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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을 적다413

광화문 미국대사관의 기억 미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미국 본토가 아니라 광화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결정되었다. 내가 가려고 했다가 '외압'에 의해 못 간 나라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미국이다. 미국대사관 비자인터뷰가 존재하던 90년대말의 추억(?)이다. 이십대 중반, 임용시험을 어찌어찌 끄트머리로 붙었다. 끄트머리로 붙다 보니 봄에 발령이 안 나고 2학기인 9.1일자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발령 전까지 몇 달 여유가 생긴 거다. 시험을 친다고 심신이 지친 상태라 딱히 가고 싶은 데는 없었다. 그냥 미국이나 한번 보자 싶었다. 당시만 해도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로웠다. 미국대사관에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하러 가야 했다. 마침 IMF 직후라 비자 거부율이 높다고 했다. 나는 교육청에 여행 간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장학사의 달갑.. 2021. 7. 12.
장마 전, 하늘의 선물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5시에 일어난 날, 베란다 창문으로 붉은 빛이 진하게 번져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갔다. 아파트 창밖으로 야생과 다름 없는 광대한 하늘이 열리다니! 분홍, 보라, 오렌지빛이 섞인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 시각에 일어난 적이 없으니 이처럼 가까이에 자연이 힘차게 움직일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녘,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각에 장엄한 일출을 바라보다가 알았다. 내가 잃어버린 감각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소싯적 배낭여행을 할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왜 이렇게 일출, 일몰을 자주 보지? 네팔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발리에서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도 일출 시간에 맞춰 산을 오르거나 일몰 시간에 맞춰 해변을 서성거렸다. 여행지에서 내가 챙기는 많은 것들.. 2021. 7. 4.
김 여사와 하모니카 어릴 때와 사춘기 때 접한 것은 무엇이든 마음에 조각칼로 새긴 듯 일평생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 그 시기가 정말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그때 처음 들었던 몇몇 클래식 곡은 말 그대로 영혼을 휘몰아치게 했다. 음악감상 시험을 위해 처음 들었던 스메타나의 몰다우나 슈베르트, 베토벤 등등 그땐 사실 G선상의 아리아만 들어도 전율이 왔다. 바이올린이나 첼로 소리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한 울림이 있었다. 지금은 뭘 들어도 그만큼의 감흥이 없어서 아쉽다. 나는 하모니카엔 별 감흥이 없다. 관련된 추억도 없고. 하지만 김 여사는 다르다. 십대 때 하모니카를 기가 막히게 불던 동네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저녁 나절이나 밤이면 그 하모니카 소리가 집까지 들려왔단다. 그 소리가 얼마나 좋던지 지.. 2021. 6. 29.
주말의 라이온즈파크 토욜에 D가 야구 보자 해서 라팍에 갔더니 어마어마하게 긴 줄. 사람이 정말 많았다. 모여든 사람들만큼이나 주위엔 흥겨운 에너지가 한가득 번지고 걍 사람 구경 하러 갔는데 삼성이 한 회에 6점 내주다가 연이어 홈런을 치고 홈런 하나는 바로 내 곁으로 날아와서 보는 즐거움도 있었던 경기. 물론 9회까진 난 못 지킨다. 코로나 이후론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건 처음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모습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저녁. 코로나의 긴 터널로부터 벗어날 날을 기다린다. 2021. 6. 28.
"이만하면 다행이다" M과의 통화는 늘 이 말로 끝을 맺는다.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M은 음악 선생님이다. 내가 첫 발령을 받은 모중학교에서 이십대 때 처음 만났다. 키가 작고 얼굴이 갸름하고 몸매도 마른 편이다. 87학번이니 나보다 다섯 살 많지만 서로 나이가 들면서 니네 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내가 주말에 시험 문제 내느라 골머리를 앓을 때면 전화해서 "그러게 왜 국어를 했어? 음악을 하지." 하면서 놀리곤 한다. 음악은 일 년 내내 지필고사를 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서 자기는 음악이니까 선생을 하지, 국영수면 선생 못 할 거라면서 다음 생에서는 꼭~~ 음악을 하라면서 부아를 지른다. M은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기사 딸린 자가용 타고 다니다가 (내 기억에 88올림픽 전.. 2021. 6. 25.
삶의 진정한 만족감은 "나도 중년이 처음입니다" 예전에 서점에서 얼핏 본 책 제목이다. 내용은 별로 흥미 없어 보여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 제목에는 정말 공감이 갔다. 그래, 우리 모두에게 중년은 처음이니깐. 나이에 붙은 4라는 숫자에 이제 좀 적응할 만하니 5가 다가온다. 20대와 30대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그 다음 숫자들은 왜 그렇게 낯선 것일까. 중년의 위기는 길은 잃은 느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앞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갑자기 어디로 가야할 지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한 느낌. 혹은 에너지가 바닥 나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재미 있는 것도 모호한 상태. 삶의 진정한 만족감은 어디에서 올까. 중년엔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정과 경제적 자유를 많이들 꼽지만 그것보다 .. 2021. 6. 24.
들꽃 한 송이만큼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자 매일미사에서 읽은 성서 구절. 그렇다. 아무리 영화를 누리고 화려하게 삶을 치장한들 들꽃 한 송이만큼 빛나게 차려입을 수 있을까. 생명이, 우리들의 삶의 시간이 진정 소중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장식물일 뿐. 맑은 눈빛, 환한 미소, 인생의 한계 앞의 겸허함, 언젠가 끝이 있게 마련인 인연에 대한 다정함, 이런 마음의 옷을 더 갖춰입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의 본질적인 펼쳐짐’에 더 눈길을 주어야하지 않을까. 블교에서는 자기 고유의 생명 혹은 욕망의 펼쳐짐을 다르마를 따르는 것이라 했다. 사진은 천을산 올라가는 길에 발견한 올해 첫 코스모스. 코스모스가 자기를 꽃피워내듯 사람에게도 자기가 피워내야 할 꽃, 다르마가 있다고.. 2021. 6. 19.
혼자 있을 때 더욱 시어른께서 뇌경색으로 입원하셔서 D가 병원과 고향에 많이 가 있었다. 혼자 있으니 밥 하기가 왜 이리 귀찮은지. 라면, 비빔밥, 샌드위치, 씨리얼, 두부로 간단히 떼우다가 D가 돌아오자 냉면 하나도 맛나게 차려 먹게 되었다. 갈비찜도 하고 김치찌게도 하고. 어떤 심리학자가 자기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자기를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보라고 했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혼자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를 왜 소홀히 대할까. 혼자 있을 때 뭐든 대강대강 떼우고 말까. 40년 넘게 살았지만 자기를 잘 챙기고 배려하는 데에 익숙치 않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타인과 잘 지내기에 앞서 자기와 잘 지내야 한다.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더없이 소중.. 2021. 6. 16.
핸드폰에 보관된 소확행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은 결코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니다. 일상에 불어넣는 작은 위로와 생기다. 이 소소한 숨결이 있어야 생활에 윤기와 활력이 돌고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나설 힘을 얻는다. 즉 소확행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 그런데 핸드폰에 보관된 내 소확행의 흔적들을 보니,,, 먹을 게 왜 이리 많지? 먹는 게 제일 큰 즐거움인가? 내가 이렇게 원초적 인간이었다니! 1. 천을산 솔숲 맨발로 걷기. 사람들이 많이 하길래 따라해보았는데 땅을 맨살로 느끼는 촉감이 너무 좋다. 날씨 따라 어떨 땐 미지근하고 어떨 땐 차갑고. 걷고나면 온몸이 맑아지는 느낌! 2. 새로 산 자전거. 삼천리자전거 프림로즈다. 자전거 뭘 살까 엄청 오래.. 2021. 6. 16.
정신이 번쩍 드는 연령별 생존 확률 얼마 전 페이스북에 어느 분이 올린 내용이다. 연령별 생존 확률. 2020년 통계청 통계다. 70세엔 대부분 살아있으나 75세가 되면 반이 돌아가시고 80세엔 30퍼센트, 90세엔 단 5퍼센트만 지상에 있다. 언제 인생을 사십 년 훌쩍 넘게 살아버렸을까.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2021. 6. 8.
5년만에 지운 번호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는 게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 5년하고도 반 만에 아빠 전화번호를 폰에서 지웠다. 도저히 지울 수 없어 그냥 두었었다. 처음엔 가끔 이 번호를 눌러보았다. 없는 번호라고 뜨다가 한참 지나 이 번호는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갔다. 내가 전화번호 '즐겨찾기'에서 엄마를 누른다는 게 가끔 실수로 그 위의 아빠를 잘못 눌러서, 알지 못하는 그분이 전화를 받는 일이 생겼다. 몇 번 실수하고는 지워야겠다 마음먹었다. 마음 먹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 번호를 지웠다. 보지 못해도 한 번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톨릭 신자지만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여전히 어렵다. 다만 동 트기도 전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의 심정에 깊이 공감할 뿐.. 2021. 6. 8.
시집 선물 받다 백만 년만에 시집을 선물 받다. 500쪽 가까이 되는 두툼한 시집에서 아무 쪽이나 펼쳐드니 이 시가 나온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음미하며 일어볼 참. ## 통계에 관한 기고문 / 쉼보르스카 백 명의 사람들 가우네 모든 것을 더 잘 아는 사람 -쉰둘 매번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확신이 없는 사람 -나머지 전부 다 비록 오래가진 못할지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최대한 많이 잡아 마흔아홉 다른 성향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늘 착하기만 한 사람 -넷, 아니, 어쩌면 다섯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사람 -열여덟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일흔일곱 진정으로 행복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 -최대한 스물 하고 몇 명 혼자 있을 땐 전.. 2021. 6. 3.
사람은 어떨 때 괴물이 되는가 사람은 어떨 때 괴물이 되는가. 최근 한강 대학생 실종 사건은 대중의 광기에 대해 생각을 하게 했다. 손군 친구의 대처가 아쉬운 부분은 있을 수 있으나 그 학생도 필름 끊길 만큼 마신데다가 기껏 이십대 초반인데 뭘 제대로 알았겠으며 상식적으로 많은 사람 오가는 한강가에서 친구가 손군을 왜 죽이겠는가? 살해 동기가 전혀 없는 사건인데 음모에 음모론을 펼치는 사람들. 그저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고 싶은 욕망의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손군 부친도 처음엔 매우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분이었으나 극심한 고통이 그를 돌게 만들어 지금은 남의 아들을 죽이려는 괴물이 되어가는 중. 즉 평범한 사람도 어떤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자지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지 못해 더욱 자기를 막다른 골목.. 2021. 6. 3.
꿈꾸지 않으면 유튜브에서 합창곡을 듣다가 문득 알고리즘에 딸려 나온 노래. '꿈꾸지 않으면'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게 2001년이었다. 간디대안교육연수원 다닐 때 배운 노래. 그때만 해도 열정 충만해서 학교 근무하면서 산청간디학교까지 한 달에 한 번, 몇 달간 공부하러 다녔다. 이 노래는 당시 간디학교 음악 선생님이 작곡하신 걸로 들었다. 노래가 너무 좋아 이메일로 악보를 요청해서 집에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라니.... ㅠㅠㅠ 세월이 어떻게 흘러간 것일까. 지금 이 노래는 간디학교 교가인 모양이다.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 노래도 많이 알려졌다. 그 사이 나는 몸만 늙은 게 아니라 마음도 한참 늙은 것 같다. 꿈을 꾼다는 게 이토록 버거운 일이 될 줄이야. 이 노래 말고 그분 음악 선생님이 만.. 2021. 5. 29.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세요? _ 최근 받은 선물들 1. "요즘 이 재미로 살아요." 삼 년 전쯤에 친한 후배가 도자기 굽는 데 푹 빠졌노라며 한 말이다. 요새 그릇 굽는 것을 배운다면서 좀 할 줄 알게 되면 꼭 선물하겠노라 했다. 나는 흘려가면서 들었는데 얼마 전 자기가 구운 도자기 그릇을 안 깨지도록 꽁꽁 싸서 왔다. 삼년 전 약속을 기억하고 이렇게나 많이 선물하다니. 굽는데 한참 걸렸을 것이다. 상대방을 생각하며 오래 준비한 선물이라 감동 받았다. 큰 접시가 빠졌다면서 잘 배워서 큰 접시도 주겠다는데 이걸로 충분하다며 사양했다. 음식을 담으면 그릇이 훨씬 돋보인다. 2. "집 주소 좀 알려줄래?" 친한 선배, 더 정확히는 더러 연락을 주고받는 수녀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대학 때 성당에서 레지오활동을 같이 했던 선배다. 보내주고 싶은 게 있으시단다. .. 2021. 5. 25.