁금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 밖의 사건을 이야기 속에 감추어두고 살짝살짝 꺼내는 서사의 힘, 상처 입은 자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시선은 역시 김려령이구나 했다. 만큼 재기발랄하진 않지만, 다 읽고 나서 작가가 들려주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한층 진한 영상으로 마음에 남는다. '건널목 아저씨'와 그가 돌보아준 아이들, 태석과 태희, 도희, 그리고 작가 '오명랑' 모두가 사람의 '고운 결'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마음결'이 너무 곱고 따스해서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2013. 8. 22.
<눈 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단순히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진데 말입니다. 여기, '볼 수 있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두 눈으로 정말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되묻게 하는 작품이 있어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소설은 '실명'이라는 원인 모를 병이 뒤덮은 한 도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사람들은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마음까지 같이 멀게 돼요. 눈 먼 자들이 갇힌 병동은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함 속에 내버려지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은 말소되고, 그곳을 지배하는 건 언제 끝날 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의 신음뿐입니다. 단 한 여인만이 볼 수 있었고 그녀는 남편과 그 곁의 .. 2013. 8. 15.
<1984> - 조지 오웰 오래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저자가 묘사한 1984년이 도래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2013년, 다시 이 명저를 집어들면서, '1984년'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수많은 사회 속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외부당원 윈스턴이 '진리국'에서 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조작하는 일이다. 실제 일어났던 모든 사실들이 당의 요구에 맞게 수정되고 재선포되며 당의 의도에 배치되는 사실들은 영구히 폐기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당이 전하는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윈스턴은 무엇이 진실인지 회의하지만, 오세아니아 밖에서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당의 말로는 늘 전쟁 중이었다), 그가 진실.. 2013. 2. 13.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학생 땐 별 생각 없이 읽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작가는 카스타리엔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창조하고, 그곳에서 각각 다른 삶의 행보를 보이는 크레히트, 데시뇨리, 테리굴리우스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 및 인간성의 향방을 탐구하고 있다. 의미 있는 여성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가정 역시 불완전한 곳으로 묘사된다. 작가 헤세의 전기적 사실을 심층적으로 안다면 작품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질 듯한데 읽으면서 그 점이 다소 아쉬웠다. 소설에 등장하는 카스타리엔은 수도원과 비슷하나 그와는 성격이 다른 일종의 학문 공동체다. 구성원들은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지만 종교가 아니라 지식에 봉사한다. 무엇을 연구하든 그건 전적으로 자유이며 국가가 기본적 생계를 보장한다. 이백 년쯤 되는 이 새로운 공동.. 2012. 4. 5.
사라의 열쇠 - 티티아나 드 로즈네 '최고'라는 감탄사가 아깝지 않다. 읽는이로 하여금 '사라'라는 한 여인을, 그가 겪은 아픔을, 밸디브 사건을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기억할지어다. 결코 잊지 말지어다." 홀로코스트의 만행은 나찌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비쉬 정부하에 프랑스 경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프랑스인이라면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학살이 자행되었다. 수만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어린아이였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나찌가 요구하지도 않은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990년대가 되어서야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던 밸디브 사건이다. 이 소설은 밸디브 사건을 배경으로 '사라'라는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 소녀의 삶을 추적하는 소설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 2012. 3. 11.
지도와 영토 - 미셸 우엘벡 공쿠르상을 수상한 미셸 우엘벡의 최신작. 그의 소설들 중 가장 소프트한 내용이라는데, 그래 그런지 거부감 없이 잘 읽혔다. 전작들은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문제작이라 한다. 이 소설이 주는, 완성보다는 미완에 가까운 느낌 때문에 이 소설이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을 읽고 싶어졌다. 의 장점은 이 소설이 그 안에 담고 있는 화두의 다양성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제드 마르탱'이라는 예술가의 일대기인데 그것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생각거리가 만만치 않다. 세 번에 걸쳐 큰 변화를 겪는 제드의 예술 세계의 변천 과정을 통해 예술가의 내면 및 그가 작업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 예술의 경향성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가족 및 주변 인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서구 유럽이 현재 도달해.. 2012. 3. 1.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하) - 움베르토 에코 책을 읽으며 아주 긴~ '시간 여행'을 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여행이었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어릴 적 고향 마을로 향나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한 시절을 보냈던 솔라라의 저택과 마을 곳곳을 함께 거닐고, 그가 유년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다시 만났다. 그것은 1930~40년대의 이태리의 한 작은 마을로 떠나는 여행이자, 우리들 자신의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스포일러 많음) 에코의 전작들과 달리 자전적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다른 자전적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자신이 어릴 때 읽은 책과 만화, 음악, 영화를 주된 매개로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정말 자세하고 긴 목록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기억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럴.. 2011. 8. 14.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 최인호 왠지 하루키의 1Q84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3권은 보지 못했지만). 인물들이 출구 없이 막다른 상황에 놓인 것도 그렇고, 이방인처럼 겉돌며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분열증-정신 질환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의 분열-을 겪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인물들이 느끼는 세계가 조화롭고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파편화된 부스러기들의 모음과 그 부스러기들의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마주침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성적 묘사가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점도 그렇고. (스포일러 있음) 더없이 질서정연하고 익숙했던 세계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붕괴하면서 주인공 K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주변 사람들조차 아주 낯설게 다가오거나, 낯선 타인의 얼굴이 익숙한 얼굴로 다가온다. 이 문제를 풀기.. 2011. 8. 1.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천개의찬란한태양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2010년) 상세보기 아주 쉽게 읽히면서도 근래 보기 드문 장중함이 있는 소설이었다. 마리암과 라일라, 두 아프간 여인의 눈물겹도록 슬픈 삶의 조각조각들을 통해 아프간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시종일관 담백한 묘사,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는 문체, 그 속에서 은은하지만 끈질기게 배어나오는 휴머니즘이 감동적이었다. 소설은 이슬람 근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얼마나 여인의 삶에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그 처절한 삶의 와중에서도 사랑과 인간다움을 살아내는 여인들이 있었다. 삶은 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했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도 일상을 꾸려가고 아이들을 .. 2011.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