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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기록/제주, 한라산41

"고통을 즐기는 거지"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2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얗게 쌓인 눈 때문에 칠흙같이 어둔 밤인데도 산이 밝다. 우리들 마음도 그 무엇보다 밝았다. 12월 31일 내내 폭설로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밤 10시를 기해서 정상까지 등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 없는 고요한 산속, 쌓인 눈이 그 침묵의 깊이를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눈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산행을 위해 일박 이일의 시간을 내어 공항에서 날아온 아저씨는 요즘 경기가 하도 안 좋고 힘들어서 무언가 희망을 하나 건져보려고 한라산에 왔다고 했다. 동행한 또 한 분의 할아버지는 지금 이 나이에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도 싶고, 자녀들 잘 되라는 기원도 하려고, 산행에 나섰다고 하셨다. 이 분들께 일출을 보기 위한.. 2010. 6. 26.
우여곡절 끝에 관음사에 도착하다 - 한라산 신년 야간산행 1 서귀포 일대의 온화한 기후 때문에 날씨 걱정을 잊고 있었다. 한라산 성판악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볼 때부터 문제가 터졌다. 민박집 할머니가 가르쳐준 버스 회사에 전화하니 5.16 도로에 사고가 나서 오늘은 더 이상 운행을 못 한다는 것이다. 택시를 알아보니 5.16 도로로는 위험해서 십만원을 줘도 못 간다고 했다. 뉴스에는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고 나오고, 한라산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니, 정상까지는 못 올라가고 성판악 코스는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관음사 코스는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사정이 좋아지면 정상 가는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민박집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뭐 하러 힘들게 그까지 가? 요 옆의 제지기오름에서도 일출 잘 보여. 올.. 2010. 6. 26.
한 해 마지막 날, 서귀포엔 눈발이 날리고 - 제주올레 6코스 마라도를 떠나 서귀포로 넘어오니 날씨가 한결 따뜻했다. 서귀포와 고산 지역은 체감 온도가 5도는 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서귀포 사람들이 느릿느릿하단다. 이 작은 섬에서도 이런 기질적 차이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제주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서귀포는 그래서 눈 구경하기도 어렵다. 밤에 한라산에 갈 예정이라 낮에 올레 6코스길을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6코스 시작점 쇠소깍으로 가지 않고 그냥 숙소가 있는 보목리에서 출발했다. 바닷길, 겨울인데도 꽃이 만발한 마을길, 아름드리 숲길을 지났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길동무가 있다. 1코스는 성산일출봉, 7코스는 범섬, 10코스는 형제섬을 내내 바라보며 길을 간다. 몇 시간 동안 함께 걷다보면 진짜 친구가 된 기분이다. 6코스의 길동무는 섶섬, 문섬, 그리.. 2010. 2. 7.
하루에 단 한 차례 뜬 배 - 겨울 마라도에서 마라도에서 신년 일출을 볼 계획이었는데, 제주 전해상에 주의보가 내려서 30일부터 31일까지 배가 전혀 뜰 수 없단다. 송악산에서 봐야 하나 하던 차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대학생 K가 자기는 한라산 야간산행을 하고 한라산에서 일출을 볼 거란다.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어떤 열정 때문이었을까, 계속 한라산이 마음에 맴돌았다. 그 제안에 솔깃해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곶자왈 입구에서 만났던 김밥 청년을 숙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버스 타고 가면서 내내 한라산 생각하다가 핸드폰까지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둘이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12월 31일 밤, 성판악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한라산으로 갈까. 아니야, 거기서 일출 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쟤가 아직 어려서 산에서.. 2010. 1. 21.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닷길 - 제주올레 12코스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로 구분된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코스, 서귀포에서 중문, 송악산까지의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올레 11코스부터는 서부 지역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서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코스 길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예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 2010. 1. 16.
산 자를 위한 밭과 죽은 이의 무덤이 함께 - 제주올레 12코스 생태학교를 나서서 12코스로 출발했다. 어깨가 조금 무겁다. 봄가을에는 배낭을 매고 다녀도 별 문제 없었는데 겨울짐은 꽤 무겁다. 생태학교에 그냥 짐을 두고, 거기서 하루 더 묵을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잔치도 구경하고. 내가 무릉리에 도착한 날은 그곳 무릉리와 그 옆 도원리가 ‘무릉도원’이라는 컨셉으로 정부 지원 무슨 관광 사업에 선정된 날이라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오늘 밤 돼지 두 마리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고기 꼭 먹고 가라고 주위에서 권했는데, 밤새 벌어질 잔치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다. 촌장님 말씀으론 내년 봄에 12코스에 오면 온 동네가 복숭아꽃으로 가들할 거라고 한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기예보가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날씨는 맑다. .. 2010. 1. 15.
비밀의 숲, 곶자왈 - 제주올레 11코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새 눈으로 바뀐다. 이런 날씨에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레 11코스 곶자왈 입구, 신평리에 내렸다. 당분간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 곶자왈 입구 편의점에서 라면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청년이 자신이 시킨 김밥을 절반 잘라 준다. 사양해도 계속 권해서 감사히 먹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눈보라가 그새 물러나고 햇볕이 환하다. 연말은 대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올해(아니 작년)엔 왠지 일출을 꼭 보고 싶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마라도였다. 먼 길 운전할 필요 없이 바로 앞에서 한 해의 지는 해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곳. 인파로 붐비지도 않을 테고. 새해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 2010. 1. 13.
역사를 초월한 진리는 없다 - 제주올레 11코스, 정난주 마리아묘에서 모슬봉을 내려와 길은 다시 마을과 마을, 밭과 밭 사이로 한참을 이어진다. 그 길 끝에 정난주 마리아묘가 나타났다. 십년 전쯤 제주 성지순례 때 와본 적이 있다. 그땐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걸은 끝에 지친 다리로 도착하니, 글귀 하나 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그 몇 시간의 걸음이 내 귀를 열어준 것 같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순례가 필요한 걸까.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의 아내다. 그녀의 어머니는 신앙의 선조 이벽의 누이였고 정약용 형제들이 그녀의 숙부였다. 신유박해 때 남편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황사영 백서의 내용이 과연 정당한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1801년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어린 아들과 함께 귀양길에 오른다. 그녀는 제주도에, 아.. 2010. 1. 8.
섯알오름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 제주올레 11코스 세월이 흘러도,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은 홀로코스트, 대학살. 수십만을 죽음으로 몰고간 킬링필드, 나찌의 육백만 유태인 학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죽게 한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다만 조직의 명령에 아무 생각 없이 복종했을 뿐. 제주올레 11코스는 제주민의 삶과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들판 사이를 두 시간쯤 정처없이 걷다가 만난 양민 학살의 현장 '섯알오름'은 충격이었다. 4. 3 항쟁의 비극도 알고 있고 이승만 정권 때의 보도연맹 사건 등을 알고 있었지만,.. 2010. 1. 8.
송악산에 오르며 - 제주올레 10코스 송악산은 화산 폭발로 생긴 104미터의 나즈막한 오름입니다. 높진 않아도 반도처럼 솟아서 동쪽 남쪽 서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동으로는 산방산과 형제섬, 남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송악산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그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저 역시 한참을 머물었답니다. 한 잔 술이 없어도, 바다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해지는 쪽으로 무리지어 핀 야생 들국화에 취하고, 지는 햇살에 취하고, 이 모든 세계 앞에서 말없이 감동하게 되는 곳. 그래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끝이 없습니다. 수만년 전 폭발한 작은 분화구는 지금도 야생의 꿈틀거림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의연히 서 있었습니다. ... 그대가 만일 이곳에 온다면, 동서남북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절.. 2009. 11. 29.
외로움이라는 선물, 마라도에서, 제주올레 10코스 올레 10코스, 사계리 해안 도로를 걷다보면 마라도 유람선 선착장이 나온다.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시월인데도 여름처럼 뜨거운 날이어서 유람선에서 맞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승선한지 30분만에 국토 최남단의 섬, 마라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죽 늘어선 전동차와 호객꾼의 행렬에.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자 나타난 건 시장통 같이 북적대는 상가들. 전부 다 짜장면집이었다. 유람선이 한 번에 몇 백명씩 사람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이리 된 것 같았다. 산도 높다란 언덕도 없는 이 자그마한 섬을 가득 채운 음식점과 소음 때문에 굉장히 실망했다. 빈 모습 그대로 두면 더 좋을 것을. 자연은 꾸미지 않은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마라도의 맑은 얼굴 위로 덕지덕지 칠해진 .. 2009. 11. 14.
우리는 '바다'로 간다 - 제주올레 10코스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한 적은 별로 없다. 차를 몰며 가끔 이 길 끝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거나, 갑갑할 때 바다를 떠올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실체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막연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가까운 감포나 포항에 회 먹으러 더러 들렀고 부산에도 자주 갔지만, 그 바다가 내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저 북쪽의 강원도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만난 맑은 물과 백사장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바다는 상상 속의 풍경 한 컷 정도일 뿐, 독립적인 대상으로 내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롬복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은 황홀했으나, 그것 역시 잠깐의 마주침이었을 뿐, '바다' 그 자체가 내게 어떤 의미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바다의 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 2009. 11. 4.
낯선 곳의 아침 - 제주올레 10코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시간의 다른 차원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다르게 지각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 피부에 닿는 공기의 질감이 다르고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강도가 다르고 차창을 열면 만나는 풍경의 색감이 다르다. 아침 밥맛이 다르고 식후에 마시는 차맛의 깊이가 다르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단 일박일지라도,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이 주지 못하는 시간의 깊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모든 아침은 그래서 '세상의 첫 아침'이다. 이 아침의 신성한 기운이 좋아서 가끔 누구도 이 공간에 들여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에 누구와 여행할 때도 문득 스쳐가는 생각에 나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상대방이 알면 섭섭하겠지만 이 아침을 홀로 만끽하.. 2009. 7. 7.
안덕계곡에서 화순해수욕장까지 - 제주올레 9코스 다정한 숲길, 안덕계곡 박수기정을 지난 길은 들판과 마을을 거쳐 안덕계곡으로 이어진다. 안덕계곡 숲길은 9코스의 하일라이트였다. 거칠고 험한 자연이 아니라, 누군가 귓전에 속삭이는 것 같은 다정한 숲길. 전설에 따르면 태초에 7일 동안 안개가 끼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태산이 솟아날 때, 암벽 사이에 물이 흘러 계곡을 이루며 치안치덕(治安治德)하는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던 곳으로 김정희, 정온 등도 이곳에 유배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절경을 즐겼다고.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있지는 않겠지만(귤밭 등으로 훼손되었다 함), 나는 뭍에서 만나기 어려운 고요한 계곡길의 정취에 반했다. 그 길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만, 부드럽고 나직하고 맑고 가벼운 .. 2009. 6. 29.
박수기정 넘는 길 - 제주올레 9코스 제주 올레길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 그 길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산과 오름과 계곡,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바람, 파도, 바위, 갈대, 들꽃, 뭍 생명들이다. 지리산과 같은 장중함은 없지만, 화산섬이라 그런지 작은 섬 안에 다채로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빈 해변이 이토록 아름답구나 하고 느낀 곳이 제주이다. 자연 그대로의 길이 아주 길지는 않다. 이 길이 30분만 계속되면 좋겠다 싶지만 야생적인 해변이나 숲길은 때로는 5분, 10분만에 끝이 난다. 그리고 인가와 사람들이 만든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것은 올레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만나는 길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처음 걷기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2009.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